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 / 김동규

코로나19의 여파로 이번 학기 수업을 비대면 영상 강의로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촬영해 놓은 영상을 올려놓기도 하고 실시간 화상 강의 및 채팅도 하고, 온라인 게시판에서 토론을 활성화하려고도 하고 있다.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는 있지만, 뭔가 허전한 구석이 남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뭘까?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실감(實感)’이다. 원격현전을 구현하는 인터넷 기술, CG나 3D 같은 기술이 보완된다 하더라도, 이 실감의 허전함을 메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말하는 실감은 고해상도 같은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실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과거 수업의 정경(情景)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나는 언덕배기에 있는 강의실 건물 인근의 벤치에 앉아 있기를 즐겼다. 그곳에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지나간 수업을 회상하기도 한다. 거기에선 계절의 정취와 탁 트인 전망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수업 전에 그곳에 있노라면,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이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황홀하게 피어오른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이 먼저 보이고 이어 목과 가슴, 다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설렘의 순간이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거꾸로 학생들의 뒤꿈치부터 다리, 등, 뒤통수가 서서히 사라진다. 섭섭한 순간이다. 섭섭하지만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고 만났다 헤어지는 삶을 축약시킨 짧은 드라마를 본다. 게다가 수업 전후로 학생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강렬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인물들과 대화하는 느낌, 내게 실감이란 이런 것이다. 비대면 수업에서 아직 이런 느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감의 원천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게 ‘필요’다.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실감 나게 한다. 목이 마르면 청량한 물 한 모금이, 추운 겨울밤에는 따뜻한 아랫목이 실감 난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필요한 것이 무척 많다. 실감을 느끼게 할 만한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즉 돈의 매개를 통해서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가뜩이나 욕망을 조장하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욕망 실현의 수단인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코흘리개 꼬마조차 잘 알고 있다.


돈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직업도 필요하고 따뜻한 가정도 필요하고 명예와 권력도 필요하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또 자꾸만 필요하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새벽부터 공부하고, 밤새워 일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한다. 연애마저도 필요해서 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필요해서 한다. 어쩌면 우리는 ‘필요의 노예’인지 모른다.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환상 속에서 필요의 노예로 심신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못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필요일까? 누군가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틀리지는 않지만, 적절한 답은 아니다. 내 몸 하나 존속시키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또 말한다. ‘잘(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행복하게 살려고 필요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걸까? 잘 산다는 것(well-being)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즉 단순히 건강하게 사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그것이 노예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래서 필요의 노예로 살고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잘못 사는 셈이다. ‘잘 살기 위하여’라는 명분은 지금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000년 이후 많은 대학교에서 철학과가 사라졌다. 서양 최초의 교육기관인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나 중세와 근대 대학에서 차지했던 철학의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껍데기만 남고 대학의 알맹이가 사라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특정인의 무지몽매라기보다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 때문에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필요(특히 경제적 필요성)를 증명하지 못하면, 필요의 노예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철학은 진정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전통적으로 논리학과 수사학을 가르쳐 온 철학이 자기 정당화 능력이 떨어져서 입증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입증하려 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철학자들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니까. 그렇다면 왜 철학은 사라져 가고만 있는 것일까? 왜 전혀 실감이 안 나는 허깨비가 되고 만 것일까?


한 가지 답은 이미 나왔다. 점점 필요의 노예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의 노예가 된 이들의 눈에 철학은 불필요한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철학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이 필요하다고 핏대 세워 외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철학은 필요의 잣대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은 필요/불필요의 도식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필요와 불필요를 나누고, 그 나눔의 기준을 정하고, 또 우리가 필요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장(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철학은 필요와 불필요의 피안에 있다. 그렇기에 철학이 불필요하게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라지는 것이 섭섭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으려면, 기약 없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만 한다. 수업을 파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학생들처럼 말이다. 온갖 필요에 얽매이면서 더욱 가난해진 이 시대에, 불필요한 철학수업이 더없이 좋아 보였던 것은, 가슴 속 깊숙이에서 철학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흐림 없는 학생들의 눈에서 그런 희망을 발견할 때면,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필요에서 나온 실감은 단속적이고 얄팍하다. 실감이란 기실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관계 맺는 시간의 두툼한 두께에서 나온다. 이런 실감은 관계의 깊이를 광활하고 아득하게 드러낸다. 비대면 화상 강의에서 과연 이런 실감을 느낄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잦아들고 평상시처럼 대면 강의를 하게 된다면, 다시 실감을 복원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과거 수업에 실감이 있기나 했을까? 철학이 사라진 대학에서 그런 실감이 가능할까?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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