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직후인 9월에 일본 도쿄의 게이오기쥬쿠(慶應義塾, 이하 ‘게이오’) 대학으로 떠나면서 7년에 이르는 긴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1년만 교환학생으로 다녀올 계획이었는데 이후 교토로 옮겨 교토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들어갔고, 이를 마친 뒤 다시 미국으로 옮겨 서부의 버클리대학에 잠시 머물다 동부의 하버드-옌칭연구소에서 초빙연구원으로 지내고, 마침내 2009년 9월에 교토대 문학박사(485호) 학위를 수여하면서 7년에 이르는 긴 유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일본 유학은 2002년 9월부터 1년간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게이오대 생활과 2003년 9월부터 교토대 문학연구과 중어중문학 전공 연구생과 대학원생으로 머물렀던 시기로 구분된다. 그 시간들 동안 나는 서지학과 문헌학, 출판문화사 분야의 연구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기본을 다질 수 있었다. 여러 학교와 연구소 등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다양한 수업과 학술 경험을 통해 많이 배웠고, 한중일 동아시아 고서의 풍요로운 자원을 마음껏 보고, 느끼고, 즐기던 시기였다. 그때는 나름대로 열심히 자료들을 찾아다니며 고서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왜 그토록 혜택 받은 환경을 더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사람은 역시나 늘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는 동물인 걸까.
일본 유학 시절 게이오대와 교토대 등의 대학원 수업에 참여하며 서지학과 문헌학의 기본을 공부하고, 여러 대학과 국공사립의 도서관ㆍ박물관ㆍ사찰 등에 소장된 한중일의 고서들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고서를 직접 만져 보면서 그것을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힌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중에서도 먼저 게이오대와 교토대 등에서 배운 책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수업들에 대해 적기로 한다.
게이오 대학 사도문고의 서지학 수업
도쿄의 게이오 대학에는 ‘사도문고(斯道文庫)’라는 동양고전연구소가 있다. 이곳은 특히 서지학 전문 연구소로 명성이 높다. 일본 고전 연구의 주요한 방법론 중 하나는 기록을 담은 자료 그 자체에 집중하는 문헌학인데, 여기에서는 특히 책의 판본ㆍ종이ㆍ장황(제본)ㆍ인쇄 상태 등 물질적 형태에 집중하는 ‘형태 서지학’에 특화된 연구를 펼치고 있었다.
이 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당시 교환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 교환 학생들과 주로 어울렸고 게이오대학 문학부 대학원생들과는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서를 좋아하고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중국인 친구가, 문학을 전공하는 게이오대 대학원생을 소개하고, 그런 식으로 건너서 사도문고에까지 닿게 되었다. 그 막연한 소개를 통해 어느 날 드디어 사도문고를 방문하였다. 지금도 문고의 육중한 문을 밀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떤 사람이 창을 등지고 선 채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분이 바로 지난 호에 소개했던, 게이오대 도서관 소장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학 경전 논어소의 연구책임자 스미요시 도모히코(住吉朋彦) 교수이다.
스미요시 교수는 무로마치(室町) 시대 교토의 불교 사찰 문헌인 ‘고잔판(五山版)’에 가장 자세하지만, 그즈음에는 조선과 중국의 고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일본 한적의 해외 전래 상황이나 조선과 중국의 책들이 일본에 들어온 상황 등 동아시아 서적 유통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 고서가 주전공이면서 이제 중국과 특히 일본의 고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를 만났고, 이렇게 같지만 또 다른 방향의 관심을 갖고 있던 나와 스미요시 교수는 2002년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학회 및 세이카도(靜嘉堂)문고와 와세다대학 등 한국 국외소재문화재 재단의 일본 소재 한국고전적 조사 프로젝트 등을 함께 하며 꾸준히 친분을 맺고 있다.
사도문고에서 나는 고서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체험을 하였다. 그곳의 대학원생 대상 서지학 세미나에 참여하고, 게이오 대학 귀중본 서고에 있는 ‘와타나베 도우수이(渡邊刀水) 문고’의 한국의 고전적을 조사한 일이다.(노경희, <일본 서고 기행 ③-게이오 대학교의 와타나베(渡邊) 문고와 조선통신사 자료>, <<문헌과해석>> 62, 문헌과해석사, 2013)
사도문고의 서지학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의 실물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내용만이 아닌 외관의 형태까지 꼼꼼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특히 동일 제명의 동일 판본으로 보이는 책들도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면서 축자 비교하며 그 책들이 실제 동일판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중시했다. 에도(江戶) 시대 판본들의 경우 해적판(모방판)이 발달하여, 간기나 판권지의 기록이 일치하더라도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같은 판본이 아닌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해적판과 원본은 같이 놓고 보면 그 차이점이 곧 드러나는데 가끔 완전히 흡사하게 만든 것들이 있어 구분이 어렵기도 하다. 이 경우에는 한 장씩 넘기면서 판곽의 형태나 개별 글자들 간의 미세한 차이들을 찾아내어야 한다.
중국 서적도 명청 시대에는 이러한 해적판이 많이 나왔기에 세밀하게 비교할 필요가 있다. 해적판의 등장은 민간의 상업 출판 발달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경우 관청 및 서원과 가문(문중) 중심의 제한된 범위로만 출판이 이루어졌고 상업 출판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이러한 해적판의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에 간기나 서발문에 적힌 사실을 의심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의 명청 시대나 일본의 에도 후기 간행물들의 경우에는 간기가 같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전혀 다른 판본일 가능성이 많기에 이 부분을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료를 꺼내 놓고 하나씩 비교하면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또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글자들을 하나하나 비교하고 목판의 모서리나 판심 주위의 선들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던 많은 정보들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원본과 비슷한 해적판이라 해도 자세히 보면 어디선가 분명히 미세하게 다른 지점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여러 번의 인쇄로 목판이 닳거나 탈락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차이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판이 다른 데서 비롯한 확실한 차이였다. 어느 시점부터 그 차이가 신기할 정도로 뚜렷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실물을 보는 사람만 발견하는 것이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아주 미세하지만 큰 차이점을 발견할 때의 그 희열감은 앞의 과정이 지루하면 지루할수록 더 커지는 법이니, 어쩌면 이런 ‘짧은 만남 긴 지루함’이야말로 형태서지학의 가장 큰 묘미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토대학교 문헌연구과 대학원의 고증학 수업
1년의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중국 고전학을 공부하기 위해 교토대의 중어중문학과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교토로 가서 처음 반년은 연구생으로 지내다가 2004년 박사 과정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교토학파의 중국학 연구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교토대 중국학 연구의 가장 기본은 ‘고증학’과 ‘문헌학’에 있던 만큼, 그 연구의 시작점은 자료의 원본을 확인하고 전통적인 공구서 활용법을 익히는 일이었다. 2004년 중어중문학 전공 대학원 시절에 청대 고증학자인 왕념손(王念孫, 1744~1832)의 <독서잡지(讀書雜志)>를 강독하는 수업이 열렸다.
담당 교수는 중국어학 전공의 히라타 쇼지(平田昌司) 선생님, 강좌 제목은 <독서잡지 회남내편(讀書雜志淮南內篇)>이었다. 강의 해설에 따르면 ‘왕념손의 <독서잡지> 중에서 「회남홍열(淮南鴻烈)」 내편(內篇)을 다룬 부분을 읽는다. 전년도에 이어 <아키하기첩(秋萩帖)> 자료의 종이 뒷면(紙背)을 참조하면서 <병략편(兵略篇)>을 다룬다.’라고 하였다. 텍스트와 참고문헌으로 왕념손의 <독서잡지> 이외에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가 제시되었다. 또한 중국어음운사(中國語音韻史, 上古音/中古音)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교토대학대학원문학연구과, <학생편람(강의제목)>, 2004, 26쪽)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독서잡지>에서 <회남자>를 인용한 구절을 해석하여 발표하였다. 이는 청나라 고증학 방법을 이용해서 자료를 읽고 해독하는 것으로, 학생들에게는 다음의 준비가 요구되었다.
* 회남자의 현전하는 역대 모든 이본들을 대조해 원문 글자의 출입을 확인한다. 여기에는 일본에만 전하는 당대(唐代) 필사본까지 포함되었다. 당사본(唐寫本)의 경우 교토대에 원본이 없어 영인본을 참고하였지만, 다른 원본들은 모두 문학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어 직접 자료를 찾아 확인하는 작업이 학교 안에서 가능하였다.
이때의 당대 필사본은 곧 아키하기첩(秋萩帖)에 필사된 자료를 말한다. 아키하기첩은 초서체 가나(草仮名)로 48수의 와카(和歌)를 쓴 법첩인데 특히 서체와 아름다운 종이 덕분에 일본 서예사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자료의 2번째 종이부터 권말의 21번째 종이 뒷면에 회남홍렬병략간고(淮南鴻烈兵略間詁) 제20(第廿)이 필사되어 있었다. 이 글씨는 당나라 때의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이에 현전하는 회남자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라고도 한다.
* 원문 해석을 위해 참고하는 공구서는 가능한 전통시대 문인들이 사용하던 공구서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 요구되었다. 개별 문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설문해자주>가 참고되었으며, 그 외의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찾는 데는 <예문유취>(唐), <태평어람>(宋) 등 당송대 유서류 서적들이 공구서로 이용되었다. 이들 공구서 또한 오늘날의 활자로 인쇄된 것이 아닌, 가능한 전통시대 원문을 그대로 영인한 자료들을 사용했다. 유서류에 나오는 용례들은 다시 그 출전의 원전을 찾아 문장을 대조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 발표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전통적 세로쓰기 방식의 손글씨로 작성되었다.
교토대 수업의 기본은 모든 자료의 원본을 확인하고 이본을 대조하며, 원전의 의미를 최대한 밝힌 주석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청대 고증학자들의 공부법을 재현한 것으로, 전통시대 문인들의 시선으로 자료를 풀어내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게이오와 교토 대학의 수업에서는 자료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직접적이고 물리적 경험을 통해 전통문인들의 자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는 일이 강조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원본을 실물로 직접 보는 일이 필수적이다. 대학 도서관에 고전적 자료들이 잘 갖추어져야 했고 학생들이 이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어야 했다.
실제로 두 대학 모두 귀중본 고서 자료들을 다량 수장한 기관으로 유명하다. 교토대의 경우 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문학부 서고 및 인문과학연구소에도 고서가 수장되어 있었다. 다만 가장 고서 접근성이 높았던 문학부 도서실 서고의 경우 문학부 교직원과 학생에게만 출입이 허용되고 외부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노경희, <일본 書庫 기행 ①-교토대학의 가와이(河合) 문고」>, <<문헌과해석>> 49, 문헌과해석사, 2010)
문학부 도서실에는 고서 중에 18세기 이후 자료들, 중국본을 예로 들면 청판본과 민국판 정도는(때로는 명대 후기판도) ‘개가식’으로 서고의 책장에 진열해 놓아 학생들이 언제든 보고 싶은 자료를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심지어 대출까지도 가능했다.(이 모두는 20여 년 전의 일들로 지금도 고서들을 개가식으로 배치하고 대출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국내외의 각종 기관들에 소장된 고서의 열람을 시도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학생들이 고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혜택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전통시대 서고의 관리들처럼 고서들을 마치 현대의 책처럼 스스럼없이 이용하며 그 질감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서가 배치의 또 다른 특징은 각 주제별로 고서와 현대의 연구서를 한 자리에 진열한 것이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각 자료의 원본과 연구서를 동시에 검토할 수 있다. 이는 판본학과 고증학을 중시하는 교토대 문학부의 학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며 그때를 떠올리니 그렇게 고서들을 서고에서 마음대로 뒤적이며 공부할 수 있던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환경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 그때 조금만 더 서고에 가서 조금만 더 책들을 꺼내어 볼 것을, 교토대 시절을 떠올리면 이 점이 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다음 편에 계속)
Commentai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