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치심의 문화 / 오문석

<국화와 칼>(1946)이라는 멋진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군사적 목적으로 미국 정부에 의해서 주문 생산된 인류학 서적이다. 비행기를 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자살특공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군들. 그들은 항복 대신 할복을 택하는 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이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지 인터뷰와 취재가 불가능한 상황. 루스 베네딕트는 불가피하게 각종 문서와 서류 더미 속에서 그 책을 완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적을 이해하겠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더구나 현장 답사 없이 제작된 인류학 서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일본인의 뇌구조가 궁금했던 사람들, 심지어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책을 통해서 일본인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책의 저자가 쓰고 있는 안경을 우리도 같이 쓴다는 단서가 붙는다. 착용감이 너무 좋아서 마치 안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신다면? 저자와 한 몸이 되었으니 축하할 일이다. 하긴, 저자도 일본인에 대한 편견에 오염된 온갖 자료 더미 속에서, 그러나 착용감이 좋은 안경을 끼고 그 책을 완성했던 것이다. 학자인 그녀조차도 모든 자료에 부착된 안경을 일일이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저자의 안경은 그 자료 뭉치의 안경들이 덩어리처럼 뭉쳐진 결과물이다. 매사가 그렇다. 카메라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영화를 즐길 수조차 없듯이.


그러나 안경을 벗어서 대물렌즈 위에 올려보자. 저자의 안경에서 두 개의 문화가 발견될 것이다. 죄의 문화와 수치심의 문화. 내면의 양심에 비추어 스스로 죄를 자각하는 (자율적) 문화가 있고, 타인들의 시선에 비추어 수치심을 자각하는 (타율적) 문화가 있다. 고대 서양에서부터 사용된 오래된 구분법인데, 저자에 의해서 그것은 서양과 동양에 각각 배당된다. 죄의 문화는 서양에, 수치심의 문화는 일본을 포함한 동양에 할당된다. 일본과 무관한 우리들도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문화를 생각하면 그럴 듯해 보인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수치심의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이 삶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욕먹지 않기 위해서,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다. 삶은 언제나 ‘파이팅(fighting)’의 연속이다. 새치기를 한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거대한 줄서기의 문화를 사수해야 한다. 기준은 공평해야 한다. 남과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남들이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소비하는 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못한 것은 밀려나는 치욕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를 외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진정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일까? 희한하게도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각자 서로 다른 길을 달리고 있다면, ‘더 빨리’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같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속도 경쟁은 필수적이다. 마치 8차선 고속도로 위에 차들이 가득 차 있지만, 샛길로 빠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고속도로가 빠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다른 길로 들어서면 ‘고속’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비용이 더 들더라도, 이상하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악착같이 고속도로를 고수한다. ‘다른 길’은 치욕의 길, 부끄러움의 길인 까닭이다.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이 부끄러운 꼴이 되는 것이다. 더러운 팬티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물론 산 자의 윤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윤리도 있는 법. 죽은 자도 자신의 죽은 몸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어서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작정하는 것은 산 자의 윤리이다. 살아 있을 때 죽은 몸에 대해 내려진 윤리적 결단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죽음이 삶의 문을 밀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수치심이 압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죽음에 직면하여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이 없다. 죽음의 세계도 삶의 세계의 연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내린 윤리적 결정이 그의 죽음까지도 지배한다. 치욕에 비하면 죽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군의 구축함을 향해 질주하는 그들의 전투기를 지배하는 윤리이기도 하다.


이런 수치심 대신 이런 부끄러움이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의 그것. 청년 윤동주의 시는 일본군 청년들의 자살 비행이 한창일 때 쓰여졌다. 수치심의 문화를 사수하기 위해 하늘을 날던 일본군의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식민지 조선의 유학생이 생각하는 “부끄럼”. 그 무렵 <국화와 칼>의 저자도 윤동주와 같은 하늘을 봤을 것이다. 일본 청년의 수치심과 청년 시인 윤동주의 “부끄럼”. 미국인 인류학자의 눈에는 같아 보일 수 있어도 그것은 분명 다른 부끄러움이다. 윤동주의 그것은 ‘고독한’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남들을 의식한 수치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루스 베네딕트의 구분에 따르면 ‘죄의 문화’에서나 발견되는 태도이다. 남들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부름에 충실한 삶의 자세인 탓이다. 그의 하늘에 걸린 십자가가 아마도 그의 내면으로 통하는 샛길의 통로였을 것이다. 동양의 작은 나라, 그 수치심의 나라에도 죄의 문화가 뿌리를 내린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 뿌리에서 자라난 부끄러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아니, 무언가가 없다. 말하자면 남들보다 더 빨리 가는 고속도로가 없다. 죽기보다 싫은 수치심의 압력이 없다. 모든 길이 자기의 길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열린 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치심의 문화를 상대화한다. 남들의 눈에 매인 노예적 수치심이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심문을 받는, “부끄럼” 많은 자유인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국화와 칼>이 읽힌다는 것, 더욱이 일본처럼 한국이 여전히 수치심의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먼 훗날 마침내 루스 베네딕트의 안경이 불편해지는 날, 그날 우리는 드디어 ‘다른’ 부끄러움에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반일(反日)의 첫걸음이다. 우리가 아직도 윤동주를 더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문석(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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