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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정치학을 넘어서: 극우 개신교 비판과 공적 신학의 회복 / 정용택

한국 개신교 극우주의의 부상과 과대 대표 현상

     

윤석열 전(前) 대통령이 일으킨 불법적인 “12·3 비상계엄 내란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계엄을 지지하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 탄핵과 구속, 파면에 이르는 모든 내란 진압 절차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극우 세력의 준동이 전례 없이 강화되었다. 특히 전광훈·손현보 등 극우 개신교 목회자들이 연일 대규모 집회를 주도하는 가운데 그런 극우 담론과 행동주의를 조장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해 교계와 학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통된 반응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실제로는 교단 내의 일부에 불과함에도 언론과 정치권의 의도된 조명, 그리고 개신교 내부의 침묵과 방조 속에서 전체 한국 개신교를 대변하는 듯한 ‘과대 대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주류 교단들은 물론이고 한기총 이후로 보수 개신교를 대변해 온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조차 이들과 명확히 선을 긋고 있을 정도다.

물론 극우와 철저히 ‘손절’하려는 이러한 주장들은 상당 부분 타당하며, 개신교 내부의 침묵과 무기력, 그리고 교회의 공적 신뢰 회복 실패에 대한 자기 성찰적 비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그로 인한 폭력의 현장에서 갈등을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 중인 개신교 극우 세력은 결코 한국 개신교 내에서 예외적 소수나 주변부 집단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 극우주의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의 일탈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교회 체제 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만남으로써 발현(發現)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른바 ‘건전한 보수’와 ‘위험한 극우’라는 식의 선명한 ‘구별 짓기’가 현재 한국 개신교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정치학에서 ‘보수’(conservative)란 공동체의 기존 질서와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정치 이념을 가리킨다. 반면 ‘극우’(far-right)라 불리는 극단적 우파 또는 우파 극단주의의 목표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파괴라는 점에서 보수와는 명확히 구별된다.

2024년 10월 27일 서울 광화문과 서울역, 여의도 일대에서 동시에 진행된 ‘10.27 연합예배’ (주최 측 추산 110만 명, 경찰 추산 23만 명 참석) 출처: CBS
2024년 10월 27일 서울 광화문과 서울역, 여의도 일대에서 동시에 진행된 ‘10.27 연합예배’ (주최 측 추산 110만 명, 경찰 추산 23만 명 참석) 출처: CBS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수와 극우를 이념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체적으로 분리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1) 아니 애초부터 한국에서는 그 둘이 분리된 적조차 없다고 말함이 더 적절하겠다. 해방과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어져 온 기나긴 군부독재 하에서 정치체제를 지배한 세력은 언제나 극우였고, 그들이 곧 보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한국 극우 역시 서구 극우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파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극우가 차지해 온 위상이 서구의 그것과 전혀 다른 터라 우리는 둘을 동일한 범주로 분류할 수 없다. 서구의 극우는 오랜 시간 동안 주류 정치의 외부에 머물러 있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주류 정치를 위협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극우는 (지난 몇 달 동안 계엄 내란에 동조하고 탄핵과 파면에 저항했던 집권 여당의 행태에서 드러났듯이) 군부독재 시대부터 지배체제의 중심에 자리 잡은 채, 일관된 이념적 기반 없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전략적 행보에 급급해 왔다.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등장한 ‘태극기 부대’는 당시만 하더라도 ‘노인 알바’나 ‘광신도 집단’으로 주변화되었으나, 2024~25년 계엄과 탄핵 국면을 거치면서 이제는 국가주의와 권위주의로 무장하여 오히려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의 부상 과정에서 개신교 극우 대중운동이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한기총이나 한교총 등 기존 정치종교 조직뿐만 아니라 트루스포럼·에스더기도운동본부 등 청년 중심의 신흥 조직을 통해 온라인·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혐오 프레임과 반공주의 담론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덕분에 가능했다.

     

     

극우 개신교 세력의 확장과 주류화 메커니즘

     

그렇다면 개신교 주도 극우 세력이 도대체 왜 문제라는 것인가?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이 질문을 통상적인 이념 대립이나 정치 갈등의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 정치체의 존속과 사회 공동체의 유지에 대한 위협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극우 개신교가 위험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의 근간이 되는 인민주권,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 자유와 평등, 권력분립, 법치주의, 대화와 타협, 가치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적 협약 같은 현대의 보편적인 정치 원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러한 정치 원리가 작동할 수 있는 법률적 장치나 제도적 질서와 같은 사회적 조건까지도 공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더욱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타자에 대해 갖는 인식과 태도일 것이다. 단적으로 그들의 공격 대상은 이념도 가치도 질서도 제도도 아닌 ‘존재’ 그 자체이다. 그들은 타자화된 대상을 완전히 ‘절멸’(extermination)시키려 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극우 세력은 군부독재 시대 ‘좌경용공세력’이나 ‘빨갱이’ 같은 말을 사용하여 정치적 타자들을 억압했고, 민주화 시대에는 ‘빨갱이’를 자제하는 대신 상대를 ‘진보’로 인정하면서도 유사시에는 누구든 ‘종북좌파’로 몰아갔으며, 이후 ‘좌빨’(좌파빨갱이)이라는 말로 ‘빨갱이’ 레테르를 슬쩍 다시 붙여다가 최근 들어서는 아예 정치적 좌파와 성소수자를 접합한 ‘종북게이’라는 희한한 용어까지 발명하여 타자에 대한 공격을 줄곧 이어 왔다.

2022년 7월 16일 서울광장에서 기독교단체 회원이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면서 들고 있었던 피켓. 출처: 2022.07.16. 뉴시스
2022년 7월 16일 서울광장에서 기독교단체 회원이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면서 들고 있었던 피켓. 출처: 2022.07.16. 뉴시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 “지원사업 통제를 통한 좌파 적출과 우파 진흥”이라는 기조하에 공표되었던 악명 높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정책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좌파 적출’이라는 섬찟한 표현은 이후 ‘좌파 척결’, ‘좌파 박멸’ 같은 더욱 직관적인 용어와 호환되기 시작했고, 극우 개신교 세력에 의해 ‘동성애 척결’, ‘동성애 박멸’,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교단과 신학교 내부의 성소수자 지지자 색출’ 등으로 그 대상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외과 수술이나 화학 처리를 연상시키는 이 난폭한 표현들 속에는 좌파와 성소수자를 부패한 장기 또는 유해한 바이러스쯤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을 사회에서 완전히 도려내고 지워버리려는 폭력적 사고, 자의적으로 식별된 특정한 범주의 사회 집단 내지는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구 집단을 공동체 내에서 퇴출하는 수준을 넘어 지상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죽임’의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가 위험한 결정적 이유이다. 정치학에서는 이와 같이 특정 집단을 국가나 사회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포하는 신념이나 이념을 가리켜 ‘절멸주의’(Exterminationism 또는 Eliminationism)라고 명명하는데 개신교 주도 한국의 극우 세력에서도 오래전부터 그러한 경향이 발견된다.2)

실제로 극우 개신교의 절멸주의는 그 논리적 구조상 과거 홀로코스트 비극을 만들어 낸 독일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를 이론화했던 유대계 캐나다인 비판이론가 포스톤(Moishe Postone, 1942~2018)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외국인 혐오, 인종 증오, 대량 학살이라는 범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다.3)

그것은 무엇보다도 숭고함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했던 이데올로기적 사명 의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 이전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들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형태의 인종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치만의 독특한 사명이었던 바, 유대인의 완전한 절멸을 향한 강박적 추구였다. 이는 홀로코스트에 선행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러시아 제국 및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살 및 유대인들이 관련된 민족적, 종교적 충돌, 즉 ‘대박해’(Pogrom)와 대조적으로 일체의 감정과 직접적 증오의 상대적 부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의 명백한 사회 통합적 기능성의 부재로 설명된다.

포스톤이 보기에 나치의 유대인 절멸 프로젝트는 특별히 다른 국가적‧사회적 통합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이유로나 폭력적인 토지 획득 과정에서 절멸된 것이 아니었다(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처럼). 유대인들의 절멸은 전면적이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였다. 즉 “절멸을 위한 절멸”로서 절대적 우선순위를 획득한 궁극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러한 절멸주의는 오늘날 한국에서 좌파와 성소수자를 향해 극우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에게도 좌파와 성소수자는 대화와 공존이 불가능한 동시에 불필요한, 오직 순수한 절멸의 대상으로서만 상정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 음모를 경고하는 만평.  독일, 날짜 미상. 출처: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 음모를 경고하는 만평. 독일, 날짜 미상. 출처: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자유대한민국 수호 윤석열 복귀 탄핵 반대 부정선거 척결 집회’ (2025.1.18.) 출처: 뉴스민
‘자유대한민국 수호 윤석열 복귀 탄핵 반대 부정선거 척결 집회’ (2025.1.18.) 출처: 뉴스민

포스톤은 나치즘의 반유대주의를 단순한 편견이나 인종주의의 한 사례가 아닌 산업자본주의의 모순을 특정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회적-역사적 인식론으로 분석했다. 이는 한국 극우 개신교의 절멸주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분석 틀로 활용될 수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반유대주의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추상적 차원(화폐, 금융, 가치, 추상적 법)과 구체적 차원(산업, 기술, 노동)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면서 오직 추상적 차원만을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유대인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이때 유대인은 단순히 많은 돈의 소유자에 그치지 않고 “아무런 뿌리도 없고”, “유형적이지 않으며”, “세계적으로” 암약하는, “숨어 있는” 힘의 화신(化神)으로 간주된다.4)

‘좌파 척결’, ‘동성애 박멸’로 상징되는 한국 극우 개신교의 담론 역시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이들은 진보적 정치세력과 성소수자를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이들에 대한 공격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포스톤의 통찰처럼, 이는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특정 집단의 ‘제거’를 통해 해결하려는 왜곡된 ‘반자본주의’의 일종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식이 단순한 증오나 선동이 아닌 일종의 ‘세계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극우 개신교의 절멸주의와 공적 신학의 대안 모색

     

포스톤의 분석에 따르면 극우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것’(국민국가, 민족공동체, 혈통, 노동자, 산업자본)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추상적인 것’(세계시민사회, 보편적 인권, 글로벌 금융자본, 자유주의적 법치)을 악마화하는 이중 구조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극우 개신교의 민족주의적 요소와 반자유주의적 요소는 단순한 보수성이 아니라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극우 개신교는 ‘국가적’인 것, ‘전통적’인 것, ‘가족 가치’, ‘공동체’ 등의 구체적인 것을 신성시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모든 추상적 가치(인권, 평등, 다양성 등)를 ‘반국가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극우 개신교가 정치적 진보세력과 성소수자를 동일한 적으로 묶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국가와 가족이라는 ‘구체적’ 공동체를 위협하는 추상적 원리(평등, 해방, 다원주의)를 대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한국 극우 개신교의 절멸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새로운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이 필요하다. 절멸주의를 배태한 낡은 보수신학을 대체할 새로운 공적 신학의 모색은 포스톤이 말한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 즉 기독교적 정체성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적 인류애와 공공선을 추구하는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개신교는 우선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존엄성을 인정하는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자신의 의지를 명료화할 언어를 결여한 이들(신생아, 정신질환자, 치매노인 등)이라 할지라도 동등하게 존엄하다고 인정하는 까닭은 그의 “성별, 장애, 병력(病歷),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유전정보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5) 등과 무관하게 단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다면 기독교인의 정치적 실천은 적의 절멸이 아닌 모든 비인간화‧비존재화된 인간 타자들과의 화해와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

둘째, 개신교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와 결합된 모종의 집단주의 문화와 도덕적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의식과 보편주의를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공동체를 꿈꿔왔다. 한국 개신교는 국가적‧민족적 특수성에 매몰되기보다 글로벌 시민사회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철학자 벅모스(Susan Buck-Morss)가 비판했듯이 다양한 문화와 체제가 자행하는 폭력은 때때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재현(再現)되는데, 이른바 탈근대적 ‘다양성의 시학’은 이러한 근본적 유사성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에 따르면 보편성은 문화 간의 병렬적 존중이 아니라 특정한 지배 문화가 한계에 다다라 붕괴될 때—문화가 자신을 배신할 때—비로소 파열 속에서 출현한다. 이처럼 보편성은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지배가 아니라 고통받는 존재들의 공감적 연대에서 시작된다.7) 오늘날 극우의 발흥 역시 새로운 보편성의 발명을 요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순수’와 ‘불순’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인정해야 한다. 포스톤이 지적한 것처럼, 유대인들의 문화는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복잡한 긴장”을 특징으로 했으며, 이러한 긴장을 통해 한때나마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타민족‧타종교인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적 교양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극우 개신교’라 불리는 사회병리적 현상은 단순히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위기를 반영한다. 포스톤이 반유대주의를 산업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도착적(倒錯的) 대응으로 설명한 것처럼, 한국 극우 개신교의 ‘좌파 척결’과 ‘동성애 박멸’ 담론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안과 불평등에 대한 왜곡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신교의 갱신은 단순히 교리적 수정이나 관용의 증진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적 공공성—일본의 정치이론가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를 위한(누구도 ‘행위할 권리’,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을 정치적인 자유를 위한) 장소”8)—을 확대하는 데 적극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극우와 때로는 선을 긋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극우를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해 온 ‘보수’에 있지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신교 전체를 극우와 동일시하는 ‘안티기독교’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선악의 이분법, 적과 동지의 이항 대립을 넘어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희망의 비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의 민주적 공공성 확장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그 실질적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종교는 때로는 분열과 갈등의 원천이었지만, 때로는 화해와 정의의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단지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와 직결된 중대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개신교는 이제 절멸의 신학이 아닌 화해의 신학, 배제의 신학이 아닌 포용의 신학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사회가 또한 개신교에 요구하고 있는 과제이다.



1) 한국에서 극우와 보수의 구별 불가능성에 관한 이하의 서술은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박이대승, 「어떻게 극우를 제거할 것인가」, 『주간경향』 1612호 (2025.1.20.)

2) Daniel Jonah Goldhagen, Hitler’s Willing Executioners: Ordinary Germans and the Holocaust (New York: Knopf, 1996).

3) Moishe Postone, “Anti-Semitism and National Socialism: Notes on the German Reaction to ‘Holocaust’,” New German Critique 19 (1980), 97–115.

4) 현재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이는 마치 파면된 대통령이 맹신했던 ‘부정선거’ 음모론에서 묘사되는, 한국 선거를 좌지우지하는 ‘중국인들’의 초월적 권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5) 이 표현은 2021년 권인숙 의원 등이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에서 가져온 것이다

6) 신진욱, 『한스 요아스, 가치의 생성』, 컴북스, 2018, 38.

7) 수잔 벅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2, 183-184.

8)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 외 공역, 이음, 2009, 16.




정용택 (신학자, 한신대 신학사상연구소 연구교수) jungyongtaek@gmail.com
정용택 (신학자, 한신대 신학사상연구소 연구교수) jungyongtae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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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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