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소로 짓는 시 / 김보슬


楊柳靑靑江水平 버들은 푸릇푸릇 강물은 잔잔한데
聞郎江上踏歌聲 강 위에서 들려오는 임의 노랫소리.
東邊日出西邊雨 동쪽엔 해 뜨는데 서쪽은 비 내리니
道是無晴欲有晴 말하자면 무정한 듯 오히려 다정함이라.
[사진 1.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서호(西湖) 정경, 사진 제공_최민]

이 시는 당나라 문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쓴 ‘죽지사 竹枝詞’이다. 죽지사는 개별 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중국에서 기원하여 한반도에서도 유행하였던 7언절구 시의 양식을 일컫는 말인데, 여러 시인들이 남긴 각기 다른 죽지사들이 대체로 그 형식명 죽지사 하나로 불리는 듯하다. 앞선 유우석의 죽지사는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라는 TV 연속극에 언뜻 나왔었다고 하던데,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내게는 관심 밖이었다. 내가 이 시를 만난 것은 우리나라 전통 관악 연주자 최민을 통해서였다.

그는 언젠가 이런 기록을 한 적이 있다.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은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중국 절강성 항주시 임안(臨安)의 한 대나무숲에서 두루두루 거닐다 뇌리를 스치는 시를 꺼내다.

우연히 이것을 보았다. 나의 착오나 편견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대나무숲을 두루두루 거닐다가 시를 읊는’ 80년대생이 있다는 데에 크게 놀랐다. 30대 아닌가. 나와 비슷한 문화를 가지지 않았는가. 두루두루 거닐다 시를 왼다고? 우리 세대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해 식어가는 줄 알았던 시가, 저렇게 산뜻하게 뇌리에 스친다고? 잠이 확 달아날 만큼 반갑고 획기적이었다. 이미 최민과는 구면이었다. 두어 번 그의 공연 관계자로 일했고, 인사와 대화를 나눈 적 있고, 두서넛 어울리는 자리에서 밥도 함께 먹었지만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가 외국에서 왔다는 것조차 몰랐다. 말씨가 여느 서울 출신 같았는데, 미세하게 다른 것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그의 고향은 옌볜이었다. 재외동포였던 것이다.

세로로 부는 우리나라 전통 대나무 관악기 중에 퉁소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대금, 소금, 피리 등 다른 전통 관악기에 비해 이 악기의 연주자가 확연히 적다. 옌볜 훈춘시에는 ‘퉁소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민은 그곳에서 퉁소를 배웠다. 우리 민족의 악기가 한반도에서보다 만주 대륙에서 명맥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사진 2. 전통 퉁소, 출처_위키백과]
[사진 3. 퉁소 연주자 최민]

그런 퉁소가 올해 처음으로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 악기로 편성되어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협연 악기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일부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퉁소 전공자가 없기 때문에 최민이 현재 대금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특별수업을 맡고 있다. 그가 광주에 와 있다는 소식에, 마침 목포 어귀에 있었던 나는 그를 목포로 초대했다.

나는 최민을 통해 전통 관악에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고, 시(詩)만 얻어 들은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 한참 유행한 ‘마라탕’ 역시 그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유행보다 조금 앞섰던지라, 마라탕이라는 낯선 음식을 찾아 동대문엘 가야 했던 때였다. 진한 땅콩 육수에 각종 야채와 포두부 등을 넣어 끓이는 이 탕국은 만찬의 마지막 관문이었고, 식사로는 중국식 양고기와 만두, 옥수수 국수, 경장육슬 따위에 고량주, 백주를 곁들였다. 이렇듯 그가 소개하는 음식과 술들을 몇 차례 맛보았는데, 때마다 탄복했다. 북방의 맛이라곤 평양냉면 정도밖에 몰랐던 나의 입맛이 새롭게 깨어났다.

그가 권하는 음식은 무어든 믿음이 갈 정도였다. 그러니 이제 내 차례다. 남도의 밥상을 나눌 차례다.

[사진 4. 목포의 음식]

관광객보다 목포의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식당으로 데려갔다. 장어를 반 말려 뜨끈한 탕을 끓인 장어간국, 그리고 흑산도 식으로 은근하게 삭힌 홍어회를 주문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반가운 벗을 맞이하는 즐거움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단둘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럴 때 집중적으로 그의 음악 인생 이야기를 청해보는 것이다.

나: 광주에서의 퉁소 수업은 할 만한지?

최민: 다들 전문적인 대금 연주자들이셔서 기본적인 소리 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렇지만 깊이를 만드는 것은 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일….

나: 최민, 하면 악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퉁소며, 대금이며, 종류별 악기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악기 재료를 직접 찾으러 다니는 것도 인상 깊었다. 그러다 어느 날 대나무숲을 지날 때에 시도 한 수 읊고….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얼마 전 어느 인터뷰에서는 ‘12평균률 개량 퉁소’에 대한 언급도 했더라. 그런 것도 있나.

최민: 요즘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것은 대부분 개량 퉁소이다. 전통 퉁소는 지공(指孔)이 다섯 개뿐이고, 다섯 음정을 가진다. 쉽게 말해 커다란 단소, ‘왕단소’로 비유해도 좋겠다. 그런데 개량 퉁소는 그것보다 많은 음을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아노 흰 건반들 사이에 검은 건반들이 있는 것처럼 원래 없었던 키들을 추가한 것이다.

악기 재료를 내가 직접 고르러 다닌다기보다는, 악기 만드시는 선생님을 따라다니곤 했던 것이다. 쌍골죽(대금 재료)처럼 우리나라에서 고갈된 재료의 대체재를 중국에서 많이 찾는데, 내가 동행하면 그 분의 중국어 통역을 도와드리면서 나 역시도 악기 명장께 배우는 것이 많다.

나: 일전에 북한의 개량 대금 ‘저대’에 대한 얘기도 나눴었다. 위쪽 절반은 대금, 나머지 절반은 플루트의 형태를 한 동서양 혼합의 악기였다. 개량 퉁소도 북한이나 중국에서 발명된 것인지?

최민: 아니다, 한국에서 개발됐다.


[사진 5. 개량 퉁소, 사진 제공_최민]

[사진 6. 개량 퉁소, 사진 제공_최민]

나: 그렇잖아도 퉁소 연주자가 귀한 한국에서 전통 퉁소 연주는 더욱 드물 것 같은데. 퉁소마을에서는 어떤지?

최민: 거기선 아직도 전통 퉁소를 불지만, 이미 인구가 워낙 적다. 너무 시골이다 보니 이젠 남아있는 가구가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서 자랄 때, 열다섯 살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면 믿겠는가? 정말로 아궁이에 불 때고 이엉을 얹은 집에서 살았다. 그만큼 외진 곳이다. 고등학교 때에 예술고에 다니게 되어 도시로 나왔다.

나: 유학을 떠난 것이겠다.

최민: 그때부터 유학과 자취생활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중국에서 그만하면 수입이 안정적이었는데도, 내 학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는 다른 도시에서 맞벌이를 하셔야 했다. 중국도 예술 교육에는 비용이 무척 많이 든다. 그래서 나도 대학 때에는 학자금 대출을 내고 그걸 갚기 위해 ‘밤무대’에 섰다. 당시에 야간업소에서 전통 악기 연주가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연주비가 썩 괜찮아서 하기로 했다. 어느 날은 대타로 노래도 불렀는데, 경서도 민요 같은 것이었다. 반응이 좋았다.

나: 밤무대라고 했지만, 흔한 유행가 대신 전통음악이 소개되던 곳이라니…. 얕잡아 볼 수만은 없었겠다.

최민: 학비도 벌고, 무대 훈련도 되었다. 그러다가 졸업음악회에서 퉁소 협연자로 앞에 나서서 연주하게 됐는데, 우리 학교를 방문 중이셨던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백대웅 선생님의 눈에 띄었다. 2004년이었다. 내 연주를 눈여겨보셨던 선생님께서 한국 유학을 제안하셨고, 나는 처음에 비용 면에서 엄두가 나지 않아 손사래 쳤다. 선생님께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셔서 용기를 얻고, 준비를 시작했는데 그 해의 서류 접수가 이미 마감된 뒤였다. 백 선생님도 그걸 모르셨고, 나도 괜한 꿈에 부풀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당혹했다. 선생님이 다음 해에 꼭 다시 도전할 것을 당부하셨는데, 나는 공연한 기대를 떨치고 그사이 다른 일들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렇게 심양에서 열리는 큰 콩쿠르에 출전하게 됐는데, 우리나라 ‘동아콩쿨’이나 ‘전주대사습’의 위상에 비할 만하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전통 악기를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소수민족 부문까지 별도로 설치하면서 각지에서 수많은 전통음악 연주자들을 이 대회에 불러모았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우승을 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백대웅 선생님께 소식을 알렸다. 수상에 이어 중국에서 연주 투어를 했는데, 4대 명문 음악학교를 순회했다. <조선의 향>이라는 특강 겸 연주로서, 해설이 있는 음악회 같은 것이었다.

그런 뒤 이듬해 한예종 대학원 입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 무렵의 일들은 실망하고 있으면 희소식이 들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한예종 생활이 믿기지 않았다. 당시엔 학교 설비가 열악했던 터라, 정작 수업은 컨테이너 같은 건물에서 했는데도, 김덕수, 안숙선, 원일 선생 같은 분들이 막 복도에 지나다니시는 것 아닌가! 고향에서는 텔레비전으로만 접하던 분들한테 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하는 광경이 꿈만 같았다. 대금은 이때에 아주 기초부터 시작했다. 백대웅 선생님의 제안으로 학교 <양금 발표회>에서 저대와 퉁소를 가지고 협연했는데, 그것이 서울에 온 지 반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연주였다. 그간 ‘낙하산’ 오해를 받거나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다가, 비로소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연주를 위해 백 선생님께서 “만파식적의 노래” 1악장을 써 주셨다.

[영상 1. 만파식적의 노래, 연주_최민, 작곡_백대웅]

국립국악원 강사들이 구경을 왔을 만큼 이목을 끌었던 곡이다. 나중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연하면서 이 곡이 3악장 완결 버전으로 발표됐고, 그것이 나의 데뷔이기도 했다. 2007년이었다. 나 말고도 양성원 첼리스트, 이향아 피아니스트, 김미경 가야금 수석 같은 걸출한 연주자들 또한 협연자로 이 무대에 섰다. 악기에 동‧서양 구분을 두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담아 기악 협연을 이루는 구조가 이때에 이미 가능했는데, 이것을 국악계에서는 오랫동안 알아주지 않았다. 인식 변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틀에 짜여진대로만 보려는 습관을 떨치기 힘든 것 같다. 나로서야 일찍부터 개량 악기를 공부했으니 모드(mode) 전환이 남들보다 빨랐지만, 전통 악기만 다루다 보면 아무래도 보수적 경향의 지배를 받는 것 같다. 이 연주 이후로 전국 순회 공연이 있었고, 관현악 협연이 가능한 유일한 퉁소 연주자로 인식됐다.

나: 남한에는 아직 퉁소 전공이 없나.

최민: 대학에 전공으로 개설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퉁소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베이스는 대금이다. ‘북청사자놀이’의 반주 악기가 퉁소이다 보니, 적용할 여지나 비중이 아직 그 정도에 국한돼 온 실정이다. 이번에 광주에서 퉁소가 관현악단 악기로 편성된 것은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다.

나: 본인만의 음악적 강점, 혹은 연주 특색은 무엇인가.

최민: 저대와 퉁소를 전공하고, 한국에 와서는 대금도 불고, 악기 제작 명장도 만나고 하면서 각 관악기의 장점을 이해하고 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학 와서 대금을 새로 배웠을 때 알게 된 묘한 느낌, 원래 익숙했던 퉁소의 맛,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저대의 개성을 접목하는 게 나의 장기가 아니겠는가. 가벼운 모방만으로는 힘든 일이다. 각각의 악기들을 충분히 수련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남과 북의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전이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먹고 있는 이 홍어도 특유의 맛을 획득하는 과정이란 게 있지 않나. 살아있는 홍어 한 마리 주고 당장 똑같은 맛을 내라고 하면 그렇게 되겠느냔 말이다.

나: 당연히 숙성의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최민: 내가 경험한 동‧서양 음악, 남한의 깊이, 북쪽의 경쾌함, 그리고 연주 내공이 한 데 합쳐져서 숙성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온 지 이제 15년인데, 이만하면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 것으로 본다. 쥐구멍에 볕이 들기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나: 우리가 전에 나눴던 대화 중에서 “대륙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180도로 다리찢기를 할 수 있는 무용수는 그렇지 못한 나하고는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자체가 다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두었었는데, 내게는 이 말이 바로 그런 얘기로 들렸다. 고향에서는 만주 대륙을 경험했었던 최민이 이렇게 반도의 남쪽 바닷가에 와 있는 날도 있다. 남도, 섬의 감각은 대륙의 것과 어떻게 다르던가.

최민: 남쪽으로 올수록 국수주의가 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니,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자부심의 표현이고,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거기에도 그 나름의 ‘넓이’가 있다. 광주 출신이신 내 스승(백대웅)에게서도 보수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실로 마음이 넓은 분이셨다. 남도의 국악이 확실히 깊고 고급스럽다. 남과 북의 음악 중에서 무엇을 무시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생활 환경이 다르면 아는 것이 다르고, 다르게 아는 것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질 따름이다. 시력이 아닌 시야,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대륙을 한 번 경험해 보면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자리 잡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단음이 아니라 화음으로 느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막연히 편견을 가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에 의해 성격적으로 개방이 덜 됐거나, 경제적인 상황이 다르거나, 견문이 아직 불충분하거나 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다른 이보다 좀 더 좋은 시대를 만난 것일 수도 있고.

심성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남쪽의 음악이든, 북쪽의 음악이든, 다 술 마시고, 싸우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음악이니까.

나: 아직 나눌 이야기가 많은데….

시간은 곧 밤 아홉 시였다. 그날의 영업 종료를 서두르는 주인장의 눈치에 식당을 나섰다. 최민은 자신이 속한 전통관악 앙상블 ‘떼바람소리’의 TV 출연이 곧 계획돼 있고, 광주 공연도 있으니 소식을 전하겠노라고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서울에서 만나 대륙식으로 요리한 양다리 통구이를 먹자고 기약하며 우리는 각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죽지사는 민가(民歌)로부터 발전했다고 한다. 장차 최민의 퉁소는 어떤 죽지사를 읊을까. ‘퉁소 죽지사’―이런 게 있을 수 있다면? 악기의 숨결이 뱉는 시의 말들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직 초보 감상자에 불과한 내게 그러한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연주자의 시심(詩心)을 음미해 보려 한다.

[영상 2. 당초인생, 연주_떼바람소리, 작곡_조용욱]

[영상 3. 봉덕이 찾기, 연주_떼바람소리, 편곡_김동근]

최민

중국 훈춘시 밀강(密江) 퉁소마을에서 태어나 옌볜예술대학교 민족기악학부에서 저대를 전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대금을 전공하였다. 중국 문화부 주최 제2회 국가급 문화예술정부장-문화장(文華獎) 민족기악콩쿨에서 1위를 수상하였고,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한국 최초의 퉁소를 위한 협주곡 "만파식적의 노래"(작곡: 백대웅)를, 경기도립국악단과 세계 최초의 통일대금을 위한 협주곡 "꿈꾸는 광대"(작곡: 황호준)를 협연하였다. 솔로 연주자이자, 전통관악 앙상블 ‘떼바람소리’ 및 월드뮤직그룹 ‘원(圓), one’의 멤버로서 미국, 독일, 스페인, 오만, 카자흐스탄 등 국제무대에서도 활동 중이다. 2021년 3월 18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루어질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공연을 앞두고 있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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