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주로 발성 기관을 통해 ‘말’로 의사소통을 한다. 주요한 진화이론은 우리가 발성 기관으로 부르는 기관들이 원래 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것들은 숨 쉬고, 음식을 씹고 삼키는 등 생존에 더 근원적인 기능을 담당했고, 이후 의미 있는 소리를 내는 능력이 부가되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허파의 일차적인 기능은 숨쉬기로 피에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발생하는 공기의 흐름이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말’이 된다. 물론 말은 우리의 뜻을 온전히 주고받는 데에 부족하다. 그래서 음성언어가 아닌 문자언어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는 영상언어도 사용하고, 대면 관계에서는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한다.
지상에 사는 동물들은 인간과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었고,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예를 들어, 개미들은 후각, 곧 페로몬을 통해 긴밀하고 신속하게 정확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개미 집단의 수는 수만에 이르는데, 이는 인간의 밀도 높은 소통의 결과로 탄생한 ‘도시’와 유사하다. 개미의 의사소통 수준은 수 만에 이르는 개체가 일사불란하고 통일성 있게 움직이는 데까지 이른다.
바다 동물 역시 상당한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기에 비해 물이 떨림을 통해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기에, 바다 동물들은 전기장, 몸의 색 변화, 특이한 몸짓 등의 소통 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상대에게 알린다. 그러나 바다 동물도 소리를 통한 소통 방식을 잘 사용한다.
2016년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대학 연구팀은 뉴질랜드 근해에 많이 사는 일명 ‘빅 아이즈’(Pempheris adspersa)가 밤낮으로 ‘퐁퐁’하는 소리를 구별해 내면서 시각 신호가 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 소통한다고 밝혔다. 빅 아이즈는 소리 근육이라고 하는 특수한 근육으로 부레를 진동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바다 동물의 소리를 듣기는 매우 어렵다. 인간에게 물 밖으로 나온 바다 동물은 뻐끔거릴 뿐이다. 그래서인지 바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윤리는 지상 동물을 대하는 인간 윤리의 진전과는 사뭇 다른 형편에 놓여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유목하는 이들은 도축할 때 동물이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유목민의 도축 전통은 종교적 규정과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유목민은 먹을거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지만, 그들은 ‘무죄한’ 동물의 피로 땅이 분노하지 않도록 한다. 유목 문화 전통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성서에는 땅과 피를 연결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정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쏟아진 모든 정의로운 피에 대한 책임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마태복음서 23:35) 등 “땅 위에 쏟아진 피”는 부당한 죽음을 일컫는 완곡어법이었다. 사람의 피도 억울하게 땅에 뿌려져서는 안 되지만, 동물의 피도 마찬가지라는 게 유목민들의 윤리적 자세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공장식 축산으로 엄청난 고기를 먹게 되었지만, 어느덧 육지 동물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여 ‘동물 복지’ 혹은 ‘동물 윤리’를 말하는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러나 바다 동물을 향해서는 이런 윤리적 변화는 뚜렷하지 않다. 고래잡이 금지 등의 몇 사례가 있지만 말이다.
한 학자에 따르면 인간이 먹는 육지 동물은 한 해 600억 마리다. 한편 바다 동물은 최소 1조 마리에서 최대 2.7조 마리가 인간의 먹을거리로 ‘소비’된다. 여가라는 명목으로 육지 동물을 사냥하면 ‘트로피 사냥’이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낚시는 여전히 낭만이나 모험의 일종으로 인정받는다. 여우 사냥을 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지만, 대형 어종인 참다랑어(참치)를 낚시하는, 곧 바다 동물 ‘사냥’은 오늘도 방송된다.
그 사냥감을 빠르게 죽여주는 배려도 없이 말이다. 여러 연구 결과는 물고기가 상당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개체의 삶과 집단의 삶을 누린다고 알려주는 데도 말이다. 동물 윤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이를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물고기가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인가?”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물고기도 소리를 낸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비명을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 뿐이다.
기독교 성서 중 마태복음서 9장 18-22절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예수가 가르치고 있을 때 유대인 지도자 한 명이 와서 그에게 꿇어 엎드렸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사회적 분위기에서 지도자가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오셔서 그 아이 위에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딸의 죽음을 두고 아버지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예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지도자를 뒤따른다. 그가 유유자적 걸을 리 없다. 거의 뛰다시피 했을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뛰듯 몰려간다. 그때 사람들 가운데 십이 년째 산부인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있었다. 자궁출혈인 듯한 그 질환은 고대 유대교 법에서 부정(不淨)한 병으로 분류된다. 그 여인은 사람들과 접촉해서 자신이 부정함을 전하면 안 되었다.
그러나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을 끝내고자 여인은 비상한 행동을 감행한다. 그 사정을 누구도 이해해 줄 리 없기에 그는 오직 속으로만 말한다. “그분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내가 나을 거야.” 여인은 과감히 손을 뻗어 예수의 옷을 만진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여인의 질병이 나은 것이다. 그때 동시에 일어난, 그러나 여태껏 사람들이 잘 포착하지 못한 예수의 기적이 더 있다. 그저 속으로만 말한 그 여인의 신음을 예수가 들은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그대, 힘내시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했소.” 예수는 여인의 소리 나지 않는 간절한 독백, 공기의 떨림이 없는 절규를 듣는다. 그에게 마치 침묵의 청각기관이 있는 듯 말이다.
빅 데이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Volume), 속도(Velocity), 다양성(Variety), 가치(Value), 정확성(Veracity) 등 5V의 특징을 띤다고 규정된다. 찬찬히 빅 데이터가 내세우는 것들을 읽어본다. “저밀도의 비정형 데이터를 대량으로 처리”하고, “실시간, 혹은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로” 정보를 분석하며, “반정형 및 비정형 데이터에서 그 의미를 도출하고 메타데이터를 지원”한다. 나아가 데이터에서 “고유의 가치”를 읽고, 그것의 “진실성과 신뢰”도를 가늠한다. 이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례를 쭉 읽는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난 후에도 이상하리만치 침묵의 청각기관 역할을 한 예수를 다시 생각한다. 나름 부레를 사용하여 있는 힘껏 아픔의 비명을 지르지만 누군가의 귀에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청각기관, 온몸으로 절규하지만 묵음 버튼이 눌린 듯 스피커를 타고 나오지 않는 소리의 발성기관이 미래의 인문학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덧붙여 이 시대의 기술 용어로 표현하자면 음소거 당한 민중의 소리를 신의 소리로 변환하던 ‘예언자’라는 변환회로, 삭제당한 존재들을 복원하는 복구 기술이라는 은유로 인문학의 미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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