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위선은 같은 것일 수 있다 / 김동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들이 과거보다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최근 사례를 꼽자면, ‘서현역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2023.08.03)’이 있는데, 서현역 앞에서 차량으로 인도를 질주해 사람들을 치고 난 후 백화점으로 들어가 흉기를 휘둘러서, 총 14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 있었다. 피의자인 22살 최 모 씨는 대인기피 증세로 치료를 받았고 ‘조현성 인격장애’를 진단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게 된 사회‧심리학적 이유를 살펴보아야겠지만, 필자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싶다. 말하자면 ‘짜증과 분노 그리고 위선’이라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 사건을 살피고 싶다. 근사한 학술적 분석은 해당 전문가들이 어련히 잘해 줄 테지만, 대개 그런 분석은 한갓 분석에 그치고 만다. 예를 들어 사회학적 접근은 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야만 하는 거창한 일이어서 마냥 멀게만 느껴지고, 의학적 접근은 질병이 일으킨 일이니까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기에, 무력감만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짜증, 분노, 위선은 우리 누구나 쉽게 접하는 사안이기에, 자신과 주변인들의 모습을 점검해 실천할 수 있다는 작은 장점은 있을 것이다.
짜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일이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주변인에게 감정(대개 화) 섞인 말을 내뱉거나 행동으로 불만을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길게 줄을 서 있는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사소한 문제로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랫동안 대기하던 사람들은 짜증이 날 것이다. 분노는 짜증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분노는 자기 존재가 거부된다(심지어 침해당했다)고 느껴질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멸시나 모멸감일 수 있고, 부당하게 위협당하는 데에서 오는 감정일 수 있다. 짜증이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분노는 큰 규모의 자기 상실에 직면해 발생하는 것이다. 짜증이 소소한 사안들에서 일어난다면, 분노는 좀 더 심각한 일에서 일어난다.
분노에는 공적인 사안에서 느끼는 소위 공분(公憤)이라는 것도 있다. 공분이란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 낸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과거 세월호 사건이라든가 이태원 참사 같은 일들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나 공적 기구의 무능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당연히 작동해야 할 시스템이 멈춘 것을 보면 누구든 자연히 화가 치민다.
그런데 정말 짜증과 분노는 쉽게 구분될 수 있을까? 칼로 무를 베듯이 쉽게 나누기는 어렵다. 짜증 난 표정과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이 어느 정도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짜증보다는 분노가 (게다가 공분이) 더 공감을 얻는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현실에서 이것들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 ‘개인의 감정’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통상 집단주의 성향의 동양보다 개인주의가 더 강하다고 평가되는 서양은 분노를 높게 평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서양 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런데 과연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그렇게 상찬할 만한 것일까?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두 가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자기 몫으로 주어진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빼앗아 간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절친한 전우였던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 의해 살해된 일이다. 사실 두 가지 모두 짜증이라 말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자기 뜻대로, 전리품을 얻지도 못하고 친구가 살아남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 정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는 당대 관행의 분배 정의에 위반되고 후자는 전쟁이라는 공동체의 중대 사안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분노 또는 공분으로까지 상찬된 것이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도 짜증의 일종으로 보인다. 여자를 전리품으로 삼은 것이라든지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살육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짜증과 분노, 심지어 공분마저 그다지 값진 정념은 아닐 수 있다. 모두 과도한 자기애와 연루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진솔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지 못해서 생겨난 감정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빛나는 심리학적 통찰을 보여준 철학자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분노란 위선의 수동적 양태에 불과하다. 자기를 침해했다는 판단에서 유래한 분노와 실재보다 더 선한 존재로 자기를 가장하는 위선이 실상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둘 다 그릇된 자기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위선은 능동성에서 시작되고, 분노는 피동성에서 시작된다. … 위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고,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선인 것이다. 양자는 모두 내면성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둘 다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위선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써 끝난다. 왜냐하면 이때 위선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분노는 그것이 제거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위선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분노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그를 분노 속에 머물게 하고 있는 뿌리 깊은 능동성을 통하여 감수성은 어떤 다른 것으로 화해 버리고 있고, 그것 때문에 타인에 대하여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말한다면, 과거 학생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권력의 상층부에서 기득권을 행세하고 있다. 기층 민중의 열악한 생존조건에 분노하며 혁명을 꿈꾸었던 순결했던 영혼들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조금씩 세상에 물들고 현실과 타협한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키에르케고어의 말대로, 그들의 분노는 애초부터 위선의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선과는 동떨어진 진짜 자기를 능동적으로 감추기 위해서 사회적 불의가 발생할 때 수동적으로(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그래서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요컨대 짜증과 분노, 그리고 그것의 또 다른 민낯인 위선은 모두 자기 인식의 실패에서 유래한 정념들이기에 위험한 것들이다. 현대인의 삶의 구조가 자기 인식에 원천적으로 적대적이기에 이유 없는 분노와 짜증들이 폭발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소위 ‘분노조절장애’를 막는 방법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와 함께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데에 있다. 그 위에서 삶의 구조를 리모델링하는 실천에 있다. 진부하게만 들리는 자기성찰의 길은, 결코 꽃길이 아니다. 길의 진입로 주변만을 어슬렁거렸던 사람에게만 낯익고 진부할 뿐이지, 일단 길에 들어서면 진부함/새로움을 평할 만큼 한가롭지가 않다. 심지어 그 점잖은 칸트마저 자기인식의 여정을 “지옥 여행”이라 표현하지 않았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