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영국 지성사 연구의 혁신과 전파④: 초기 계몽주의 비판; 지성사와 여성주의 연구 / 이우창

레비틴의 『고대의 지혜』: ‘잉글랜드계몽주의’ 테제의 비판


드미트리 레비틴(Dmitri Levitin)의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 고대의 지혜: 1640년에서 1700년까지 잉글랜드의 철학사들』(Ancient Wisdom in the Age of the New Science: Histories of Philosophy in England, c. 1640-1700)은 2000년 이후 출간된 가장 뛰어난 지성사, 혹은 인문학 연구서 중 하나다. 본문 약 550여 쪽, 참고문헌목록 100여 쪽에 육박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저자는 17세기 중후반 잉글랜드에서 활동한 지식인·학자들의 저작을 광범위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한다. 레비틴은 당대인들이 고대철학사를 어떻게 서술했는지, 나아가 이 시기 ‘전문학술장’이 어떠한 방법론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는가를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고대의 지혜』는 지성사 연구 모델이 발전해온 과정의 최전선에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와 앤서니 그래프턴 이래 학술사 연구자들은 과거인들이 남긴 학술문헌에 사용되는 방법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정치사상사·교회사 연구와의 조우를 거쳐 이는 학문적 방법의 활용이 어떤 맥락에서 정치적인 함의를 지닐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연구 모델로 확장되었다. 레비틴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포콕이 『야만과 종교』 연작에서 보여준 모델, 즉 과거의 역사서술 자체를 역사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탐구하는 접근법을 받아들인다. 요컨대 『고대의 지혜』는 17세기 잉글랜드의 학자들이 고대철학사 및 이로부터 기원하는 ‘학문의 역사’를 서술했던 방법에 주목하여, 그것이 학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선택이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틴은 포콕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고대의 지혜』는 포콕의 잉글랜드계몽주의 테제를 가차 없이 비판하는 저작이기도 했다. 레비틴은 (포콕이 에드워드 기번의 기원 중 하나라고 생각한) 장 르클레르크의 역사비판적 방법은 새로운 태도의 출현이 아니라 이전 세기 인문주의적 전통의 지속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지적한다. 15-16세기에 이미 종교개혁이 촉발한 종교갈등과 인문주의 문헌비평이 결합하는 흐름이 나타났으며, 종파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던 17세기 잉글랜드의 학술장은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연구기법이 한층 전문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까지 계몽주의 연구자들이 주목한 종교비판적 사고의 ‘기원’은 실제로는 17세기 잉글랜드와 유럽의 학술장 내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실천에 불과하다. 저자는 단순히 계몽주의가 인문주의를 계승하고 연장했다는 지적을 넘어, (특정한 문헌에는) 계몽주의라는 범주 대신 “장기 인문주의”(a long humanism)의 범주가 더욱 유효하다고까지 주장한다.

레비틴의 도전은 특히 잉글랜드계몽주의 연구에서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잉글랜드 계몽주의 연구가 성장할 수 있던 주요한 동력은 종교적인 구체제 대 세속화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정교한 역사적 해석을 제시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초의 문인들이 집필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종교사·교회사 저술로부터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출발점을 찾으려는 포콕과 같은 시도는 그러한 열망이 내놓은 가장 정교한 해석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의 지혜』는 바로 그러한 해석의 토대를 침식한다. 물론 학계의 최전선에서 발생한 논쟁이 학계 전체에 파급력을 끼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더욱이 레비틴의 저작들이 전문연구자들도 쉽게 완독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잉글랜드계몽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앞으로 계몽주의 연구가 어떤 도전과 논쟁을 낳을지는 계속해서 지켜볼 일이다.


지금까지 정치사상사 연구의 등장에서부터 잉글랜드계몽주의 연구의 성립과 도전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통해 18세기 영국 지성사 연구의 성립과 확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별은 계몽(주의) 개념처럼 우리가 비교적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개념조차도 그 내포와 외연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러한 변천의 과정은 어느 학문분야의 발전이 동질적인 연구자집단의 폐쇄적인 노력보다는, 여러 전문영역 사이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촉진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계몽주의 연구는 정치사상사, 교회사, 학술사, 철학사, 문학연구와 같은 다양한 분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방향을 돌려 지성사 연구의 문제의식이 인접한 분야에 어떻게 전파, 수용, 변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한 흐름이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18세기 여성 문인 연구가 있다.



지성사의 전파: 장기 18세기의 여성문인 연구1)


18세기 영국의 고문헌수집가 조지 발라드(George Ballard, c. 1706-1755) 의 『영국 귀부인들의 전기』(Memoirs of Several Ladies of Great Britain, 1752) 이래, 18세기 전후 여성 문인들의 인생과 저술활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간헐적으로나마 꾸준히 존재해왔다. 그것이 명확한 연구 흐름으로 포착될 만큼의 응집력을 갖추게 된 전환점은 1970년대 영어권 인문학술장에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다. 하나의 학문적 입장으로서 뚜렷한 목소리를 낼만큼 성장한 여성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여성사 혹은 여성 인물의 전기를 넘어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에 입각한 역사, 나아가 여성주의 자체의 역사를 구축하고자 했다.2)

1980년대에 출간된 연구서들은 과거 여성 문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사상·태도를 직접적으로 “여성주의”(feminism)로, 그 저자를 “여성주의자”(feminist)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근대 문학사 서술에서 여성 작가·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음을 지적하거나, 17-18세기 잉글랜드의 “여성주의” 전통을 규정하려는 연구들이 나타난다.3)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지성사 연구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과거의 저작과 언어를 근대 젠더 체계 혹은 근대 여성주의로의 목적론적 궤도에 놓는 대신 그 시대의 다른 사상적·언어적 쟁점과 상호작용하는 고유한 역사적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한 이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작업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이전까지의 문학사 및 여성 문인 연구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않은 여성 저자와 그들의 저술을 발굴하고 재출간하는 작업이다. 17세기 여성들이 가정 및 “가부장제”를 어떻게 이해했고 활용했는가를 파고든 마거릿 J. M. 이젤의 작업이나, 17세기 후반 잉글랜드 여성들의 다양한 글쓰기에 관한 일레인 하비의 철저한 조사, 그리고 사실상 18세기 “블루스타킹 서클” 연구의 문을 열어젖힌 실비아 마이어스의 기념비적 저작이 대표적이다.4) 더불어 1990년대 중반부터 “영어권 여성 필자들, 1350-1850”(Women Writers in English 1350-1850) 총서, “초기 근대 유럽의 다른 목소리”(The Other Voice in Early Modern Europe) 총서 등이 발간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대의 독자들은 초기 근대 시기의 여러 여성 저자들이 남긴 문헌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유형은 과거의 여성 저작 및 젠더에 관한 언어적 실천을 당대의 여러 언어적·사상적 맥락과 연결하여 읽어내려는, 여성(주의)사 연구 모델 자체를 갱신하려는 시도다. 자신의 분야를 혁신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전략은 무엇일까? 바로 인접 분야의 성공적인 결과물을 흡수·모방·응용하는 것이다. 1990년대 전후, 18세기 잉글랜드 여성주의 및 젠더적 사유의 탐구를 갱신하고자 했던 연구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참조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70년대를 거쳐 주목할만한 확장을 이룩하고 있는 17-18세기 영국 정치사상사 분야였다. 예컨대 제인 렌달(Jane Rendall)의 선구작 『근대 여성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Modern Feminism: Women in Britain, France and the United States, 1780-1860, 1985)은 공화주의와 자연법, 상업과 같이 케임브리지학파가 발굴한 개념적 자원을 직접적으로 수용, 18세기 후반 이래 유통된 “공화주의적 모성”(republican motherhood)과 같은 여성주의 정치언어를 재구성하고자 시도했다.


18세기 영국 지성사 연구의 성과 중 1990년대 이후의 젠더·여성문학 연구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개념 중 하나는 “상업”(commerce)이다. 앞서 언급한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에서 포콕은 18세기 잉글랜드를 상업사회의 도래가 고전적 혹은 공화주의적 시민 관념이라는 수원(水源)에 치명적인 독극물을 부어버린 광경으로 묘사했다. 고전기 정치론에서부터 초기 근대 민병대 논쟁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자유와 독립성을 갖춘 자영농은 시민군의 물질적 토대로 여겨졌다. 따라서 상업이 침투한 근대 사회는 독립적인 시민, ‘남자다운’ 남성이 존속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상실해가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도시생활의 사치와 유행이 남성이 남성성을 상실하고 “여성화”(effeminate)되는 위기에 빠트리는 상황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자연법 및 계몽주의 역사관의 언어에서 상업을 인간의 교화와 문명 진보의 동력으로 규정하는 만큼 그림은 더욱 복잡해졌다. 상업은 사회를 문명화하고 물질적 번영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남성성과 국가의 쇠퇴를 초래하는 양날의 칼이었다. 상업과 사치를 중심으로 덕성과 부패, 남성성과 여성성이 불안하게 회전하는 광경은 18세기의 젠더와 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G. J. 바커-벤필드(G. J. Barker-Benfield)의 『감성의 문화: 18세기 영국의 성과 사회』(The Culture of Sensibility: Sex and Society in Eighteenth-Century Britain, 1992)에서처럼, 상업과 덕성, 젠더를 키워드로 삼는 연구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초부터 여성 문인·젠더 연구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지성사 연구의 성과 또한 자신들의 지적 자산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연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바버라 테일러(Barbara Taylor)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여성주의적 상상력』(Mary Wollstonecraft and the Feminist Imagination, 2003)은 계몽주의의 사회변혁적 성격과 여성주의, 종교적 관념의 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이 시기 여성·젠더 연구와 계몽주의 연구의 조우는 두 권의 연구서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0개의 섹션에 30편이 넘는 논문이 수록된 『여성, 젠더, 계몽주의』(Women, Gender and Enlightenment, 2005)는 혁명기 시민권과 같은 고전적인 쟁점에서부터 인종, 계몽주의 종교사상과 같은 비교적 새로운 쟁점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논의를 포함하면서, 여성주의-계몽주의 연구의 지성사적 전회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캐런 오브라이언(Karen O’Brien)의 『18세기 영국에서의 여성과 계몽』(Women and Enlightenment in Eighteenth-Century Britain, 2009)은 이제 18세기 여성·젠더 연구자들이 계몽주의 지성사의 주요한 문제의식을 소화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오브라이언은 잉글랜드계몽주의 테제를 받아들여 지성사가들이 개척한 주제·키워드를 여성담론·문인 연구에 응용해보고자 했다. 2010년대에 이르면 계몽주의 지성사 연구의 성과에 기초하여 젠더·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펼치는 연구서를 찾아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초기 근대 영국 세계에서 여성이 가정 영역 바깥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기독교회였음을 고려할 때, 여성주의·젠더의 이해에서 종교는 핵심적인 주제일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이래 축적되어 온 잉글랜드국교회 연구, 그리고 계몽주의 연구의 종교적 전회가 17-18세기 여성주의 연구와 본격적으로 접합하는 사례는 논문집 『메리 아스텔: 이성, 젠더, 신앙』(Mary Astell: Reason, Gender, Faith, 2007)에 수록된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예혁명 전후의 교회사 연구가 “초기 계몽주의”란 범주를 통해 계몽주의 연구와 결합하는 흐름은 여성주의·젠더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새러 아페트레이(Sarah Apetrei)의 『초기 계몽주의 잉글랜드에서 여성, 여성주의, 종교』(Women, Feminism and Religion in Early Enlightenment England, 2010)는 그동안 축적된 명예혁명 전후 교회정치사 연구를 기반으로 여성주의와 종교논쟁의 관계를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18세기 중반부의 경우, 국교회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블루스타킹 서클” 여성 문인들을 놓고 종교와 여성의 함께 바라보는 연구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위에서 일별한 바와 같이 18세기 여성 문인·담론 연구는 공화주의, 상업, 계몽, 종교와 같은 18세기 영국 지성사 연구의 주요한 성과를 대략 5-1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흡수하여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삼아 왔다. 여성들이 속해 있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질수록, 여성의 언어, 여성에 관한 언어에 대한 이해 역시 더욱 풍부해질 수 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흡수와 변용의 과정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성사 연구와 여성 연구의 상호작용에 잠재된 학문적 에너지는 여전히 점화되지 않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과거의 여성들에게 익숙한 글쓰기 장르, 즉 도덕과 가정, 종교에 관한 방대한 문헌들이 여전히 지성사 연구자들의 시야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성 문인들의 주된 활동영역이었던 소설장르는 지성사적 접근법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진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영문학, 특히 18세기 소설사 연구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에서 이어나가도록 하자.



1) 이하는 이우창, 『새뮤얼 리처드슨과 초기 여성주의 도덕 언어』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학위논문) 8-15쪽의 내용을 간추려 다듬은 것이다.

2) Natalie Zemon Davis, “‘Women's History’ in Transition: The European Case,” Feminist Studies 3.3/4 (1976): 83-103; Joan Kelly, Women, History and Theory: The Essays of Joan Kell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chs. 3, 4; Joan Scott,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특히 introduction 및 chs. 1-2; Jane Rendall, “‘Uneven Developments’: Women’s History, Feminist History and Gender History in Great Britain,” Writing Women’s History: International Perspectives (ed. by Karen Offen, Ruth Roach Pierson and Jane Rendall, Bloomington: Indinan University Press, 1991), 45-57.

3) Hilda L. Smith, Reason’s Disciples: Seventeenth-Century English Feminist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2); Katharine M. Rogers, Feminism in Eighteenth-Century England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2); Moira Ferguson, ed., First Feminists: British Women Writers, 1578-1799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Alice Browne, The Eighteenth Century Feminist Mind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7).

4) Margaret J. M. Ezell, The Patriarch’s Wife; Elaine Hobby, Virtue of Necessity: English Women’s Writing, 1649-88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8); Sylvia Harcstark Myers, The Bluestocking Circle: Women, Friendship, and the Life of the Mind in Eighteenth-Century England (Oxford: Clarendon Press, 1990).








조회수 192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