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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 김보슬

“거기에 가시면, 단지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세요. 인생의 어느 부분은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흘러도 되지 않을까요?”

“예전에 말이야. 회사에서 흔히 보았던 서류함들은 이렇게 나뉘어 있었어, 기결, 미결, 보류의 세 가지 분류로. 기결은 이미 처리된 사안, 미결은 이제부터 살펴보아야 할 사안을 말하는 건데, 가장 재미있는 서랍이 바로 보류함이야. 검토 후 처리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넣어두는 곳이지. 기결함으로 직행하지 못한 서류들이 그곳에서 대기하는 거야. 삶에서 제일 필요한 장소가 아닐까. 우리 마음에도 보류함이 있으면 해.”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 있어요. 기다리는 대상을 마음에 오래 두고 곰삭히면 아름다운 것이 되곤 해요.”

시간은 대개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시간이 늘 바라는 것 이상으로 주어진다. 기다림을 잘 해낸 적이 있던가. 대상을 보류함에 넣어두고 그마저 망각한 채 표표히 시간이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다림이 어떤 것이냐는 대화에서, 사람들은 앞선 인용처럼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냈다.

열여섯 살이었던 나는 독일 문학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에 심취해 있었다. 그 해 내가 자라던 고장에서 국제연극제가 열렸고, 친구와 단 둘이 개막전야제를 보러 갔다. 각국에서 온 퍼포머들이 노천 무대에서 노래 부르고, 서로를 소개하고, 공연 홍보도 했다. 해외에서 온 공연을 보는 것도, 연출자와 출연자들을 생생하게 보는 것도 신기했을 뿐더러, 강변 공원의 가을밤을 강바람, 풀냄새,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어서 기분이 들떴다. 그때 키가 큰 한 소년이 무대에 올랐는데, 헤세의 <지와 사랑>의 주인공 ‘골드문트’를 떠오르게 했다. 일순간 내 머리 속에 ‘아! 골트문트!’ 하는 외침만 울릴 뿐이었다. 젊은 학자의 모습으로 지(知)를 상징하는 ‘나르치스’와 방황하는 예술가 모습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골드문트’가 나오는 그 <지와 사랑>을 탐독하고 난 뒤였다. 나의 귀가를 기다릴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집에 전화를 하려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 소년이 나보다 앞서 줄을 서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까?’

[사진 1. Narziß und Goldmund, Hermann Hesse, 1970 Fischer edition]

망설이다 입을 떼지 못한 사이, 그는 통화를 마치고 떠났다. 나도 집에 전화를 걸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무심히 시선이 향한 곳에 바로 그가 앉아있었다. 내 자리는 객석에서 앞쪽이었는데, 그는 맨 뒤쪽에 있었다. 이번에는 꼭 말을 붙여 보고 싶어서 친구가 있는 내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가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고동쳤다. ‘골드문트가 여기, 내 앞에 있다!’ 그때 할 줄 하는 외국어는 영어뿐이었는데, 그마저 서툴렀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프라네(Frane)였다. 영어를 곧잘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였고, 크로아티아에서 온 극단의 최연소 마임배우이었다.

며칠 후 그의 공연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 전야제에 함께 갔었던 친구와 동행했다. 전후(戰後)의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그린 무언극(無言劇) <시카다스의 침묵>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대기실로 그를 찾아갔다. 내가 아끼던 영화 포스터랑 오는 길에 산 장미꽃을 선물하고, 그가 집에 돌아간 뒤에 내가 편지를 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흔쾌히 주소를 적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가슴 떨려서 로비로 돌아온 후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인사를 하러 그를 찾아가겠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냥 돌아가자고 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날 낼 수 있는 용기를 이미 다 끌어다 썼기 때문이었고,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아는데 한 번 더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시니컬한 생각 때문이었다. 내 수첩에 그가 하늘색 잉크로 적어준 주소를 오래도록 간직했다.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5년이 흘러, 대학교 2학년 여름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를 거쳐 크로아티아로... 혈혈단신 혼자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 열차로 자그레브(Zagreb)에 내려 버스를 타고, 다시 열차를 타고, 풀라(Pula)라는 해안도시로 이동했다. 내가 목적한 곳은 수첩에 하늘색 잉크로 적혀있던 그 주소였다.

동구권 거리, 도로명과 행정구역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즘처럼 휴대폰에서 구글맵을 보면서 길을 찾던 시절이 아니다. 나침반과 지도, 행인에게 묻는 것이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전부였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그 주소에 당도했을 때, 텃밭에서 한 노인이 잡초를 뽑고 있었다. 바디랭기지로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프라네를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는 역시 바디랭기지로 “응, 집안에 있어. 불러줄까?”라고 되물었다. 역시! 거기가 그가 사는 집이었다니! 중학생이던 그때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길 건너에 맥주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다시 몸짓으로 “요 앞 맥주집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세요.” 했다.

[사진 2. 풀라의 거리, 사진 제공_김보슬]

거기서 생맥주 반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마른 목을 축였을 때, 프라네가 등장했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알아봤다. 좀 전의 그 노인은 프라네의 조부였다. “마침 할아버지 생신이야. 친지들이 모여 있어. 같이 파티 하자!” 그렇게 그의 집에 초대되어 음식도 나누어 먹고, 프라네의 방도 구경했다. 내가 보낸 편지들을 받았냐고 묻자, 그간 간직해 둔 그것들을 전부 보여주었다. 내게 답장도 보냈다고 했는데,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로마제국의 영향이 남아있는 그 도시의 콜로세움에서 그날 밤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나쁜 교육>이었다. 대사는 스페인어, 자막은 크로아티아어로 돼 있어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우리와 함께 간 옐레나(Jelena)가 친절하게 내게 귓속말로 통역을 해주었다. 프라네의 여자친구 옐레나. 사실, 나는 그 둘의 데이트에 따라갔던 것이다. 그에게 애인이 있어서 실망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5년간 수차례 마음속에 그리곤 했던 프라네는 이미 오랫동안 나의 ‘골드문트’였기 때문이다. 가슴이 콩닥대는 것 이상의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사진 3 풀라의 콜로세움, 사진 제공_김보슬]

[사진 4. 풀라의 콜로세움, 사진 제공_김보슬]

풀라에서의 그 여름밤이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우리 셋은 지금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좋은 친구들을 얻은 것은 기나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닐까. 꾸준함이 우리를 연결해 준 것이리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편지를 쓰며 영작 실력을 키운 시간, 골드문트를 꿈꾸던 시간,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시간은, 내가 드물게 잘 참아 낸 시간이었다.

참는 것은 ‘화나지만 내가 참는다!’ 또는 ‘식욕을 참는다’ 할 때처럼 충동을 애써 억제하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할 때처럼 속도가 더디고 성에 안 차는 것을 묵묵히 기다려 주는 걸 뜻하기도 한다. 나는 사랑이 참는 그 방식으로, 참다운 참기에 참여해 볼 요량이다. 기다림에 서툰 자들이여. 0과 1만 있거나, 직진과 후진만 있는 마음을 떨치고, 보류함을 마련할 것. 그리하여 신산한 삶을 향해 가슴을 열어젖힐 것을 권한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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