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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위한 변명 / 오문석

최종 수정일: 2019년 12월 27일

일상은 억울하다. 언제부턴가 지루하고 반복되는,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삶의 대명사가 되었다. 매일 동일한 일이 반복된다니,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지옥의 모습은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잘 나타난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일렬로 늘어선 공장 노동자들이 반복적으로 나사를 조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동일한 동작을 무한 반복하는 주인공은 급기야 모든 것이 나사로 보이기 시작하고, 나사를 보면 조이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내 눈과 내 생각이 마침내 내 것이 아닌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명백히 몸은 내 것이지만, 내 몸은 이미 나사를 조이는 일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나사 조이는 일이 내 몸의 주인이 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고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사람들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 나를 잃어버리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른바 일탈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대표적인 일탈은 물론 여행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시외버스와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도 일상 탈출이 명분으로 제공된다. 일상은 지루하고 여행은 즐겁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믿고 떠난다.


그러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를 맞이하는 지루한 일상이 반가운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났을지는 몰라도, 지루한 일상에 익숙해진 ‘내 몸의 주인’을 바꾸지 못한 까닭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나를 되찾기에는 여행이 너무 짧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긴 여행이라도 나를 바꾼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나 자신에게 낯설어지는 나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Tonio Kröger. Illustrierte Geschenkausgabe. (German) Hardcover – March 1, 2003

그것이 일상을 벗어버린 나의 모습이다. 일상이라는 외투를 벗겨낸 벌거벗은 나의 모습이다. 일상의 보호막을 제거해서 민감해진 피부로 만나는 세상. 그 날것의 느낌, 그리고 민감성으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수많은 상처투성이의 몸. 그것이 일상을 벗어난 나의 모습이다.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토마스 만의 단편 「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가 그런 사람이다.


이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긴 여행길을 떠난 상태이다. 시인으로 어느 정도 유명세를 얻고 있던 주인공은, 여행길에서 우연히 소년 시절의 짝사랑을 마주치게 된다.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한 사람은 남성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성이다. 그런데 그 둘이 연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둘은 소년 시절의 토니오 크뢰거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들이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말이다. 장성한 토니오 크뢰거는, 시인으로 성공한 그였지만, 소년 시절의 짝사랑 앞에 나서지 못하고 숨어버린다. 그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너희를 잊었을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게 너도! 내가 글을 쓴 것도 너희 때문이야. 나는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혹시 너희가 그 자리에 없는지 몰래 주위를 살피곤 했어. 한스, 예전에 너희 집 정원 문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돈 카를로스>를 읽었어? 읽지 마! 너한테 더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겠어. 외로워 눈물을 흘리는 왕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너는 시와 멜랑콜리 같은 것으로 눈을 흐리고, 바보 같은 꿈에 젖을 필요가 없어……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중략)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어차피 똑같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똑같이 반복될 뿐이야!

시인으로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창작의 고통을 그는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그것이 저주인 까닭은 시인인 이상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바란다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와 멜랑콜리의 세계를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때 소년 시절의 토니오 크뢰거는 “스냅사진이 담긴 승마 책을 좋아하는” 친구 한스에게 문학의 세계를 경험시키려 애를 썼다. <돈 카를로스>를 친구에게 읽히고 그 감동을 친구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토니오 크뢰거는 더 이상 그들을 문학의 세계로 유혹할 자신이 없다. 그것은 문학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이 “평범한 행복”을 대가로 지불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 들어서면 한때는 “평범한 행복”이었던 것들이 곧바로 “밋밋한 것, 지루한 것, 진부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가 바라보는 친구들의 일상이 그렇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장점은 그렇게 평범한 세계를 벗어났다고 해서 잘난 척하고 우쭐대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잘난 시인이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이다. 우리의 토니오 크뢰거는 평범한 세계를 벗어났지만,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을 저주로 받아들인다.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일상, 그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문학적 세계의 발판이 되고 있다.


Tonio Kröger. Illustrierte Geschenkausgabe. (German) Hardcover – March 1, 2003

여기에 일상의 진부함을 매혹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비결이 있다. 일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에 따르면, 그 비결이 17세기에 네덜란드의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바느질을 하고 사과 껍질을 벗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올림포스의 여신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일상을 화가들이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지루한 일상 자체는 죄가 없다. 다만 일상을 지루한 것으로 바라보는 내가 문제이다. 여행 뒤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 사실은 그것이 일상에 숨겨진 신선도의 방출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뿐이다. 오랜 세월동안 시와 소설은 그런 여행이 되기를 꿈꾸었고 꿈꾸고 있다.


오문석(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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