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백여 년 전 이상화의 시 제목이다. 이 시의 절묘함은 오지 않아야 할 상황에 들이닥친 봄에 대한 원망에 있다. 마음은 아직도 혹독한 겨울인데,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집구석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답답한 마음뿐인데, 아랑곳없이 사방 천지가 꽃들로 가득하다. 해마다 봄꽃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던 마을에선 제발 우리를 찾지 말아달란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사람들을 막어서는 곳도 있다. 봄이 이처럼 잔인한 유혹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백여 년 전에도, 대지진에 대한 분풀이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고(1923), 만세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전국이 초토화되었으며(1919), 스페인에서 시작된 독감으로 속절없이 죽어갔다(19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을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은 나뭇가지에서 움이 트고, 얼어붙은 땅거죽에서 싹이 돋았을 것이다. 그것은 절망의 한 가운데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조물주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가, 꽃에 대한 비유에는 종종 이런 “반드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도 그랬다. 사실 애벌레가 나비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꽃은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나뭇잎만 갉아먹고 살던 애벌레가 그만 단순한 삶에 싫증을 느꼈고, 그래서 그 이상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러나 애벌레가 찾아낸 그 이상의 삶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던 중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아마도 변태 중인, 늙은 애벌레를 만나게 된다.
"변을 당하신 모양인데, 제가 도와 드릴까요?"
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변을 당한 게 아니란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단다."
그녀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비 - 바로 그 말."
하고 그녀는 생각해 냈습니다.
"나비가 무엇인지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그것은 네가 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을 뜻하는 거란다. 그것은 아름다운 날개로 하늘을 날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기도 하지. 그것은 꽃에서 나오는 달콤한 꿀만을 마시면서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운반해 주기도 한단다. 나비가 없어지면 따라서 꽃도 자취를 감추게 된단다."
"그럴 수가 있나요!"
하고 노랑애벌레는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말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한낱 솜털 투성이의 벌레뿐인데, 당신이나 내 속에 나비가 들어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간절히 날기를 소원해야 한단다."
이 책이 한창 유행할 즈음에는 이 글의 제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애벌레에게 희망을’이 아니고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말인가. 그런데 늙은 애벌레가 그 답을 말해준다. "나비가 없어지면 따라서 꽃도 자취를 감추게 된단다." 애벌레도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애벌레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비에게 의존하는 수많은 꽃들에게는 그것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애벌레의 소망은 항상 ‘그 이상의 삶’에 대한 욕망이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애벌레에게 더 나은 삶이란 여전히 또 다른 애벌레의 삶이 아니던가. 따라서 늙은 애벌레는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이란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때 주어진다고 말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삶. 지금의 내가 아닌 절대적으로 다른 삶.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애벌레에게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꽃들에게도 희망을 준다는 사실이다. 최고의 애벌레가 되겠다는 소망을 버렸을 때, 애벌레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렸을 때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의 울타리에 다른 생명을 초대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의 변신으로 삶의 폭이 확장된 것이다. 나 아닌 것들도 비로소 나의 삶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 까닭이다.
절망 가운데서 우리는 지금 한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있다. 지금까지 집중하던 삶의 패턴이 중단되고,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놓여 있다. 암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이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누군가의 동선 위에 나의 동선을 포개본 적이 있었던가? 1.8미터의 거리는 또 얼마나 먼 것인지. 그리고 내 삶의 테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었다니.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삶이다. 같이 산다는 것, 그것은 한때 지옥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고립되고 격리된 삶이 더 지옥이다.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에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 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윤제림, 「길」 전문
이 길을 뭐라 해야 하나. 무엇이 꽃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짐칸 호로 속” 병사의 실없는 외침과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의 수줍은 웃음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무엇이라 했는지, 오래 잊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비효과가 아닐는지. 우리 모두가 애벌레가 아니라 그 나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봄은 그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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