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산행(2): 산으로 간 예술가들 / 김보슬

앞서, 어떤 예술가들이 산에서 내려왔었다. 지질학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하산한 ‘빵산별원정대’가 베이커리가 되어 주택가 골목을 파고들었던 이야기를 접하였다.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예술가들로 눈길을 돌린다. 스튜디오나 공연장 바깥에서 산비탈을 오르는 어떤 이들.

춤 작품을 통해서 내가 알던 어떤 이가 아흔 번에 달하는 산행을 꾸준히 기록해 오고 있었다. 안무가 박호빈.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폐막식이 열렸던 강원도 평창 용평돔에서 그가 연출한 무대를 보았다. 관계자였던 나는 화려한 색상의 타이즈를 입은 출연자들이 공중에서 춤추고, 돔 전체가 꽁꽁 어는 추운 밤에도 리허설 중이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들은 ‘댄스씨어터 까두’, 박호빈이 이끄는 춤 창작 단체였다. 그후로도 그의 활동을 접하고는 있었지만 산에서 산으로 행보가 이어지는 중이라는 것은 다소 느닷없기도 했고, 그로 인해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 산행의 기록을 추적할 때마다 여든일곱, 여든여덟, 여든아홉, 아흔으로 기록은 계속해서 경신 중이었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봉우리>라는 오래된 가요의 가사를 떠올리며 인터뷰를 청했다. 그가 들려주는 표현들은 이상하게도 갓 입산하여 마시는 피톤치트처럼 상쾌했다. 자신이 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힘의 근원은 다름 아닌 ‘오래-머물러-있기’임이 틀림없었다.

나: 간략한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박(박호빈): 안녕하세요. 산 타는 무용가 박호빈입니다. 저는 멀티미디어 댄스 그룹 ‘댄스씨어터 까두’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오다, 2016년부터는 ‘제로포인트모션(Zero Point Motion)’이라는 프로젝트팀으로 변경하여 공연예술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차별 다장르 퍼포먼스를 지향하며 밑밥 프로젝트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맘으로 야산에서 명산까지 산이란 산은 몽땅 뒤지기 프로젝트’를 실행 중입니다.

나: 지금처럼 회차별 번호를 매기면서 산에 오르신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어떤 계기로 비롯되었나요?

박: 잘 나가던 무용단을 해체 후, 프로젝트팀으로 전환하고 나서였어요. 여태까지의 작업방식이나 창작에 임하는 자세가 마음에 안 들었고, 무엇보다도 무용단 운영 자체에 지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단체를 간소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프로젝트팀으로서 체질개선을 하고자 했는데 뜻밖에도 작업의 활로를 잃어버렸죠. 제작 여건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용수 섭외부터 제작팀 구성까지 무엇 하나 쉽지 않더라고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었어요. 결정적으로 2018년 산티아고 순례를 막 마치고 아르코(ARKO,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제작 공연에 참여한 후로부터 작품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더 신중해졌어요. 그렇다 보니 붕 뜨는 시간이 길어졌고, 몸도 맘도 혼탁해지면서 한동안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차에,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하이킹 에반젤리스트(Hiking Evangelist)’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의 일주일산(一週一山) 포스팅을 보았고 잔잔한 자극을 받았어요. 그래서 2018년 11월 19일 남한산성과 청량산을 방문한 것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대장정의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죠.

[사진 1. <마크툽> 박호빈 안무,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올해의 아르코 파트너’]

나: 산을 오르는 동안 가장 좋았던 산, 또는 순간은요?

박: 첩첩이 겹쳐지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 갖는 미학은 신묘하기 짝이 없어요. 마치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다 트랜스를 겪는 것과 같죠. 거기에 운무까지 한 몫 끼어들면 그냥 빨려듭니다. 그밖에 백두대간 첫 코스로 소백산 능선을 타는 도중 만난 무지막지 강풍은 잊을 수 없고, 생애 처음 7월 장마 기간에 감행하던 지리산 종주, 거기서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무제치기폭포를 맞닥뜨린 순간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어요. 두 차례의 한라산 종주 중 우연히 발견한 사라오름, 그 전에 비가 많이 와서 호수의 수위가 가득 올라 데크로 만든 산책로가 발목까지 잠기자 본의 아니게 물 위를 걷게 된 이상야릇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바라보는 새벽녘 북한산에서의 일출은 어느 일출에 비견해도 아름다움이 가득해요. 운무가 주변을 장악하면 어느덧 서울이라는 공간은 사라집니다.

나: 가장 도전적인 점은요?

박: 산행을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무위(無爲)자연의 경지가 아닐까 싶어요. 삶의 태도가 서서히 바뀌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가도,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그걸 지키기란 쉽지만은 않죠. 오히려 지키려는 의도 자체가 이미 무위를 벗어나기 때문이죠. 산을 타는 것이 좋아서 하는 것이고 즐거워서도 하는 것이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반대로 바쁘다는 핑계로 게을리한다면 그 모두는 무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죠. 산행을 지속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도 모르게 감행하고 있는 도전 아닌 도전인 셈이죠.

나: 저는 다리를 180도로 찢지 못해요. 하하.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분명히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 믿고 있어요. 몸은 그 자체로 거리를 가늠하고, 크기를 견주는 척도가 되니까요. 산을 느끼고 경험하는 몸은 그렇지 않은 몸과 비교할 만한 점이 있을까요?

박: 산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상황을 바꿉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심신의 건강에 좋아서만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응물자연(應物自然)! 산을 타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이럴 때마다 몸이 반응하면서 빠른 판단과 실행을 도출하다 보면 위기관리 능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변화에 응하고 그것을 주시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러면서 상황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 같아요.

나: 저도 산이나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좋아합니다. 번지점프도 두 번 해 보았습니다. 그때 한참 한국무용을 할 때였는데, 몸이 공기를 가르는 느낌을 극대화해 보고 싶었거든요. 과연 어마어마했습니다. 실내에서 팔다리를 휘저을 때 느끼는 공기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산과 춤, 이 둘은 선생님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만난다고 느껴지세요?

박: 산을 타는 것과 춤을 추는 것은 둘 다 스텝이 기본이죠. 때로는 모노톤으로, 때로는 리드미컬하게 타고 또 추는 거죠. 또한 특별한 것은 둘 다 명상의 세계로 저를 이끌어 줍니다. 타계하신 고(故) 김수악 선생님의 제자 중 노무현 정권 때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강금실 씨가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무용을 배웠었다고 밝힌 내용을 보고 상당히 고무된 적이 있었어요. “한국춤의 미학은 명상과 연결된다. 춤을 추다 보면 저절로 호흡이 배 밑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나중에는 발로만 춤을 추게 된다. 팔은 그냥 따라올 뿐이다. 동작이 아무리 빨라져도 머리는 맑게 비어 있다. 몸은 동적이고, 머리는 정적이다. 그래서 정중동(靜中動)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춤에 경륜이 묻어난다. 그래서 더 좋다.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통해 간결하면서 명료한 강금실 전 장관의 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 깊이 메모해 두었죠. 비단 한국 전통춤뿐만 아니라 모든 춤이 그렇죠. 산 타는 것도 흡사해요. 가부좌로 앉아서 하는 명상도 좋지만, 움직임 속에서 고요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 있겠어요.


[사진 2-10. 산행 중 촬영한 경관, 사진제공_박호빈]

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박: 코로나 여파로 ‘백두대간학교’ 동호회의 산행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루 속히 돌아가 백두대간의 종주를 마치고 싶네요. 그리고 이번 겨울에는 꼭 설악산에도 가고 싶고요.

나: 11월에는 저도 산에 가 볼까 합니다. 11월 등반자에게 무엇을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등반 코스, 산을 오를 때 어울리는 음악 또는 생각, 초겨울 산과 어울리는 음식, 산을 닮은 춤이나 책, 무엇이든지요.

박: 11월이면 단풍이 끝물이라 오색찬란한 향연을 즐기기엔 늦은 시기이지만 물을 끼고 있는 산이면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서울은 아차산, 두물머리 주변으로 검단산, 예빈산, 운길산의 수종사, 춘천은 드름산, 삼악산, 홍천 팔봉산을 추천해요. 아니면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들은 어디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서울 주변은 다 좋아요.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관악산, 삼성산, 인왕산, 북악산 등등.

등반 코스는 홀로 산행을 할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안정적인 코스를 미리 알아두고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더러 하행시 길이 안 보일 경우가 많아요. 저도 가끔 헤맵니다.

제발 산에 오를 때에는 자연이 주는 소리에만 집중하시기를요. 가장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공상은 절대 금물이구요. 하행하다가 발을 헛디뎌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두 눈 크게 뜨고 다니세요! (웃음)

그리고 산행 중에는 배를 채우지 마세요. 산속에서 장시간 움직여야 하는 경우에만 체력 고갈을 대비하여 간단한 비상식량을 준비할 것을 추천합니다. 공기 중에도 미네랄이 많아요. 최대한 숨을 깊게 쉬면서 신선한 공기를 흡입할 것을 권합니다. 음식은 내려와서 주변 음식점을 애용해 주세요. 저는 빈대떡에 막걸리, 도토리묵, 산채비빔밥이나 곤드레비빔밥을 좋아합니다.

산은 오르내리는 특성상 패턴의 차이가 있을 뿐, 기승전결이 분명합니다. 구조적으로 승무춤이 산행과 흡사하다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책 중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이 산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사진 11. 산행 중 한 컷, 사진제공_박호빈]

그가 산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본다. 현실에서의 보행과 인터넷에서의 스크롤 업/다운이 모두 인식의 대상 위로 시지각을 문지르며 일정한 자취를 남긴다는 점에서 어떤 유사성을 가진다고 생각해 보다가 그만, 아뿔싸! 냄새와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서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쯤 되니, 경기민요 소리꾼 채수현도 떠오른다. 2019년에 그는 ‘바위타령’을 부르면서 산을 오르지 않았던가. 나는 <경취를 즐기다>라는 제목을 달고 멋지게 양장된 도록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비록 현장에서 감상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신선함을 마음 속에 내내 간직했던 것이다.

(…) 작업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던 중에 지난 겨울 한 가지 물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요(民謠)’. 민요라 함은 백성의 노래. 백성의 노래이자 일상에서 불리던 노래인데 딱딱한 공간 안에서 들으려니 뭔가 그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 바위타령을 산기슭의 바위와 바람 사이에서 들으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은데…. 결국 수현 씨에게 던지고 말았습니다.

“수현 씨, 우리 산에 가볼래요? 민요를 산에서 들으면 얼마나 더 멋있겠어요!”

[<경취를 즐기다> 프로듀서 양윤희, 기획 노트 中]


[사진 12-15. <경취를 즐기다> 민요산행 2019년 9월 21일, 사진제공_문화오름]

먼저 살펴본 ‘빵산별원정대’도 남은 2021년 동안 다시 관악산에 오르기로 했다. 10월 20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 산행을 위하여 대원들을 모집 중이라고 한다. 관련 내용을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링크]

나도 11월에는 산에 올라야지. 그리고 당분간 산을 찾는 예술가들을 좀 더 찾아볼 계획이다. 오르고 나면 봉우리가 아닌 고갯마루에 머물고 마는, 흔하디흔한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면서도 그 안에 머물기에 여념 없는 자들을.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