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상 중에는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사례가 많다. 더구나 저자가 출옥하여 유명세를 얻으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많다. 저자는 죽고 그 생각만 출옥하여 세상에 알려진 경우인 것이다. 그 경우 감옥은 저자의 생각이 성숙하는 마지막 장소라 할 수 있다. 대개는 그곳에서 생각의 결정체가 형성된다. 하지만 그렇게 성숙한 생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소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우리는 아직도 윤동주가 일본의 감옥에서 죽어가면서 기록했다는 시편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그 무렵 윤동주의 시적 성숙도가 뛰어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척 안타까운 손실이라 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감옥에서 작성된 생각의 기록들이 실시간으로 감옥 바깥으로 알려진다. 몸은 비록 감옥에 갇혔어도 생각만은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대개는 서신 교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검열관의 손을 거친다는 한계가 있다. 이보다 운이 더 나쁘면, 저자 사후에야 그의 생각이 감옥의 담을 넘게 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그러하다. 한일강제병합 직전 조선의 초대 통감을 암살하고 감옥에 갇혀서 작성한 것으로, 거사의 동기를 알 수 있게 하는 저서이다. 안중근의 정치사상은 감옥에서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서양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이유로 감옥에 갇힌 본회퍼(Bonhoeffer) 목사가 대표적이다. 세인들은 그가 목사로서 통치자를 암살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생각하고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다. 물론 그의 기록이 서신 교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 공간에서도 그는 꾸준히 시를 쓰고, 신학적 사고를 다듬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옥중서신은 지금도 그 사고의 독창성과 실험정신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70-80년대에 본회퍼는 목회자라기보다는 저항사상가로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물론 지금의 [옥중서신]은 그의 서신을 보관했던 절친 베트게(Bethge)가, 부모와 약혼녀에게 보내어진 서신까지 포함하여 출간한 것이다. 하지만 본회퍼는 특별히 베트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진전된 사고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만 말하려네. 하나님에 대해 “비종교적으로” 말하려면, 세상의 무신성(無神性)을 어떤 식으로든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곧바로 폭로하여, 참신한 빛이 세상에 비쳐들도록 말해야 하네. 성년이 된 세상은 무신성이 훨씬 강하다네. 바로 그 때문에 성년에 이르지 못한 세상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지도 모르네.
놀라운 것은 자신이 암살하려 했던 히틀러, 그가 집권하고 있는 당시 유럽 사회의 광기를 가리켜서 그가 “성년이 된 세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다. 이제 인류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이제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모든 중요한 물음들에 제힘으로 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신 없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틀러와 같은 정치적 독재자의 출현, 그리고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적 물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화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세속화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중세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것은 어린아이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의 사고는 여기에서 더욱 과격해진다. 목회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된다. 즉,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신은 이제 세상에서 스스로를 밀어내고, 인간이 신 없이도 삶을 영위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신은 이 세상에서 무력하고 연약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통해서 어른이 된 인간을 돕는다는 신의 모습, 이것이 감옥에서 성숙한 본회퍼의 생각이다. 어른이 된 세상에서 신은 더욱 멀어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역설적 사고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 신에게 다가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타인을 위한 인간’이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는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타인의 고난을 같이 슬퍼하고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다. ‘타인을 위한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과거의 종교적 인간을 대체한다. 위급할 때만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주는 기계장치로서의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을 상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타인을 위한 인간’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한 인간’의 맞은 편에 있는 또 다른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우매한 사람’이다. 우매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만 완전히 만족하며, 감정이 상하면 쉽게 공격성을 띤다. 그래서 그는 ‘우매함’이란 ‘사악함’보다 위험하며, 백약이 무효하다고 말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자기가 우매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우매한 사람과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자신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배하는 표어들 또는 구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표어들과 구호들이 그를 호리고 현혹하여, 그의 본성을 악용하거나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줏대 없는 도구가 됨으로써, 우매한 사람은 온갖 악을 저지름과 동시에 그것이 악행임을 깨닫지도 못한다.
오늘날 이 신실한 목회자의 철저한 반성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회퍼는 감옥 바깥에 있는, 어른이 된 세상과 대화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생각의 감옥으로 자진해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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