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현대문학 연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본 데이터가 확보되어야 했던바, 최근 15년 사이에 출간된 현대문학 관련 논문을 정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국어국문학 유관 학술지에 실린 모든 논문의 서지사항을 확보하고, 여기서 현대문학 관련 논문을 추려내기로 했다. 논문의 서지를 정리하는 작업은 공동 연구자인 김병준 선생(카이스트)의 크롤링 기법을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했는데, 분류 과정에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제목이나 초록만으로는 분과를 확정하기 어려운 논문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고전소설 『심청전』을 각색하거나 그 서사를 차용한 웹툰이나 영화에 대한 논문이 있다면, 이를 어느 분과의 논문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논문의 분석 대상이야 기본적으로 현대문학‧문화의 일종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그 작품에 들어 있는 고전문학 관련 요소가 아닌가? 이런 논문이 적지 않았기에 우리 연구팀은 분류 작업 내내 ‘현대문학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고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는 고심 끝에 각 논문의 저자가 최종 학위 논문을 어느 분과에서 썼는지에 따라 분류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논문 중 상당수가 우리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논문 중 많은 수가 고전문학 관련 주제로 최종 학위 논문을 썼던 연구자들이 쓴 논문이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단편적이나마 고전문학 연구자들의 문화 콘텐츠 관련 논문을 살펴본 경험은, 내가 고전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근대적인 것 내지는 현대적인 것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음을 짐작하게 해준 계기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연구자라면 내 연구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고민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렇다곤 해도 학문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해명은 적어도 이른바 ‘국학(國學)’ 계열의 분과학문 종사자에게만은 비교적 해결하기 쉬운 문제로 여겨져 왔다. 한문학자 강명관이 『국문학,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민족주의가 국문학, 국어학, 국사학 등의 학문에 강제적으로 ‘국학’의 지위를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시들어가고 있고, 연구자 사이에서도 “나의 국문학 연구는 오로지 민족의 운명과 관련하여 의미를 부여받을 뿐인” 상황에 대한 거부감은 커지고 있다(강명관, 9쪽).
고전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고전 텍스트만이 아니라 고전과 현재의 대중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상황 또한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아마 ‘문화콘텐츠 연구’로 뭉뚱그러져 분류될 그 논문들은 사실 국학, 곧 ‘민족의 학문’이 아닌 고전학의 의의나 가치를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지 않을까. 하지만 모든 고전문학 연구자가 그러한 우회로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전문학 연구, 나아가 고전학 연구 자체의 의의는 근본적으로 고전 자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탐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도흠의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소명출판, 2022)는 학술서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저술은 각종 근대화론 및 근대성론에 대한 검토로 제1부를, 그리고 저자가 1부에서 주장하는 ‘차이의 근대성론’에 기반한 고전문학 텍스트에 대한 분석으로 2부를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타의 학술서라면 서론의 일부를 차지할 방법론에 대한 서술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학술 연구에서 연구방법론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야 없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구성이기는 한 것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그간 한국 학계에서 논의되었던 각종 형태의 근대화론, 곧 서구적 근대화론이나 이식문화론, 자본주의적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 근대화론 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다. 현대문학이나 현대사 등 근현대 한국학 분야에서는 이미 역사화된 감이 없잖아 있는 이론들의 방법론적 가치에 대한 고찰이 이토록 자세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소 새삼스럽기까지 한 풍경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새삼스럽게’ 근대화론에 대한 검토를 진행한 것은 그 분석의 목적이 ‘연구사 검토’에 더해 저자 스스로가 원효의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창안했다는 ‘차이의 근대성론’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종래의 근대성론들이 각 논의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구 중심주의를 견지해왔다고 비판하는 한편, 한국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가운데 조선-한국 사회의 근대 체험에 대해 분석해야 한국 고유의 근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근대성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대체로 하나의 근대성만을 — 대개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된 근대성을 — 절대적인 기준으로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 그것에 동일화될 것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차이의 근대성론’이란 각자의 역사적‧문화적 경험 차이에 따른 서로 다른 근대성‘들’이 존재하며, 그것들 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병에 걸렸을 때 “불교적 세계관에 있는 신라인”이 “절을 찾아가서 재를 올리며 부처님께 병이 낫기를 발원”하는 것과 “근대 과학적 세계관에 있는 현대 한국인”이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하고 그에 따른 처방을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에 따라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인식하고 이에 맞서서 집단무의식적으로 대응하여 다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163쪽).
여기서 서평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차이의 근대성’론이 학문적 타당성을 갖느냐의 여부보다는 이 이론의 창안 목적에 대한 것이다. 서구 중심주의적 근대화론은 왜 부당한 것이며, 원효의 화쟁사상은 어떻게 그것의 대안일 수 있는가? 물론 엄밀히 말해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서구 중심주의라는 결과물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영역, 즉 인류의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무시하고 모두 하나의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드는 ‘동일성의 근대성론’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자가 18,19세기 조선문학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굳이 고대 철학 사상인 화쟁 사상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흥미를 끈다. 이 책에서 저자가 화쟁사상에 ‘외세의 개입 이전에 형성된’ ‘순수한 우리 민족문화’의 상징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문화와 지식은 교류와 소통의 산물이며 오히려 경계에서 꽃피는 수가 많기에, 서로 거울과 타자로서 작용하기에 100% 순수한 문화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기도 하다(8쪽).
그렇다 하더라도 맑스주의와 형식주의의 종합이 반드시 원효의 화쟁사상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본래 ‘외래종교’(불교)에서 발전된 화쟁사상을 조선/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살피기 위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다는 작업 자체가 ‘차이의 근대성론’에 일정 정도의 자기 완결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차이의 근대성론’이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은 단순히 서구 중심주의라는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차이의 근대성론’이 근본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기준이 각자의 역사적‧사상적‧문화적 경험 차와 관련 없이 일률적(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프레임, 말하자면 ‘동일성의 근대성론’이다. 그렇다면 외래종교의 개념과 토착적 경험이 결합하여 새롭게 창출된 사상이었던,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 존재 자체가 ‘동일성의 근대성론’을 반박하는 논거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화쟁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한국 고전학과 '오늘날' 사이의 시차를 극복해야 한다는 학문적 과제에 대하여 저자가 내놓는 제언이기도 하겠다. 저자에게 화쟁 사상이란 고전 한국학의 성과를 근현대와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화쟁 사상에 입각한 차이의 근대성론이라는 성찰의 제시는 한국 고전학 연구를 검토하는 작업이 — 특히 고전문학분과 외의 문학 연구자들에게도 — 맑스주의나 형식주의, 혹은 근대성론의 근간이 된 여타의 이론적 논의만큼이나 의미 있는 작업일 수 있음을 시사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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