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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마블 게임과 실학의 문명사 / 노관범

중학교 다닐 때 놀았던 보드 게임 하면 역시 씨앗사의 부루마블이다. 놀이판의 노랑, 파랑, 보라, 빨강 네 구역 도시 지권을 사서 호텔을 짓고 상대 말이 도착하면 이용료를 받아 재산을 증식하는 놀이였다. 길목에 호텔 쌓아두고 상대의 파산을 획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놀이는 세계지리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값싼 노랑 구역에는 타이베이, 홍콩, 마닐라, 싱가폴, 카이로 같은 도시가 있었다. 값비싼 빨강 구역에는 도쿄, 로마, 파리, 런던, 뉴욕 같은 도시가 있었다. 구역 위계가 자별함을 놀면서 익혔다. 지금 와서 보면 1980년대 세계 경제와 냉전 질서의 탐구에 도움이 되는 문화사 사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 국가 중국과 베트남의 도시는 노랑 구역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유럽 도시인데 독일 베를린은 분단의 장벽 때문인지 저만치 파랑 구역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 무렵 한국 가수 김성희의 노래 <세계는 지금>을 들으면 ‘세계의 젊은이’는 서울과 함께 ‘뉴욕, 파리, 런던, 도쿄’에서 살았다. 빨강 구역에 있는 도시들이었다.

     

언젠가부터 빨강 구역의 세계에 갇힌 시야에서 벗어나 노랑 구역의 세계에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이집트를 알아볼 일이 있어서 근대 한국의 세계지리서에서 이집트를 찾아보았다. 최한기 『지구전요』(1857)와 헐버트 『사민필지』(1895)는 모두 갑오개혁 이후 조선의 세계지리 교육 교재로 쓰였는데, 전자는 아프리카 북부 지역으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세 나라를 소개했고 후자는 아프리카 지리에서 이집트, 모로코, 마다가스카르를 별도의 표제어로 뽑아냈다. 특이한 점은 『지구전요』는 이집트를 현지식으로 ‘맥서’라고 부르고 『사민필지』는 서양식으로 ‘애급’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급기」에 익숙해서 ‘애급’은 유년기부터 알았지만 ‘맥서’는 처음이라 신기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현지의 ‘맥서’를 서양의 ‘애급’으로 불러왔으니 이것도 오리엔탈리즘 아닌가.

     

세계지리서를 보고 얻은 깨달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위원의 『해국도지』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아편전쟁 패배의 충격을 딛고 중국 지식인이 세계지리와 군사기술의 지식을 집성한 서학서였다. 이 책에 얽힌 에피소드.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기특하게도 이 책에 나오는 미국 정보에 기반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편전쟁 30년 후 신미양요 때면 『해국도지』는 철지난 책은 아니었을까. 『해국도지』 미국 지도와 멕시코 지도를 보면 미국은 아직도 캘리포니아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나오는데 이것은 아편전쟁 이전의 상황이고, 이와 달리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을 마치고 이미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어 있었다. 혹시 『해국도지』가 조선의 미국 인식을 오도시킨 측면은 없었을까?

     


19세기 조선 사회에 들어온 세계지리 책이 『해국도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해국도지』는 아편전쟁 이후 조일수호조규 당시(1876)나 청일전쟁의 종결 당시(1895)에도 계속 간행되어 반 세기 이상 영향력 있었지만 이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 뮤어헤드의 『지리전지』도 조선에 전파되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아시아 지리 소개 방식인데 맨 먼저 ‘중화국지’를 배치하고 이어서 ‘만주지’, ‘몽고지’, ‘신강지’, ‘서장지’를 배열한 다음, 다시 ‘고려국지’, ‘동양군도지’, ‘안남국지’, ‘섬라국지’ 이하 아시아 여러 지역을 덧붙였다. 일본은 별도의 표제 항목으로 잡지 않았고, ‘동양군도지’의 세부 구성을 보면 ‘일본국’과 함께 ‘유구국’, ‘살가련’(=사할린), ‘대만도’, ‘팽호도’가 있었다.

     

이 책은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 흥미로운 비교 지점이 있다. 초판(1853)의 ‘고려국지’를 보면 이 나라의 정치는 임금이 자주(自主)하지만 일본에도 청명(聽命)하고 무역은 일본, 중국하고만 통상한다고 기술했다. 개정판(1883)의 ‘고려국지’를 보면 정치는 임금이 자주하지만 중국에도 청명하고 무역은 일본, 중국하고만 통상하는데 금년 본국이 ‘대영국’, ‘화기국’(=미국)과 화약을 수립하고 통상처를 정했다고 기술했다. 초판은 무엇에 근거하여 한일관계를 이렇게 기술했고 개정판은 무엇에 근거하여 한중관계를 이렇게 기술했는지 근거를 알고 싶다. 다만 조선과 서양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실상을 확인함으로써 초판의 서술이 수정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지리전지』 개정판이 출판된 그 해 조선 정부는 박문국을 두고 『한성순보』를 창간하였다. 이듬해 『한성순보』에 기재된 「구라파사기」는 한국인이 매체에서 접한 최초의 일반 서양사가 아닐까 하는데 한국에서 간행된 서양사 역사책이라면 청일전쟁 이후 조선 정부의 한글본 『태서신사』도 있고 러일전쟁 이후 현채가 편역한 국한문판 『만국사기』도 있지만 한문에 능숙한 독자라면 이미 한성순보 발간 무렵부터 서양사 한문책을 읽고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영국 통사를 서술한 『대영국지』, 러시아 역사와 풍속을 서술한 『아국강계풍속지』, 영국과 러시아의 서아시아에서의 대립을 알려주는 『영아인도교섭서』 같은 서학서가 이 무렵 중국에서 출간되어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한성순보』의 「구라파사기」는 근대 한국의 서양사 지식의 초창기 역사를 논할 때에 중요한 문헌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글에서 조선후기 실학 지식의 형성에 관한 중요한 힌트를 얻는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역사는 귀족 세력의 문벌의 폐해와 구교 세력의 공리의 폐해가 점차 사라지고 문명이 진보하는 시대로 서술되었다. 즉, ‘신교의 금법이 누그러진 후에 기술이 밝아지고 지각이 증가하여 부강함으로 일변했다. 귀족과 구교의 권력이 이때부터 쇠퇴하여 문벌을 숭상하지 않게 되고 교권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실리를 따르고 실사에 힘쓰기를 약 2백년간 하였다. 처음 공을 물리치고 실을 취하며[劈空取實] 구를 혁파하고 신을 창조하여[革舊刱新] 귀족 문벌이 폐지되고 구교에 대항하여 만사를 경장’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서양사의 추세가 실리, 실사, 취실, 창신의 방향에 있었다면 자연히 동시기 한국사는 이와 비교해 어떠했을지 생각하는 습성이 자라지 않았을까? 대한제국 말기 『황성신문』이 왜 그토록 한국에서의 종교개혁을 갈망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 실학 연구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역사학자 천관우가 일찍이 조선후기 실학을 종교개혁에 비견하여 ‘개신유학’(Reformation)이라 언명했다는 사실이다. 『한성순보』 「구라파사기」의 서양 근세사 이해 방식이 그대로 조선 근세사 이해에 투영되어 종교개혁 이후 서양사에서 성취한 ‘실의 문명사’라는 역사 감각이 천관우의 관점에 스며든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조선후기 실학이라는 사고의 원천은 ‘실의 서양사’일지 모르겠다.

     

서두에서 부루마블 게임의 세계 도시 구역을 논하며 빨강 구역과 노랑 구역의 위계를 논했다. 조선후기 실학에 관한 영감을 주었을 ‘실의 문명사’란 말하자면 부루마블의 빨강 구역에서 보는 유럽(+미국+일본) 근대사이다. 만일 부루마블의 노랑 구역에서 ‘실의 문명사’를 다시 설정한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될까? 조선후기 실학은 아시아의 시각에서 새롭게 상상될 수 있을까?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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