1.
㉠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43쪽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이래, 『소년이 온다』(2014), 『작별하지 않는다』(2021) 혹은 이전에 맨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2007)에 다시금 주목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최근작과 저명한 수상작이라는 의의도 있겠으나, 유독 정치적인 쟁점이 직관적으로 읽힐 뿐더러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쟁론들이 현재 한국의 시공간에서 모종의 시의성을 확보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출간된 장편 『희랍어 시간』은 이러한 작금의 주목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자신의 창작 흐름을 되짚는 한강의 노벨 강연 「빛과 실」에서도 언급되듯 그 문학 세계의 원공간을 엿볼 수 있는 주요한 텍스트다.1) 작가는 해당 소설에서 사어死語를 연구하는 ‘남자’와 실어증을 앓는 ‘여자’ 두 화자의 서사를 교직하며 ‘언어’의 상징적 폭력성을 묘파하는 동시에,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들의 고통에 응답하고자 하는 윤리적 의지에 천착한다.
한편 『희랍어 시간』에서 ‘희랍어’—“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을 가진,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20~21쪽)—가 상징하는 로고스 중심주의 및 기독교 기반 서구 형이상학은 불교적 색채가 짙던 한강 텍스트들 가운데서 다소 이질적이기도 하다. 「아기부처」(1999)나 「붉은 꽃 속에서」(2000),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 등 직접적으로 불교적 소재가 사용된 단편들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비인간으로의 이행(「내 여자의 열매」(1997))이나 타아의 경계를 넘는 순환(『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무아·윤회 등의 모티프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희랍어 시간』 본문에서도 훗날 독일로 이주해 희랍 철학을 전공하는 ‘남자’가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소년 시절, 서점에서 “문고판 『숫타니파타』와 『법구경』, 현암사에서 나온 연와무늬 표지의 『화염경 강의』와 『열반경 강의』”를 사는 장면이 나온다. 모국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가 연등회 구경을 간 것이 그 원인이다. 그는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25쪽)에 깊은 인상을 받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서서히 흐려지던 눈이 마흔 즈음 완전히 실명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가 시각적 찬란함에 유난히 고통스러운 애착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위의 책, 43쪽
㉠은 독일에서 안과 진료를 받던 ‘남자’가 그곳 병원 의사의 딸이었던 첫사랑에게 보여준 논증이다. “어린 시절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져왔지만, (……) 새벽까지 어두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런 혼령들이 있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 존재할 거라고. 논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기독교의 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42쪽) 순진한 심성의 첫사랑에게 심술을 부린 것이다. 그러자 분개한 첫사랑은 ㉡과 같이 ‘남자’에게 답한다. 상술한 한강 문학의 불교적 사유를 염두에 두고 일련의 장면을 보면, ‘남자’의 첫사랑이 말하는 ‘슬퍼하는 신’에서도 유사한 맥락의 갈피가 잡힌다.
‘남자’가 논증했듯 ‘전능하지 않은 신’은 정의상 모순에 가깝지만 ‘슬퍼하는 부처’는 적어도 한국불교의 문학적 자장 안에서는 ‘자비심慈悲心’이라는 단어가 그렇듯 다분히 자연스러운 어감을 갖는다. 김동리의 「등신불」(1961)에서 액자 안 서사의 주인공인 만적은 인세의 악에 짓눌린 무고한 삶을 목격한 뒤 스스로 불전에 몸을 태워 바치고, 그 소사체는 염원을 이루어주는 불상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만적의 그 같은 수행은 계모의 음해를 못 견디고 도망쳐 떠돌다 나병에 걸린 전처소생 사신을 구제하지도 못했고, 만적의 사체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타들어가 뒤틀린 모습으로 남는다. 그 불상을 목격한 액자 바깥의 화자는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겁에 질려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라고 입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소설의 배경은 학병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이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이송되던 전시戰時였고, 탈영한 화자는 타국의 절에 몸을 숨겨 대륙을 휩쓴 전화戰火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처지였기 때문이다. 부처조차도 고통을 구제하긴커녕 그것에 짓눌린다는 건 이 세계 자체가 출구 없는 지옥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길 잃은 여자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하는데, 노힐부득은 유혹이 두려워서 거절해요. 하지만 달달박박은 여자를 암자 안으로 들여요. (……) 연출자는 제가 그 이야기의 전체 뼈대를 지켜주길 바랐어요. 하지만 쓰면 쓸수록 제 마음이 그 결말과 멀어졌어요. 그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았어요.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앙북스, 2015, 21쪽
한강의 문학적 세계관에서도 부처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할 만큼 전능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추위에 떠는 행로병자일 뿐인 관음보살과,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그를 추위 속에 방치하는 승려들은 모두 지독한 악과 고통 가운데서 슬퍼하는 피해자이자 방관자일 뿐이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왜 『희랍어 시간』에서 ‘남자’의 첫사랑은 슬퍼하는 신을 믿는가.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는 신에게 어떤 신성이 있고, 그 종교에서 어떤 위안을 찾을 수 있는가.
2.
㉢ 이 몸들이 모두 그 거리에 함께 있었을까. (……)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넋 나간 듯 중얼거리는 너를 행렬의 앞으로, 더 앞으로 잡아끌었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그들이 내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탄환을 박아넣기 전에. 저 얼굴들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기 전에.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59쪽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들은 유령이다. 작 중에서 죽은 혼이 독백을 하기도 하지만, 직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적인 것’의 의미에서 그렇다. 그들의 목소리는 시차 없이, 매개 없이, 은유 없이 포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죽은 이의 사연은 수십 년이 지나서 다른 이의 증언을 통해 기록되고, 증언을 요구받는 당사자는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그걸 말할 수 있겠는가 절규한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소한 일상들은 그것이 송두리째 박탈된 이후 전혀 다른 맥락과 무게의 의미를 획득한다.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 자신을 유령으로 여긴다. 그들은 ‘희생자’로 불리지 않으려 한다. ‘진짜’ 희생자는 살아남아서 증언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증언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린 망자들이란 의미에서도 그렇고, 그들이 그저 무력한 희생양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지기로 한 주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럼 그들은 무엇으로 불려야 하나? 역사에 그들을 기입할 이름이 없으나 그들은 존재하며, 존재하므로 고통받는다. 그들은 역사 위에 유령처럼 부유한다.
㉢은 무언가가 ‘유령’이 되는(비가시화하는), 혹은 유령이 ‘보이게 되는’(가시화하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군대’와 ‘애국가’는 분명한 국가의 기표이며 이 기표들은 그 소속원들의 일체감을 보증하거나 촉진한다. 그런데 ‘우리 군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총을 쐈다. 그렇게 넋 나간 듯 중얼거리던 소년은 이후 도청 상무관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17쪽) 그것에 관해 물었을 때 ‘은숙 누나’의 답변은 간단하다. 그 군인들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나라’가 아니다(자동으로 이 답변은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다, 애국가와 태극기를 가질 자격은 그 군인들의 적인 우리에게 있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그래도 소년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곳곳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입관 탓에 돌림노래처럼 포개지는 애국가에서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들린다. 실제로 도청 최후의 밤이 지나간 뒤에 ‘나라’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독점한 것은 소년 및 ‘은숙 누나’의 반대편이었다. ‘나라’(군인)가 ‘나라’(태극기, 애국가)를 공격하고 살해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들은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된 것이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20쪽.
그처럼 ‘폭도’·‘빨갱이’ 등의 오명으로 봉합되지 않는 한 그 존재가 ‘성립 불가능한’ 실재, 시차를 두고 매개체를 통해 번역된 흔적으로만 독자에게 닿는 어떤 진실을 ‘유령’이라고 잠시 약칭하겠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 소설 중에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제의 ‘유령’을 재현한 독보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강 소설에서 ‘유령’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의 처절하고 혼란스러운 목소리와 그것이 암시하는 ‘육식’적 세계의 부조리는 그를 ‘제정신이 아니’라 못 박고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간단히 봉합된다. 『바람이 분다, 가라』(2010)에서 주인공 정희는 이미 확실시된 정설(친구 인주가 자살했다는 것) 앞에서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가설(그것이 타살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소설의 결말까지도 성공하지 못한다.
고통 받는 약자(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함으로써 폭력적인 세계를 고발하는 것이 한강 문학의 전매특허도 아니다. 랑시에르라면 그것은 모든 예술의 (정치적) 소명이라고 할 것이다. ㉠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하고(합리적이고) 전능한(합리성에 따라 작동하는) 신(규칙이나 구조)이 있다면 그것들을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바로 그 무고한 희생자들이 신을 ‘성립 불가능한 오류’로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들은 그 희생자들을 ‘유령’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왔을 것이다.

3.
『희랍어 시간』의 ‘남자’는 소설 후반부에서 사고로 안경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실명 상태가 된다. 심하게 다치고 무력해진 그를 ‘여자’가 간신히 부축해서 집에 데려다준다. 불안 때문에 계속해서 말을 거는 그를 두고 갈 수 없어 ‘여자’는 밤늦도록 그의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어느새 두 사람은 지쳐 잠든다. ‘남자’는 꿈속에서 다시 첫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가질 수 없는 감각의 세계를 욕망했기 때문에 감각을 초월한 희랍식 논증에 빠져들었던 ‘남자’는 시각을 잃는 순간, 바로 옆에 ‘여자’가 있음에도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그동안 한 번도 ‘여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므로 ‘남자’는 ‘여자’가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희랍어가 아무리 명료해도 그들은 그 언어로 성립되는 세계의 바깥에 있었다. 그때 기적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복잡한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불편한 방법이었으므로 ‘여자’는 이후 ‘남자’의 이야기를 대답 없이 듣기만 한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문득 전혀 상관 없는 기억을 떠올린다. 아홉 살 때 ‘여자’는 키우던 개가 눈앞에서 차에 치이는 것을 목격한다. 어린 그는 죽어가는 개를 껴안으려 했지만 개는 그를 맹렬히 물어뜯는다. (애초 ‘남자’가 안경을 잃은 것은 길을 잃고 죽어가던 새를 구해주려던 두 사람을 도리어 새가 공격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다. 어쩌면 이것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간의 애정을 외면하고 죽은 새와 그 외면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관계로 변주되는 모티프이다) ‘여자’는 ‘그토록 어리석게’ 끝까지 개를 껴안는다.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란 결국 ‘유령’을 만드는 대신 스스로가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길 택하는 존재이다. ‘여자’는 왜 어린 자신이 기절하면서까지 개를 껴안으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간신히 소통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함께 밤을 넘기지만 그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184쪽) 그러나 그들이 그들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 이유가 되는 슬픔은 한강 문학에서 서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인 동인이기도 하다.
그 슬픔은 정치적인 에너지로 직결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익숙한 국민성의 논리에 회수되거나, 개별적 역사의 고유성을 희석하는 등 첨예한 문제의식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자기만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간 실천적 장에서 무력하고 패배주의적인 것으로 비하되었던 슬픔과 애도의 정치적·윤리적 ‘역량’이 점점 더 담론장에서 주목되는 추세지만, 슬픔과 애도가 온전히 어떤 실천적 ‘역량’으로 환원된다고 보는 건 무리한 비약이다. 그러므로 「빛과 실」에서 한강은 질문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은 다시 질문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사실 구하지 못할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체스에는 끝이 있다. 날씨에는 끝이 없다. 우리가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2)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한강의 텍스트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슬퍼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슬퍼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묻는다. 슬퍼하는 신의 세계는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아름”답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음과 번민 속에 서성이던 거리 위에 있다. 자잘한 검은 돌들이 박힌 포도를 통과해 걸어간다.
구르는 바퀴가 불쑥 튀어오를 때마다 우리는 가슴 앞으로 손을 내밀어 서로를 달랜다.
선하기에 슬퍼하는 신을 어깨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적 속에서 나아간다.3)
1) 『희랍어 시간』을 키워드로 한강의 문학 세계를 되짚는 구상은 가천대학교 김진규 선생님의 <우리문학회> 136차 학술대회 발표문 「한강 문학 속 분리와 연결의 역학 - 『희랍어 시간』을 중심으로」와, 한강과 한승원의 ‘동양적 세계관’을 지적한 서울과기대 정기인 선생님의 토론문에서 발상을 얻은 것임을 밝힌다.
2)리베카 솔닛, 설준규 역, 『어둠 속의 희망』, 창비, 2006, 102쪽.
3)원본은 『희랍어 시간』 49쪽의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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