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용서 / 김동규

으레 아이들은 자신의 생일날과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린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날 받게 될 선물을 미리 결정해서 알려준다. 자기 욕망에 솔직해야한다고 배운 탓일까? “다음번 생일선물로 이 로봇 사줘, 알았지?”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물론 그 모습까지 귀엽고 깜찍하고 앙증맞다. 그러니까 어린애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 선물을 달라고 조르고, 그것도 특정 물품을 콕 찍어서 선물을 요구하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것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니 말이다.



타인이 내게 감사를 요구하자마자 그나마 감사했던 마음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가 베풀어준 일들이 실은 조건부 베풂이었음을 폭로한 셈이기에 그렇다. 그는 되받을 것을 기대하고 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뇌물이고 거래다. 선물은 아니다. 선물은 개념상 무상(無償)의 증여, 즉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개념에 꼭 들어맞는 선물은 희귀하다. ‘돌려받을 것을 일절 기대하지 않고 준다는 게 세상에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라며 사람들은 반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물과 뇌물은 절대 구분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뇌물만 남을 것이다. 선물은 그저 뇌물의 번지르르한 포장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전에서 선물이란 단어는 영원히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선물과 뇌물의 경계선이 흐릿하다고 해도, 어지간히는 둘을 분간하며 살고 있다. 청탁금지법에서 ‘선물상한액 5만원’ 같은 법령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선물 개념이 현실적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무상의 증여라는 선물 개념이 없다면, 뇌물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선물 개념이 한갓 무기력한 관념이 아니라 법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효 개념임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선물은 망망대해에서 배의 항로를 알려주는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별과 같다.


이외에도 선물이 엄존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 있으니, 바로 사랑의 공간이다. 지상에서 선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랑이 증발하고 있다는 증거다. 대개 연애의 지속 여부는 준 만큼 받으려는 ‘기대’를 얼마만큼 감량하느냐에 달려 있다. 관계가 파경에 이른 경우, 양쪽 모두 준 것보다 받은 게 적다는 피해의식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탄의 책임은 당연히 상대에게 있다. 문제는, 책임을 전적으로 상대에게 떠넘기더라도, 자신 역시 홀가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정희의 시 「상처」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저 쓸쓸한 황야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가슴을 열었더라면 저 산등성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저무는 하늘에 신의 악보를 연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한발짝씩 천국 쪽으로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아아 자나깨나 내 머리맡에 너무 큰 하늘이 내려와 있어 밤마다 서슬을 세운 별들이 명멸하고 적막한 산천 처마 밑에서 노여운 내가 마녀처럼 울고 있습니다”

사랑을 준 만큼 기대가 커진다. ‘내가 이만큼 사랑을 베풀었으니 최소 이 정도는 사랑받을 수 있을거야’라는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번번이 상대는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랑을 준다. 불공정한 거래다. 괘씸하고 불의한 일이다. 그래서 관계파탄의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지운다. 상대는 악마가 된다. 나는 처음엔 악마의 꼬임의 희생물이었다가, 나중엔 악마를 처치한 의인이 된다. 하지만 종국에는 불공정 거래를 시정하는 ‘분노하는’ 나도 마녀가 되고 만다. 정의를 구현한 나 역시도 불행해진다. 왜 그럴까?


사랑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준 만큼 받는 공정하고 대칭적인 거래가 아니다. 정의의 신은 언제나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들고 있다. 형평을 따진다. 반면 사랑의 저울은 언제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부모 자식, 연인, 선후배, 어느 사이든 대칭적인 관계를 본 적이 있던가? 옛 속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도 사랑의 비대칭성을 표현한 말이다. 그나마 친구 사이가 얼추 대칭적인데, 그 관계도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비즈니스 관계에 비하면 비대칭적인 것이 사실이다. 고정희 시의 화자는 자꾸 커져만 가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연인인 ‘당신’이 객관적으로 잘못했더라도, 조건 없는 사랑에 실패한 시적 화자는 슬피 울 수밖에 없다. 마녀가 될 수밖에 없다.


용서라는 뜻의 외국어(forgive, pardon) 낱말에는 ‘선물을 주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용서라는 것이 무상의 증여이자 조건 없는 사랑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참회하며 진심으로 용서를 빌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후안무치로 나오더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란 본시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용서하는 이의 사랑이 압도적으로 커야 한다. 정의라는 소중한 가치마저 가뿐히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거래에 ‘무능할 수 있는’ 바보 현자일 것이다. 가해자 피해자 모두 어리석고 유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깨우침과 그걸 깨달은 자도 겨우 ‘무지의 지’만 허락된, 아둔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각성이 큰 연민과 용서를 낳는다.



굳이 이런 현자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미숙과 성숙이라는 상대적인 ‘존재의 격차’만 있어도 용서는 가능해진다. 예컨대 어린 학생은 어쩌다 내뱉은 선생의 한마디 말에도 깊이 감동받을 수 있다. 먼 훗날까지 학생은 선생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 선생은 그를 기억하기조차도 어렵다. 하물며 뭔가를 선사했다는 기억도 당연히 없다. 선생이 특별한 선사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학생에게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다.


마치 빛을 방사하여 동식물들에게 혜택을 주는 태양의 존재 방식처럼 말이다. 이런 존재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선물의 원초적인 모습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어머니는 발가숭이에게 무상의 증여를 베풀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유별나게 지혜롭고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다. 핏덩어리로 세상에 나온 자식과 어머니와의 존재 격차가 최고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용서를 뜻하는 한자 서(恕)의 옛 형태는 㣽라고 한다. 철저히 무력하고 어엿븐 이를 처음 마주했던 그 여자의 마음, 그것이 바로 용서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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