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소유에서 묻는 소유로 / 오문석

한때 ‘플렉스(flex)하다’라는 표현이 유행한 적이 있다. 힙합 가수들 사이에서, 자신의 팔 근육이 유연하다(flexible)는 것을 과시하는 행위(=flexing)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질렀다’가 아닐까 싶다. 다만, ‘질렀다’의 대상이 평소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사치스런 물건의 소비와 그 과시를 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주체는 과시용 사치가 일상일 수 있는 재벌 3세가 아니다. 단 한 번의 사치를 위해서 나머지 일상을 희생해야 하는 평범한 청년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플렉스해버렸다’라는 단어에는 묘하게 피와 땀, 눈물이 섞여 있다.



그것은 청년들의 몸 만들기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특정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식단도 감수할 의사가 있다. 쇠라도 씹어먹을 수 있는 그 나이에 음식을 멀리한다. 안쓰러울 정도로 적은 양의 식사에 비해 운동량은 또 얼마나 심하던가. 심지어 피트니스 대회 참가를 위해 물도 마시지 못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들의 근육이 과시용이라 할지라도,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은 존중할 부분이다.


근육 만들기를 통해서든, 사치용 소비를 통해서든, 청년들의 과시적 행위에는 어떤 절실함이 묻어 있다. 그들의 행동은, 일테면,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스럽게,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청년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청년층의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에 비해서 청년층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도 많이 달라졌다. 한때는 청년 문화와 청년 운동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문화가 ‘라떼’문화, ‘꼰데’문화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지금 청년에 대한 기대보다 염려와 우려가 앞서는 옛날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한편, ‘플렉스’에 반대되는 현상도 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그것이다. 플렉스가 과시용 사치품의 소비를 뜻한다면, 미니멀리즘은 버리고 비우는 삶을 추구한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림살이를 단순화하는 긴축에 가까운 태도를 가리킨다. 최근 시중에는 미니멀리즘의 정신을 공유하고, 그 방법을 안내하는 책자들이 즐비하다.



버리고 비우는 미니멀리즘은 언뜻보기에 소유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소유에 대한 어떤 태도의 변화를 유도한다. 소유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 과연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 그 가치를 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감하게 버려질 것이다. 결국 자기의 주변에는 최애 물건만 남게 된다.


미니멀리스트에게는 단순히 많이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이 소유할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또한 강박적으로 무한 소유의 욕망에 시달리던 과거 세대와 달라지는 부분이다. 미니멀리스트는 소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저 물건이란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다. ‘묻지마 소유’가 아니라 ‘묻는 소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빼앗길 가능성을 지닌 것이므로, 그런 위험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더 소유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진 것을 빼앗길세라 이웃의 공격적 의도를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그런 공격을 막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더 강해지고, 더 공격적 및 방어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소유 중심의 사회는 타인에 대한 공격과 방어만 있는 사회이다. 타인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해서 경쟁해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경제적 이득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더 많은 애정이든, 소유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의 감정이 중요해진다. 더 많은 소유가 곧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 즉 ‘묻지마 폭력’도 소유 중심 사회의 이면인 것이다. 그들의 소유가 이미 ‘묻지마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렉스와 미니멀리즘은 ‘묻는 소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이 비록 사치품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소유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활비를 아껴서라도 소유해야 할 이유에는, 일종의 자기 위안과 그동안의 인내에 대한 보상, 그리고 존재 증명의 뜻도 포함된다. 무작정 더 많은 소유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소유하더라도 가치 있는 물건에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전체 소유의 양은 줄어들겠지만, 최애의 물건들로만 집안을 채우겠다는 미니멀리즘의 정신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에리히 프롬의 공식에 따르면, 소유가 줄면, 존재는 많아진다. 플렉스와 미니멀리즘은 갈수록 존재감이 덜해지는 청년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은 물건들의 무한 축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적은 수의 물건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시에 나오는 나무의 존재 방식을 닮았다. 여기에서 꿈꾸는 나무, 그것은 청년이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정현종, 「사물의 꿈1」

오문석(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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