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대 유학 공부. 필자는 대학 2학년 1학기 전필 한국사강독2 수업 시간에 조선시대 사상사 자료집을 읽었다. 기말 과제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총론」을 쓰고 여기에 나오는 유학자를 조사했다. 조선시대 유학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2학년 2학기 전선 한국근세사2 수업 시간에는 기말 과제를 위해 『한국정치사상사』(박충석, 1982)를 정독했다. 각주의 한문 사료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유학사상사 공부의 즐거움을 느꼈다. 아울러 국사학과 한국근대사상사 수업과 철학과 중국사회사상사 수업을 수강하면서 근대사상사 공부에도 매력을 느꼈다. 중국 곽말약의 소설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 같은 글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을까 자문했다. 유학사상사 공부와 근대사상사 공부가 마음 속에서 서로 접점을 찾고 있었다.
겨울방학 때 우연히 『유학근백년』(금장태․고광직, 1984)을 만났다. 한국 유학사는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지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 통념이 산산이 부서졌다. 한국 근대 유학자는 심지어 대한민국의 시기에도 강학 활동과 문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무렵 국립중앙도서관 다니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 책에서 소개된 송병선의 역사책 『동감강목』을 열람하고 그 서문을 공책에 옮겨 적었는데, 『동감강목』은 신라․고려․조선(문무왕~철종)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정리한 강목체 사서였다. 한국사학개론 수업과 한국사적해제 수업에서도 듣지 못한 새로운 옛날 역사책을 처음 실견했다는 기쁨이 마음에 가득했다.
이를 인연으로 조선말기 유학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18, 19세기 조선 기호학맥의 주요 도학자의 연보를 합하여 연도별로 합보를 만들기도 했다. 19, 20세기 송병선 학맥과 그 주변 유학자의 문집을 조사해서 구경하는 작업도 계속했다. 필자의 주된 관심은 조선후기 유학사의 시각에서 조선말기 유학을 재해석하는 데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호락 분열의 반성과 ‘정학’운동이라는 논제를 상정해 보았다. 본래부터 19세기 후반 조선 유학을 단지 서양 근대의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간주하는 관성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못했다. Paul Cohen의 책 Discovering History in China를 읽고는 서양의 충격과 조선의 대응이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조선 중심의 근대사상사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조선말기 유학사의 맥락적 이해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중요한 논점을 조선 전통 유학의 곤경에 대한 해법에서 구하는 ‘내재적 독법’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조선후기 주자학에서 실학으로의 사상 내재적 변용이라는 연구 시각이 스며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한국 근대 유학의 신천지를 발견했지만 그것의 맥락적 이해 과정에서 조선후기 유학사로부터의 내재적 독법에 빠져들었다. 냉정히 말하면 서양 근대인가 조선 전통인가 하는 이분법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단지 한국 근대 유학의 이해에서 조선 유학 전통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태도에서 그쳤던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이에 조선 전통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되 그렇다고 서양 근대로는 도로 돌아오지 않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창비 계열에서 제기하는 이른바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 과제를 차용해서 말한다면 지금까지 한국 근대 유학은 지나치게 근대 적응의 차원에서만 인식되고 있었는데 근대 극복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근대 성찰의 사상으로서 한국 근대 유학의 메시지를 새롭게 읽어낼 방법은 없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그 사이에 성장했다.
재작년 출간된 필자의 책 『껍데기 개화는 가라』는 이런 생각에서 만들어본 한국 근대 유학 사료 선집이다. 필자의 관심이 그렇게 변화한 원인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 흘러 필자의 공부에도 진보처가 없지는 않았다. 언젠가 필자는 한국 유학사를 읽어내는 기본 관점의 형성을 장지연과 현상윤의 유학사 저술에서 발견한 적이 있었다. 학술 저작의 구성적 지식의 견지에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은 조선 유학 쇠망사의 거대 서사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조선 유학 운동사의 거대 서사를 장착했음을 알아냈다. 두 저술은 학술사적 시각에서 보면 전근대의 연원록에서 근대의 사상사로 한국 유학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서로 다른 이정표였다. 양자 모두 조선 말기 유학사에서 멈추었지만 쇠망사와 운동사는 이후 한국 근대 유학사까지 투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착상으로 기대되었다. 이 무렵 만난 『군자들의 행진』(이황직, 2017)은 20세기 한국 유교인이 전개한 건국과 민주화의 운동사를 논구한 역작으로 다가왔다. 서평에서도 밝혔지만 필자에게는 현상윤 유학 운동사의 새로운 발현으로 느껴졌다. 근대 유학 대신 유학 근대라는 신선한 물음을 얻었다.
근대 유학이 근대로부터 유학을 생각하게 한다면 유학 근대는 유학으로부터 근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위에서 말한 『껍데기 개화는 가라』는 근대 유학과 함께 유학 근대에 대한 관심이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호남 곡성 유학자 정일우가 제기하는 껍데기 개화, 경기 강화 유학자 이건방이 비판하는 가짜 신학문, 이 문제는 개화와 수구, 신학과 구학의 구도에서 개화와 신학에 편향되어 있는 근대사상사의 이해 방식을 재고하고 근대 성찰적인 시각의 배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토픽이다. 영남 안동 유학자 송기식은 자신의 공부방 이름을 ‘바다의 창’이라 이름 짓고 천하의 이치가 특정한 국가의 사물(私物)이 아니며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음을 강조했다. 경화 벌열 김윤식은 중국의 공교(孔敎)가 유교를 일국의 종교로 한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유교가 천하의 종교로서 대동의 교화를 펼치기를 희망했다. 이 문제는 근대 주체를 개인과 국가에 집중하는 근대사상사 이해 방식을 재고하고 근대의 공간으로 새롭게 다시 천하를 사유하는 방법의 모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토픽이다.
필자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조선 유학자의 근대 비평의 목소리가 한국 근대사상사의 균형 잡힌 연구 시각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놓여 있었다. 신기선의 『농정신편』 서문이 아무리 중요한 동도서기론이라 할지라도 호남 유학자 김한섭의 비평과 함께 이를 읽어야 합당할 것이고, 티모시 리처드의 『태서신사남요』와 영 알렌의 『중동전기본말』이 아무리 중요한 근대 서학서라 할지라도 영남 유학자 권상규와 조긍섭의 각각의 비평과 함께 이를 읽어야 합당할 것이다. 또,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구절(『조선일보』 연재 「조선사」 총론)을 통해 역사가 신채호의 ‘아(我: 나)’에서 근대 주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守吾志, 讀吾書, 交吾人, 行吾道, 衣吾衣, 冠吾冠, 語吾法言, 尊吾聖賢, 順吾天命, 以竢千秋’라는 구절(『연재집』 「경세설」)을 통해 유학자 송병선의 ‘오(吾: 나)’에서도 근대 주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신채호의 ‘아’를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자아와 비교하는 것도 매력적인 시도가 되겠지만 이에 앞서 그것을 조선 유학자 송병선의 ‘오’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필자의 관심은 이제까지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에 속박되어 전통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밀쳐냈던 이들을 적극적으로 한국 근대의 ‘선구적 유학자’로 소환하여, 근대사상사 연구에 개입하는 이념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메타적인 비평의 지렛대로 이들의 근대 체험과 근대 성찰의 메시지를 활용하여 전환기 한국 사상사의 역사상을 재정립하는 데 있다. 유학사상사는 근대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한국 근대 유학자의 ‘과거로부터의 목소리’는 현재의 근대주의에 굴절되어 있는 사상사 지식의 혁신을 위한 귀중한 지적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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