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선택할 때 앎과 믿음 중 어떤 것이 더 큰 힘을 발휘할까? 믿음인 것 같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결정할 때마저 확실한 앎이 없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인간은 전지(全知)의 신이 아니라,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는 존재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삶은 끊임없이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실존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신뢰할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 기준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신뢰할만한 것을 사람들은 통상 ‘권위’라 부른다.
한나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권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무엇이었는가’라고 바꿔 물어야 한다면서 현대의 권위 상실(특히 정치적 영역에서)을 간명하게 표현했던 적이 있다. 권위가 빛바랜 사진처럼 그 힘을 상실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지만 책과 연관된 권위는 이런 시대의 경향에서 조금 어긋나 있다. 학습, 독서, 교육의 장에서 책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어렸을 적의 독서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과 저자와 비평가의 불가항력의 권위를, 그 신비스러운 아우라(Aura)를 경험했을 것이다. 성년이 되면, 그런 권위의 힘은 점차 감소하기 마련이다. 본성상 호모 사피엔스는 주어진 권위를 무작정 받아들일 수 없다. 언제든지 회의와 비판의 칼날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청산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자연 발생적인 권위는 무시할 수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말하자면 결정 장애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믿음의 도약대다.
서양에서 가장 권위 있던 책은 성경이다. 신의 말씀이라는 후광 속에서 성경은 지상 최고의 책이 되었다. 이 권위의 원천은 신에게서 온 것이다. 성경은 신의 전지전능을 통해, 신앙을 통해 권위가 확립된 경우다. 권위 관련 연구들이 신학의 영역에서 처음 나온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성경을 포함하여 고대 중세까지 거의 모든 책은 삶을 지도하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전승된 이야기, 신화라는 구전 텍스트도 저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보고(寶庫)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화석처럼 보존된 고전은 시간을 견뎌낸 아우라를 물씬 발산한다. 물론 문자를 독점하였던 성직자,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인 책이 권력과 동반하여 권위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권력이 곧장 권위는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근대 이전 예술작품이 ‘제의 가치’를 가졌다면, 근대 이후에는 ‘전시 가치’, 즉 사람들에게 자신의 표현임을 알리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런 전시적 가치가 극대화된 배경에는 복제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복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술작품에는 ‘아우라의 상실’이라 총칭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아우라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라는 뜻으로서 작품이 종교적 가치를 가질 때 남아있는 주술적 잔영이면서, 저자의 손길과 체취가 남아있는 창조주의 흔적이고, 작품의 진품성과 유일무이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던 권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근대 이후 성경의 궁극적 저자인 ‘신’의 권위는 ‘작가’의 권위로 옮겨진다. 신의 자리에서 인간 주체의 권능을 발견한 근대인들은 책의 권위를 위해 더 이상 신의 이름을 빌릴 수 없었다. 대신 인간 저자의 정신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리하여 ‘해석학(Hermeneutics)’이 근대의 산물로서 등장한다.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고, 그 저자의 의도와 정신세계가 해석의 중심골격으로 설정되는 근대에 신적인 인간, 즉 ‘천재’의 세기가 도래한다. 이런 점에서 근대에도 여전히 책은 천재적인 저자의 후광 속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원텍스트는 해석의 아버지라는 권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침범할 수 없는 권위에 해석은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대로 진입하면서 모든 면에서 권위가 상실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권위는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배격해야 될 ‘우상(Idola)’이 된다. 근대 철학을 열었던 베이컨은 그의 유명한 우상론에서 우상 가운데 하나로 권위를 지목한다.
책의 권위는 탈근대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완벽한 텍스트 복제를 현실화하는 과학기술의 시대, 전문가들의 시대, 주체(저자)의 죽음이 선언되는 시대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권위, 즉 아버지 권위를 해체하는 아들‘들’의 시대, 다시 말해 복수성․다원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근대의 모습이 뚜렷해질수록 마치 부친을 살해한 아들들이 아버지를 다시 선망하듯 권위는 다시 복권될 조짐을 보인다.
이런 조짐은 뼈아픈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다. 말하자면 해방을 위해 모든 권위를 제거하려던 근대인들의 진지한 노력이 순식간에 또 다른 권위를 창출하는 기이한 현상을 현대인들은 경험하였다. 요약하자면, 근대가 신의 권위를 비롯한 권위 일반을 제거하는 시대였고, 근대 말의 혁명과 아방가르드가 그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면, 탈근대는 권위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권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계몽을 통해 권위를 제거하려는 근대의 기획은 실패하였다. 권위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억압적 권위 내지 허무/냉소주의만 낳기 때문이다.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필요하다. 또한 권위 수용의 일차적인 의미는 타인의 의견 추종이 아니라, 고착된 자기의 편견을 깨트리는 데 있다. 즉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타성에 젖은 자기를 반추해서 자기 진정성을 회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권위(authority)란 궁극적으로 존재의 진정성(authenticity)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무리 볼품없는 책이라도, 진솔한 진정성을 담은 책은 그림자처럼 권위가 따라붙는다.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신뢰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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