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공격한 지 500여 일이 지났다.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이 전쟁은 20세기 후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대국의 전쟁은 드물었는가? 소련, 미국, 러시아는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해왔고, 지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어디선가는 전쟁 중이다. 당연하지 않지만 언제나 있어 왔던 전쟁은 뉴스의 글과 영상을 통해,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경우 전쟁 수행측의 승리 홍보의 글로 전파되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대중이 텍스트를 소비한 이래 전쟁을 접하는 이 경험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황을 접하고, 전쟁의 여파를 따지고, 전쟁이 벌어진 영토의 역사를 보고, 전쟁을 수행하는 최고 권력자들을 논하고, 지역의 패권을 주시하는 등등 마치 20세기 초의 신문을 보는 듯한 서사가 재현된다. 전쟁을 해도 국경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2차세계대전 이후의 표면적인 근대국가의 세계질서는 사라졌고, 국경의 안정은 일시적인 조건 속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렸다. 권력과 영토가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와 같은 무대에 등장했다.
지난 한 세기 인문사회과학의 지식들,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고등연구자들이 쌓았던 권력에 대한 지식은 어디로 갔을까? 국제사법체계, 국제기구, 경제관련 국가간회의, 군사조약 등 수많은 국제관계의 조직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토전쟁이라는 복고의 권력행위가 전면에 등장한 이 전쟁을 한 세기 전과 똑같은 레파토리로 전달하는 이 상황은, 정치지리학의 사유가 그동안 멈춰왔음을, 적어도 새롭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사유가 빈곤함을 시사한다. 그동안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전쟁’을 생각하는 방식을 잃어버린 듯하다.
‘권력’,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제3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권력이라고 한다. 정치지리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이 ‘권력(pouvoir)’을 푸코는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라고 정의한다. 누군가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관계에 누군가 위치한다. 이는 우리가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용법과는 사뭇 다르고, 영미권,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낯선 말이다. ‘나의 권력’, ‘대통령의 권력’ 등 소유하는 ‘권력’이란 일반 명사는 여러 언어에서 널리 쓰인다. 불어에서도 pouvoir는 명사로도 늘상 쓰이며, 대문자 Pouvoir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등, 푸코의 ‘권력-관계’는 생활 속 언어 습관을 껄끄럽게 한다. 푸코 본인의 말에도 권력 명사는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업시간에 푸코를 설명할 때면, ‘권력’은 명사의 위치로, 누군가의 소유물의 자리로 끊임없이 돌아오곤 하며, 종종 말이 얽힌다. 영어권에서도 다르지 않은 게, 푸코와 작은 작업을 했던 세넷이 쓴 [살과 돌]을 번역하며 그가 ‘power’라는 단어를 ‘권력’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힘’으로 쓴다는 것을, 심지어 푸코 사유의 배경이었던 니체의 권력도 관계로 파악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계로서 권력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 정말 힘든 일이다.
아마도 불어를 쓴 푸코였기 때문에 ‘관계로서의 권력’이 탄생했을 지도 모른다. 불어에서 권력(pouvoir)은 명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동사로도 쓰인다. 영어의 can과 유사하지만 ‘능력’이라기 보다는 '권력'의 동사이다. 언어학(소쉬르), 정신분석학(라깡) 등등이 널리 읽히며 생각하는 인간들의 황금기였던 1960-70년대를 살았던 그에게, ‘언어’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고, 불어의 pouvoir 동사는 ‘권력-관계’라는 공리를 만드는 배경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명사로 생각하지 않고 동사로 생각하면 푸코의 권력관계(rapport)는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운전할 수 있다’는 ‘나-권력-차-움직이기’로, ‘판사는 집주인에게 배상명령을 한다’는 ‘판사-권력-집주인-배상하기’로 연결되고, 이 순간 권력은 관계가 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말 또한 동사 pouvoir가 어디서나 쓰인다는 말이다. 양태(mode)를 중요시하는 스피노자에서 이어지는 푸코의 사유도, 언어학에서 mode가 동사의 ‘법’, 예를 들어 ‘비인칭 법’ 등과 같은 ‘법’(방식)임을 떠올리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불어를 배우기 전, 푸코의 강의를 소리로 듣기 전, ‘권력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의 공식과도 같은 암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권력은 도처에 있고, 그 양태가 중요하다’를 불어로 듣고 말하고 나니, ‘권력이란 동사는 어디에서나 쓰이고, 권력 동사의 앞뒤에 무엇이 오는가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은 소리였다.
일단 권력이 동사가 되자, ‘살게 만들기’, ‘죽게 놔두기’, ‘안 보이게 하기’, ‘바라게 만들기’ 등 사역동사가 들어가는 모든 곳에 ‘권력’이란 개념이 자리잡았다. ‘미시권력’이란 유행어를 만들며 생활의 여기저기를 권력관계로 해석할 수 있었고, 가족, 종교, 교육 등 여러 학문분야에서 푸코의 ‘권력’ 개념을 사용했다. 분명 ‘권력’이란 말을 기존의 방식과는 낯설고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신선함이 있었고,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세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범용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푸코가 권력-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다. 푸코는 1968년 이후 사회 곳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탈권위, 자유, 소비의 사회를 해석하기 위해, 통치의 계보학을 만들며 현재를 만든 사건표를 뒤졌고, 당시 마오주의와 이란 혁명 등의 시대상과 함께하며 생각을 발전시켰다. 물리적인 경찰 폭력이 68 이후로 잦아들었지만 계속되는 이 통치방식은 무엇인가? 왜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억압은 멈추지 않는가? 스탈린과 마오주의를,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 ‘권력’을 국가의 소유물로 해석할 때는 풀릴 수 없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로버트 달이 ‘누가 지배하는가? 미국도시의 민주주의와 권력’(1961)에서 권력을 한 원천으로 취급했다면, 푸코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권력-동사의 방식으로 사유했다.
마치 큰 권력, 작은 권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 만드는 ‘미시권력’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쓰임새 중 일부일 뿐이다. 영미권 문화이론, 특히 페미니즘 쪽에서 푸코의 권력 이야기를 활발하게 논의했기 때문에 권력의 미시화가 학계에서 강조되었을 텐데, 정작 푸코는 일상생활 속 권력장치의 세밀화를 그리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그는 유럽 국경이 안정화되는 베스트팔렌 조약, 중농주의에서 끌어낸 교정을 포기한 듯한 자유주의 통치성, 아담 스미스에서 출발해 시장이라는 질서체계가 작동하는 방식 등을 이야기했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연속으로 ‘정치’를 보았다. 푸코에게 정치는 전쟁의 끝나지 않는 마지막 모습이고, “평화는 소리없이 전쟁을 치른다”. 또 다른 방식의 전쟁, 적국과의 살육전이 아닌 벙어리 같은 내부의 전쟁은 사법체계, 정치경제학, 역사학, 시민사회 등의 지식이 권력의 앞에 위치하며 작동한다. 또한 생명정치가 전면에 등장하고, 훈육과 지식이 결합하고, 통치 대상으로서 신민이 아닌 인구가 파악되고, 전쟁을 새롭게 이어나간다. 흔히들 푸코의 생각을 은폐되고, 섬세하고, 자각하지 못한 채 행해지는 권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가두고 있지만, 실상 푸코의 문제설정은 역사의 진리를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억압하는 전쟁의 장치들이, 사회의 곳곳에, 사람들의 말로 어떻게 동작하는지를 그리는 일이었다.
‘지식-권력’(savoir-pouvoir) 또한 많은 언어권에서 ‘지식의 권력화’로 오해하던 말이다. 이 말은 영어의 노하우(know-how)의 불어번역인 ‘할 줄 알기’(savoir-faire)처럼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이다. savoir-faire는 ‘다룰 줄 알기’와 같은, ‘하다’ 혹은 ‘하게 하다’(faire)의 사역동사에 ‘알다’가 연결된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지식-권력’은, 없는 말이지만 ‘권력하다’라는 동사를 가정한다면, ‘권력(사역)할 줄 알기’이다. savoir, pouvoir 모두 동사이자 명사이기에 두 단어의 연결을 해석할 수 있는 수많은 갈래들이 존재하고 맥락에 따라 다른 뜻으로 번역되지만, 이 둘을 모두 명사로 한정하면 기껏 ‘관계’로 끄집어 낸 ‘권력’의 의미를 상실한다. 통치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장소에 고정하고 훈육하는 일이 더이상 효과를 볼 수 없는 도시의 발전이 ‘통치불가능성’을 만들었고, 이를 대체하는 것은 숫자의 목록과 표로 인구(population)를 만들고 계산할 수 있는, 반응할 수 있는 ‘권력’의 장치를 만드는 일이었다. ‘권력할 줄 알기’ 혹은 역방향으로 ‘아는 것이 권력하기’로 조합될 수 있는 이 악명 높은 불어의 모호한 말로, 푸코는 여전히 전쟁 중인 근대국가를 설명한다. 특히 그의 강의에서 나치의 전쟁은, 타자(유태인)를 죽이는 ‘살인 국가’이자 자신의 인구마저도 죽이는 ‘자살하는 국가’인 근대국가, 이 국가와 지식이 결합한 생명정치의 만남이었다. 국민이 권력의 원천이라고, 권력은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국민을 적과 함께 죽이는 이 전쟁기계를 해석할 수 없다. 국민은 ‘권력하기’ 뒤에 위치하고 그 앞의 어떤 지식과 실천이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드러날 뿐이다.
푸코의 권력개념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정치지리학은 권력의 역동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연구한다. 반면 기존의 지리정치학(지정학)은 지리와 얽힌 정치, 정치가 지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고자 한다. 정치와 지리를 바라보는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인식론적인 이 둘의 차이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우선 지정학은 땅(영토)의 정치적 가치와 그것을 소유한 권력집단을 사고한다. ‘이웃 국가간 교역’, ‘전략적 요충지’, ‘영토분쟁’, ‘전쟁’, ‘난민’ 등이 지정학의 주요 주제들이며, 영토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근대국가들의 공간적 질서가 학문의 주요 대상이다. 이 때 권력은 소유하는 실체이고, 하나의 영토 단위에 하나의 주권을 일대일로 연결하여 근대국가가 성립된다. 예를 들어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동시에 통치하는 땅이 아니며, 하나의 영토에 하나의 권력집단이 있을 뿐이다. 영토에 존재하는 복수의 권력은 주권이란 대문자 권력으로, 신을 대신해 탄생한 국가로 수렴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분쟁지역’으로 비정상화시킨다. 지정학의 문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점령했다’, ‘우크라이나가 국가 설립 초기의 영토를 찾고자 한다’ 등의 소유물로서의 영토와 영토를 배타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으로 구성된다. 지정학에서 전쟁은 모든 국가가 실체적으로 평등하다는, 단일하다는 가정하에 설립된 현재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이며, 자기 영토의 밖으로 미치는 영향력, 패권 등, 힘의 네트워크를 영토를 매개로 판단한다.
반면 정치지리학에서 영토는 권력이 집행되는 대상이 아니라 권력의 공간적 외양이다. 학교는 ‘교장-권력-영토’이고, 국가하천은 ‘중앙정부-권력-하천’이다. 권력관계는 영토마다 하나로 추상화될 수 없으며, 권력 동사는 불변의 항상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고정될 수 없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을 지칭하는 현재형이다.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을 설명하는 정치지리학의 시선은 ‘영토를 누가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논한다. 즉, 권력의 앞뒤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 정부를 수립하는 UN은 그 영토에서 ‘선거를 실시할 수’ 있었고, ‘도둑은 잡을 수 없었’고, ‘농지경영과 관련된 규칙을 제정할 수 없었’고, ‘경찰을 임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인근 두바이, 아부다비에서 아랍에미레이트 국가는 각기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달랐고, 그 권력 앞에는 때론 12세기의 관습법이, 때론 캐나다 용역회사가 설치하는 교통지침이 등장했다. ‘평화’는 계속되는 또다른 전쟁이고, 정치지리학은 ‘전쟁’ 그 자체가 질서를 깨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영토의 경계를 밀고 당기는 ‘전쟁’, 테러와 같은 영토 내의 ‘살인’ 등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닌 ‘권력’동사를 넣을 수 있는 수많은 사건의 연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정치지리학의 시선에서 지정학이 말하는 권력(패권)은 왕관이나 권좌처럼 누군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문장을 어디까지 펼칠 수 있는지의 잠재성(potentiel)의 문제이다.
지난 수년간 전염병, 기후위기, 재해 등의 사건으로 우리가 사는 땅의 권력관계는 요동쳐왔다. 국제 경제, 정치, 의료 등 권력의 앞에 등장했던 지식체계 또한 변했다. 얼마 전까지 권력 앞에 위치하며 통치 장치로 기능했던 것들이 현재 그 힘을 잃어 사라지기도 했고,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정치행위도 권력이 되어 새로운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지만, 점점 더 권력은 없던 새로운 방식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오래전 작동을 멈추며 폐기된 방식들을 부활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나 보던 영토전쟁의 부활을 보기도 하고, 규칙과 상식과 숫자로 조용한 전쟁을 해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 물리적인 힘과 법 조항으로 억압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일반경제학, 권력은 결국 값싼 방식을 따라 움직이고, 권력장치의 방식에 따라 수세기전의 백년전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낯설지만 익숙한 이 권력을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고 사유할 수밖에 없는가?
저 멀리 있는 전쟁의 결과에 따라 패권이 달라진다고 웅성거리고, 그 땅의 자원 중 일부를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등, 마치 게임 중계 같은 소식들 속에서 새로운 직관을 끌어낼 수는 없다. 또한 전쟁이 발발한 땅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며 영토의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지식들에 감춰진 채, ‘전쟁’과 ‘평화’가 언제나 동시에 존재했던 역사를, 국경의 내부와 외부에서 벌어지는 방식이 다를 뿐 똑같은 억압이 자행되는 ‘전쟁’의 질서를 파악할 수 없다. 정치지리학의 측면에서 우리가 가늠해야 할 ‘권력’은 권력 앞에 붙은 장치들의 흥망성쇠, 예전의 통치기제의 작동 중지와 새로운 기제의 탄생을 추적하는 일이고, 근대국가의 통치성이란 ‘국민 죽이기’의 양상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있다. 역사의 측면이라면, 푸코의 권력 이야기처럼, 역사의 사실들로 역사주의 지식이 형성되어 영토분쟁과 갈등을 만들고, 이를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밝히는 일이 과제로 남을 것이다. 이 글은 인문사회과학 모두 이번 전쟁에 침묵하거나 100년전 신문사설과 같은 생각의 빈곤함을 전시하는 오늘날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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