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적인 사람과 매력 / 박성관

1. 분해의 철학

󰡔분해의 철학󰡕이라는 책을 번역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저자는 일본의 사상가 후지하라 다쓰시. 연구 주제가 좀 특이한데 ‘농업사 / 식(食) 사상사’라고 되어 있다. 얼마 전 구입한 일본의 월간지 <현대사상>의 2021년 첫호를 펼치니 맨 앞에 그가 나온다. ‘식물의 삶’, ‘먹는다는 것의 의미’ 등을 둘러싼 대담이었다(「인간은 살아있는 땅이다 - 분해와 혼합의 철학」).

󰡔분해의 철학󰡕의 4장은 「넝마주이의 마리아」로, 고물상 혹은 넝마주이가 주인공이다. 맑스가 가장 멸시했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4장에서는 21세기의 비전인 생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존재다. 참고로 ‘룸펜’이란 ‘누더기’ 혹은 ‘넝마’라는 뜻이다. 한편, 1장은 「‘제국’의 형태 - 네그리와 하트의 ‘부패’ 개념에 대하여」다. 네그리와 하트가 맑스레닌주의의 생산중심주의를 취하고 있다며, 부패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한다.

쓰레기나 분해, 고물상에 흥미를 갖다 보니 이전이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여자 고물상’을 소개하는 이색적인 내용이었다. 재미있는 그 기사를 얼굴책에 공유했다.



앞으로는 분해와 관련된 노동자들이 점점 더 의미있는 역할을 할 거 같다. 수많은 상품들이 얼마 안 쓰고 버려져 곧장 땅에 파묻히거나 바다로 수장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적절한 분해 단계들이 생략된 채 내버려지니 충분히 분해되지 않고, 그 결과 순환되지 못한 채 쓰레기들로 계속 쌓여만 간다. 우리 행성이 점점 더 플라스틱 지구가 되어간다. 분해 노동자, 곧장 죽어 파묻혔을 물건들을 소생시켜 생략된 분해 단계들을 다시 밟아가게 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고 순환하는 데 언제나, 은근히, 꾸준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 필수 노동자

2021년 대통령 신년사 중 마무리 부분에서 그런 사람들이 또 등장했다.

“필수노동자라는 말도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보건, 돌봄, 운송, 환경미화, 콜센터 종사자와 같이 우리의 일상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분들의 노고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보던 [마스크같은] 물품 하나가 어느 순간 가장 중요한 물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꼭 필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필수 노동자라..... 처음 듣는 단어다. 몇 번 듣긴 했는데, 다른 뉴스들에 덮이고 덮여 잊어버린 것도 같다. 그게 나와 직접 관계된다는 걸, 아니 내가 필수 노동자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3. 필수적이고 특수한 노동자란?

필수 노동자라니, 그런 노동자들 꽤 많을 거 같은데.... 그걸 어떻게 정했지, 어떤 노동자들이 필수 노동자일까? 알아보니 출발은 10년도 훨씬 전의 필수공익 사업 규정이었다. 철도, 항공, 수도, 전기, 가스, 병원, 한국은행, 통신 분야의 노동자들. 이들은 파업하기에 매우 불리한 노동자들이었다. ‘공중의 일상생활과 국민경제를 현저히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명분하에 툭하면 ‘직권 중재 제도’를 이용해 정부가 ‘불법 파업 딱지’를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악폐 때문에 “2006년 말 이 제도를 폐지하고 2008년 노사정 합의로 필수공익사업장 개념을 도입했다. 이 사업장의 필수유지업무에 한해서만 쟁의기간 중에도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등 예외 조항을 둔 것이다.” 이 예외 조항 덕분에 파업을 벌이는 게 한결 수월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출현한 ‘필수유지업무’의 성격이 코로나 사태로 크게 바뀌었다. 기존의 대규모 공공 업무에서 사회 유지를 위해 대면 업무를 해야만 하는 업무로 바뀐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필수 노동자인지도 달라졌다. 대통령 신년사에 나온 “보건 의료, 돌봄, 배달 및 택배, 환경미화 노동자다.” 이들은 가뜩이나 근무 여건이 열악한데 대면 서비스를 해야 하는 특성 탓에 감염 위험도 높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 크게 개선되는 분야에서는 해고 가능성도 높다.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한 노동이 소위 3D 업종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와 각 지자체들이 이들의 안전 및 지원 대책들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출발이 중요하다. 빠른 시일 내에 획기적으로 개선되길 바란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정규직이 아니라 “특고 및 프리랜서다.” 가만 있자, 특고라면 특수고용 노동자가 아닌가!


4. 나를 발견하다

지금까지 나는 그냥 자유 연구자였다. 글을 싣거나 책을 낼 때, 또 강연을 할 때 나를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지 물어오면 그렇게 답하곤 했다. 스스로는 연구 노동자쯤으로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자인지는 실감이 잘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닥치니 나도 특정한 유형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지난해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딱히 내가 속한 분야가 안 보였다. 공문을 잘 읽어보니, 나처럼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포괄하려는 취지가 느껴졌다. 기존의 어느 분류에도 해당하지 않으면서 가장 큰 위험과 불안정 상태에 처해 있는 층 말이다. 지원금은 받아야겠기에 눈을 부라리고 찾아보니 나는 특수고용 노동자에 매우 가까웠다. 특고라고 하면 학습지 교사들이나 트럭 운전수 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재난 시대에 나도 그 계층에 속한다는 발견! 아~ 내가 바로 특수고용 노동자였구나. 얼른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많진 않지만 지원금을 받아 쏠쏠하게 썼다. 이번 글을 쓰다 보니 특수고용 노동자니까 필수 노동자일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5. 어떤 특수 노동자?

필수 노동자들은 무엇을 생산하는 쪽보다는 일상을 유지시켜주고 돌봐주며(보건의료, 학교) 연결시켜주는(수송, 택배) 직종이다. 이들이 없으면 비대면 방역 정책은 불가능하다. 백신도 치료제도 일상이 유지된 바탕 위에서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적어도 문 대통령은 이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표현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앞으로도 대규모 사태들은 다양하게 발발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가 상기할 수 있을까, 사람을 돌보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쓴 덕분에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를 묻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특수고용 노동자고 필수 노동자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일상을 유지하고 세상을 순환시키는 데 독립 연구자들은 어떤 일로 기여할 수 있을까? 지구가 좀 더 많은 분해 단계들을 거치며 늦게 자전하도록 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일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박성관(독립연구자, <표상공간의 근대>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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