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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시차, 혹은 세계-외-문학을 향하여 ― 비동시성의 시대와 한국문학의 자리 / 최진석

최종 수정일: 7월 5일

1. 세계와 한국, 그리고 문학

     

현재 나는 서울 소재 한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서 비평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본래 전공에 관해 묻는다면 ‘러시아학’이라 답하는 게 옳겠다. 노어노문학과 학부를 나와서 대학원도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까지 셈한다면 삼십 년 가까이, 대학원만 계산해도 이십 년 넘게 러시아문학과 문화, 사회와 역사 등에 관해 연구했고 논문과 저술도 썼으니 ‘러시아 전공자’를 자임해도 오해 살 일은 없을 듯하다. ‘전공의 경계’ 넘기가 쉽지 않은 한국 학계의 관례를 고려할 때, 이례적이기도 하고 운이 좋다고도 할 만하다.

‘전과’의 계기는 2010년대 중반 무렵, 모 대학 연구원으로 재직 중일 때 한국문학 평론에 도전해 본 일이었다. 국적만 다를 뿐 문학의 본령이야 러시아든 한국이든 엇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주먹구구식 판단도 작용했다. 골탕이라도 먹이려 했는지 국문학계 친구들의 술자리 권유까지 더하여 평론을 끄적여 보았는데, 초짜의 운이 따라서인지 덜컥 등단하게 되었다. 그 후 기회 닿을 때마다 한국 현대 시와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책도 펴낼 수 있었고, 그렇게 가 닿은 인연이 현재 나의 ‘본업’이 된 셈이다.

서두가 좀 긴데, 이 글의 실마리는 그때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출발한다. 문학평론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국문학계 동료들의 축하와 조언이 가장 많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줄곧 외국문학 연구로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 갑자기 한국문학에 관해 글을 쓴다고 하니 걱정이 이어질 수밖에. 작품 읽기의 시선이나 방법, 토대가 사뭇 다르니 차근히 경력을 쌓아가라는 친구도 있었지만, 한국문학 읽기와 쓰기에 내가 금세 질려버리지는 않을지 궁금해하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세계문학의 ‘중심’이자 ‘고봉준령’에 속한 러시아문학에 비해 백 년을 조금 더 넘었을 뿐인, ‘변방’의 한국문학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여겨질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러시아문학이나 세계문학의 고전에 비하면 좀 실망할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 말라는 넌즉한 조언도 있었다. 자격지심이라기보다, ‘문학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한국문학이 맞이한 곤경을 담아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물음에 당시 나로서는 딱히 답할 수가 없었다. 한국문학과 그 역사에 대해 오래 공부하고, 많은 것들을 느끼고 성찰해 온 그들에 비해 내가 아는 한국문학의 영토는 대단히 협소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그와 비슷한 의문들을 여럿 접한 후로는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던 것도 사실이다. 외국문학, 곧 러시아문학을 비롯한 세계문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한국문학은 그와 많이 다른 것인가? 한국문학에 관해 읽고 쓰는 일이 전업이 된 지금, 나는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갖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이 글은, 전공도 바뀌고 본업도 변경되었으니 어떻게든 한국문학을 변호하거나 방어하려는 입장에서 쓰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하고 다양한 문화 장르가 세계적 흐름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세계 유수의 문학상들마저 한국의 작가를 호명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가 왔다. 고유성과 독자성을 내세우며 한국문학의 자립 근거를 찾던 시기를 지나, 이제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한국문학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 현실과 전망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봄 직하다. 외국문학 전공자였던 입장에서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늠해 볼 수 있을지, 생각의 작은 단편을 끄적여 본다.


     

2. 근대, 또는 세계-내-문학의 시대

     

20세기를 전후하여, 백 년을 조금 더 넘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개념의 하나는 ‘근대’가 아닐까 싶다. 근대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답한다면, 근대는 ‘서구’이자 ‘보편’, ‘문명’인 동시에 ‘진보’의 표상이다.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것은 역사란 하나의 줄세우기라는 것, 즉 세계에는 더 앞선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더 뒤진 국가와 민족에 이르는 일련의 순위가 있다는 것. 전자에 가까울수록 진보적이고 후자에 가까울수록 후진적이라는 도식이 근대성의 요체를 이룬다. 서세동점으로 집약되는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는 밀려드는 서구 열강의 힘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내세웠던 것이 근대화 곧 서구화 프로젝트였다.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본격적인 침탈의 위기에 놓였던 중국, 미국 군함의 무력시위로 개항을 강제당했던 일본의 사정을 자세히 열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사회제도와 군사체계, 법체제와 자본주의 등 외적인 문물의 도입 외에도, 정신문화의 일환으로 문학이 중시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외적 문물의 발전을 당장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나마 대등한 수준을 구가하며 근대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다급함이 서구 문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욕망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나 루쉰의 경우처럼, 근대를 배우러 유학을 갔다가 문학을 하기 위해 돌아온 일화는 근대 문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인식과 태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후진성에 대한 자각이 정신승리로 비약한 것이든, 근대성의 실체가 정신적인 것에 있음을 통찰한 것이든, 문학이야말로 서구적 근대성의 내밀한 정체로 간주된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근대성을 이룩하는 것은, 적어도 정신적으로나마 서구와 동시성의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과 상통한다. 서구적 보편, 문명과 진보의 시간에 도달하는 최단 거리가 문학에 있다고 여겼던 셈이다.

러시아문학은 근대적 보편성의 표상이었다. 백여 년 전,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이미 세계문학의 정전에 올려져 동아시아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가령 러시아어를 익히고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 1864-1909)에게 러시아문학은 근대성 자체를 뜻했다. 즉 러시아문학은 근대정신의 외화된 표현물이자 완성태였다. 그렇기에 일본 근대 문학의 형성기에서 그는 ‘러시아어로 구상하고 일본어로 쓴다’는 창작 원칙을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던 것이다. 이것이 바다 건너 조선에서 김동인에 의해 ‘일본어로 구상하고 조선어로 쓴다’는 원칙으로 변형되었음은 상세히 밝혀져 있다. 요컨대, 러시아문학은 서구적 근대성의 모범이자 보편성의 등가물로 수용되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에서 러시아문학이 차지하는 지분을 떠올려보면 금세 이해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초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17세기 말, 개혁 군주 표트르 1세가 서구화를 통해 유럽의 문물을 도입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유럽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던 나라였다. ‘위로부터’ 강제된 개혁을 통해 제도와 체제가 유럽화하면서 문학도 ‘수입’되었는데, 그 후 한 세기 동안의 러시아문학은 유럽문학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것이 당대의 공식적인 평가였다. 19세기 초, 최초의 국민작가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르 푸슈킨도 습작 시절에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으며, 당대 많은 귀족 문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로 구상하고 러시아어로 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러시아문학이 유럽문학과 등가의 수준을 갖게 된 것은 18-19세기의 오랜 수련 과정, 임화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식문화’의 시간을 거친 결과였다. 그때까지 러시아인들 역시 서구적 보편의 시간, 즉 세계문학이라는 역사의 첨단을 ‘따라잡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며, 자기의 후진성과 열등성에 지독한 증오를 표출했다.

동아시아인에게 ‘진보’와 ‘문명’, ‘보편’의 표상이었던 서구의 근대는 결코 단일한 시간성을 갖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생산양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했던 것과 같이, 문학적 시간 또한 동질적이거나 동시적으로 진전해오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세계문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듯싶다. 하지만 실체로서의 세계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 유명한 ‘상상의 공동체’ 이론에 따르면 신문과 잡지의 확산과 전파가 근대 사회와 국가를 형성했듯, 근대 문학은 근대인의 심성과 태도를 조형해 온 비물질적 매체로 기능했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 3국에서 벌어진 근대화 논쟁을 슬쩍 엿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세계문학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세계-내-문학(Literature-in-the-World)’이라 불러도 좋겠다. 서구의 근대 문학이 만든 규범과 체계, 문학적인 것의 척도에 맞게 한국의 문학을 구성하고 조절하는 기능이 그 핵심에 있다. 이른바 ‘세계적’이라 부르는, 서구적 기준에 맞춰 글을 쓰거나 읽고, 평가하고 정전화하는 이 과정은 문학적 근대성의 승인/인정과 거절/부정의 체계에 다름 아니다. 최근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구 문학의 인정에 여전히 목말라한다는 점이고, 그 승인 체계에 입장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이 과거보다 한결 나아졌다는 점이다. ‘그들만의 보편성’에 들어가기 위한 욕망, 그로써 ‘세계문학’의 타이틀에 한국문학을 포함시키려는 욕망을 주의 깊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3. 세계-외-문학, 낯선 글쓰기의 시간을 향하여

     

민족과 국가를 떠나, 만인의 심정에 호소력을 갖는 문학이 있을 수 있고, 그에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이 걸맞을 수도 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상과 감정, 또는 형언 불가능한 감응의 방식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도 분명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은 존재하며, 그것을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을 일이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문학이 근대성을 전제로 서구적 진보를 표상하는 제도이자 그 표현물이었다면, 그것은 서구 세계의 ‘내부’를 구축하고 존속시키는 포함과 배제의 장치였음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세계문학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을지 모른다.

과감히 말하자면, 나는 ‘세계-외-문학(Literature-outside-the World)’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싶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 바깥의 어떤 실체적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세계-내-문학이라는 개념이 문학장의 출입을 통제하고 승인과 배제의 역학을 작동시켰던 근대 문학을 뜻한다면, 세계-외-문학은 그러한 척도 바깥의 문학, 즉 서구라는 유일무이한 기준에 의거하여 다양한 지역적 문학들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왔던 질서 너머의 문학을 말한다. 물론, 탈근대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서구적 근대성의 외부를 직시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문학의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시도되었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을 비롯한 서구성과 남성성을 벗어나려는 시각이나 방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세계-외-문학은 그로부터 더 한 걸음 더 나아간 문학, 어쩌면 근대적 척도에 의해서는 ‘비문학’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는 낯선 글쓰기의 영토를 가리킨다.

세계-외-문학은 비단 우리가 아는 세계 ‘바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세계의 발명을 포함한다. 인류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요즘,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의 자리에 인간을 유일한 존재자로 놓는 시대는 지나갔다. 비인간 역시 주체가 될 수 있고, 행위자로서 세계 구성의 공-동적(共-動的) 지위에 오른 것이다. 지구라는 존재 환경이 전하는 의미는 인간과 비인간에게 동일하지 않고, 따라서 세계성 자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다시 창안되어야 하며, 그런 세계에 관해 묘사하고 기록하는 글쓰기 또한 달라져야 한다. 세계-내-문학이 근대 문학과 동종적인 내용과 외연을 가졌다면, 세계-외-문학은 탈근대와 반근대, 비근대적인 무엇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한국문학이라는 명칭은 지역과 민족, 국가라는 근대적 분류법에 따라 문학의 내용과 외연을 규정짓는다. 이에 준거할 때, 한국문학이 제아무리 고유성과 독자성을 내세운다 해도 그것은 세계문학이라는 근대적 척도를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오히려 그에 가까이 다가가는 아이러니에 봉착한다. 1970-80년대의 민족문학에 대한 강한 애착과 향수가 최근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이라는 명명으로 환원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구 곳곳의 수많은 지역 문학, 아니 인종과 민족, 국가와 사회, 성별과 취향, 감각적 다양성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소수 문학들(minor literatures)로의 분기는 근대적 분류에 따른 문학의 존립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각각의 이름들로만 존재하는 문학들, 또는 그저 집합적 총체로서만 부를 수 있는 세계(-외-)문학만이 가능할지 모른다.

역사 시대를 넘어서는 거대한 지구사적 변환을 목전에 둔 지금, 한국문학은 더 넓고 먼 길을 바라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내일이라도 당장 국적과 민족의 구별이 소멸하지는 않을 테고, 근대성의 유산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감각은 이미 변화를 겪고 있으며, 어느 순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인지적 지도를 통해서는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문학, 혹은 글쓰기는 저 다가올 시간을 향해 변전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이 그 예감을 앞서 포착하고 또 표현할 수 있다면, 어느새 우리는 근대의 망령으로부터도 멀리 벗어나 새로운 문학, 세계문학의 자리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여전히 세계문학이라 부를 필요는 없을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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