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0여년 간 필자는 한 가지 목적의식 하에 갈무리될 수 있는 두 방향의 연구를 진행해왔다. 1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 본 연구자가 일관되게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문학 텍스트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 축으로는 아비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 프로젝트나 파노프스키에 의해 한 번 더 펼쳐진 아이코놀로지 이론, 발터 벤야민의 이미지-사유 등을 참조하고 접목하면서 이미지 연구에 힘을 기울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동 이론을 문학 텍스트 연구에 도입하는 실천적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간 한국문학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20세기의 한국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그 물적 토대로서의 제도와 그 속에서의 물리적 실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랜 동안 현실 비판은 한국문학의 최우선 가치였고 작품에 나타난 주제와 사상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어 왔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신역사주의와 문화연구의 영향 하에 한국문학 연구자들은 물적 토대와 그 사상적·문화적 대응물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이는 한국문학 연구를 다양한 대상을 아우르는 한국학 연구의 지평으로 확장하는 나름의 성과로 귀결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한국학의 외연이 넓어지고 몸피가 커지는 동안 한국문학 텍스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소홀해지는 경향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 텍스트를 지시대상의 상대역(counterpart)으로 환원하여 주제론적 결론을 추출하는 일의 편의성에 쉽게 혹하는 경우도 적다고는 할 수 없다. 그 결과 텍스트 해석의 다양성과 깊이보다는 일물일사의 신기성과 제도 중심의 맥락 재구성이 연구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텍스트와 그 디테일에 근접하여 이를 자세히 읽으려는 태도가 새삼 중요해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눈앞의 실물에 기지(旣知)와 연역의 만능 척도를 들이대면 소출이 획일화되기 마련이다. 문학 텍스트가 문화와 제도, 그리고 사상의 알리바이로서, 주제를 추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편적 표상으로서만 기능하게 되는 ‘문학 사물화’ 현상의 그늘이 옅고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필자의 고민은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연구들의 성과와 실질적 효력을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텍스트가 알리바이로 전락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치와 외교를 해나가는 양상을 설명하는 길을 마련해 보고자 하는 데 있다. 이는 곧, 단순 표상이나 ‘목격원리’(eyewitness)의 증좌로서가 아니라 진술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내적 실재로서의 텍스트를 여닫는 길을 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손에 닿는 실제적 증거가 되기 이전의 고유한 실재로서의 텍스트의 특수성과 그것이 품은 풍부한 함의를 다채롭게 조망하는 경로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우선은 구심적으로, 다음은 원심적으로, 나아가 종합적으로 텍스트를 펼쳐놓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은 굳이 문학을 전공한 이로서는 제법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 안과 밖의 우군이 필요했다. 각기 이미지-사유와 정동(情動)이 그것이다.
2.
필자의 이미지 연구는 텍스트가 표상으로 환원되는 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현실 그 자체의 논리를 조직하는 양상을 설명해보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학 연구에 있어 이미지 연구는 그간 대개 표상적 기능이나 감각적 소이 혹인 질료적 단위 차원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좀 더 폭넓은 참조항들이 필요했다. W.J.T. 미첼이 넬슨 굿맨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미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이며 나아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반딧불의 잔존』에서 강조했듯이, 우리의 상상하는 방식 속에 정치하는 조건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1) 그런 맥락에서, 아비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 프로젝트를 중요한 연원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다음과 같은 논의는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이미지의 삶은 사적인 것 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삶이다. 이미지는 계보학적인 혹은 유전적인 계열 속에서 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문화들 사이를 옮겨 다닌다. 이미지는 또한 다소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대나 시대 속에서 집단적으로 동시 현존하면서, 우리가 ‘세계상’(world picture)이라고 부르는 몹시 거대한 이미지 형성물의 지배를 받는다.2)
만약 이미지가 사회적 삶을 통해 기존의 가치와 새롭게 형성되는 가치 체계를 동시에 보유하면서 생성을 거듭해나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미지-사유를 통해 문화적 징후와 가치의 문제에까지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텍스트로부터 발원하여 내부로부터 외부로의 길을 내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그 역으로의 경로도 가능하게 하는 연락과 교통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에르빈 파노프스키를 경유하여 W.J.T.미첼에 이르기까지의 도상해석학적 연구와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최근의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사유에 관한 연구를 종합적으로, 그러나 차이를 세세히 고려하며 비정합적으로 참조하여 이미지 해석의 형식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텍스트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시키기 위한 나름의 고투를 시도해야 했다. 그 결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방향을 정돈한 바 있다.
첫째, 문학 텍스트는 하나의 내적 실재로 간주될 수 있으며 텍스트에 대한 구심적 경의에 기초하여 내적 실재의 전모를 탐색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둘째, 문학 텍스트가 쓰여지던 당대의 정동(affcet)과의 접속을 위하여 텍스트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시킬 것이 요청되며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 내부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를 지정할 필요가 있다.
셋째, 그 유력한 장소로 이미지에 주목한다. 문학은 이미지의 보고이며 또한 이미지는 개체적 단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 삶을 살기 때문이다.
넷째,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지에 주목하되 문학 이미지에 대해 감각의 분절이나 사물의 질료적 속성에 입각해 조망하던 관례를 넘어서서 다양한 이미지 이론을 참조한다. 예컨대,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발원하여 에르빈 파노프스키에 의해 방법을 얻고 W.J.T, 미첼에 의해 확장된 아이코놀로지 연구의 맥락을 참조할 수 있다. 나아가 발터 벤야민,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자크-랑시에르 등의 논의를 수용하여 이미지-사유의 의의를 문학 연구에 맞게 맥락화한다.
다섯째, 이미지-사유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되, 텍스트의 작용과 효과를 재현적 효과의 측면이 아니라 정동적(affective) 효과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3.
문학 텍스트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시키기 위한 착수점을 찾기 위해 새로운 문학 이미지 연구 방법론과 이미지-사유론이 필요했다면, 원심적 접근을 위해 주목했던 것은 정동(情動 , affect) 개념이었다. 주지하듯, 스피노자는 정동을 “신체의 행위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변용이자 그것의 관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3) 오해를 무릅쓰고 이를 원용해보자면 역으로, 관념 혹은 사유가 신체변용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지적인 것이 정서에 작용하는 것과 같이 정념이 인지적 작용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4) 스피노자에 대한 강연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직접 들었던 예를 원용하며, 길을 가다 피에르와 파울을 연달아 만날 경우, 주체가 우선은 기쁨 쪽으로, 그러고는 곧 슬픔 쪽으로 연속해서 정동되는(affected) 정서적 변이를 언급한 바 있다.5) 마찬가지로 어떤 관념의 연쇄는 신체변용과 정서적 변이를 수반하며 정동적 반응의 도화선(trigger)이 될 수 있다. 텍스트-관념-신체변용-정동적 동요로 이어지는 연쇄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6)
문학 텍스트는 정동을 단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하여 독자의 정동적 반응을 촉진한다. 즉, 문학 텍스트는 재현과 표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쇄적으로 생성중인 텍스트-정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텍스트가 재현이나 표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정동이 된다면 우리는 텍스트의 전언과 더불어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경우 이미지는 기성의 인식을 뒤흔들면서 정서적 변이와 정동적 동요를 촉발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사유이미지(Denkbilder)에 대한 아도르노의 설명에서처럼 “이미지들은 개념적 사고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같은 형식으로 충격을 주고, 이를 통해 사유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단적인 예로 저 유명한 김수영의 구절, “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사랑의 변주곡」)와 같은 구절을 그런 의미에서의 ‘이미지-폭탄’(바슐라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정동적 문학 읽기는 명료한 정보와 사회사적 이해에 기반한 비판적 독서가 아니라 삶의 구체성을 전달하는 정동적 언어의 효과를 드높이는 것에 가깝다. 이런 맥락을 살피며 필자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1) 문학 텍스트는 정동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정동이며 독자의 ‘정동적 동요’를 유발한다.
(2) 그런 맥락에서, 그 자체로 계량이 불가한 정동적 힘의 크기와 양상을 읽기 위해 텍스트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문학 텍스트에서 이미지는 지평적 진술과는 다른 방식과 강도로 ‘정동적 동요’에 관여한다.
(4) 따라서 문학 이미지는 전(前)개체적 즉접, 경험의 하부-언어적 기입, 그리고 이행의 연속체와 관계된다. (Blur & Bleeding)
(5) 정동적 텍스트 읽기에서, 이중체제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문학의 이미지를 읽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6) 결론적으로, 텍스트-정동은 여러 신체의 연동 및 신체변용(affection)의 결과이며 나아가 그 스스로가 여러 신체에 연동된다.
4.
위와 같은 두 갈래의 논의를 정돈하고 다시 텍스트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모색해보기 위해 필자는 이미지 이론, 정동 이론 등을 수렴하여 텍스트 읽기의 일환으로 ‘시 읽기의 3단계 방법론’을 제시한 바 있다.
시에 담긴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사실적 의미에 대한 기술이 요청된다. 이 단계에서 확정할 수 없는 것들을 연역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시의 문면에 충실하게 스타일과 구조를 살피며 내적 정합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한다. 여기서 이관된 문제들은 맥락적/상관적 독시 과정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시의 문면에 충실한 기술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남겨진 문제들을, 시인 자신의 렉시컨, 동시대 시의 렉시컨 등을 고려하고 문학적 관습의 맥락을 살피며 동시대의 문화적 배경, 인식과 사상, 문헌자료에 의한 지식 등을 참조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관계적 맥락에서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문면에 충실한 기술과 맥락을 살피는 분석을 통해 드러난 의미를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시의 가치를 헤아리는 작업이 해석의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시 고유의 이미지-사유의 특성을 고려하고 전언이 아닌 정동적 효과를 헤아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3단계 방법론을 기계적으로 시 읽기에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을 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바를 충족시키고 여기에 보충적으로 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참조하여 종합적으로 시 텍스트 고유의 가치를 읽자는 것이 제안의 핵심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방법론 그 자체는 아니다. 방법은 방법일 따름이다. 그러나 때로 방법이 목적이자 내용이 되어주는 경우도 있다. 텍스트 내부로부터의 자기 전개를 위한 경로를 마련하는 것은 방법이지만 때로 목적이 되어주기도 했다. 다시 한번 내부로부터의 자기 전개를 위하여!
1)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저 김홍기 역, 『반딧불의 잔존-이미지의 정치학』, 길, 2012, 60쪽. 참조.
2)W.J.T.미첼 저, 김전유경 옮김,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이미지의 삶과 사랑』, 그린비, 2010, pp.140-141
3)“By affect I understand affections of the body by which the body’s power of action is increased or diminished, aided or restrained, and at the same time, the ideas of these affections.”, Benedict De Spinoza, Ethics, edited and translated by Edwin Curly, Penguin Books, 1996, p.154
4)이와 관련해서는 Alex Houen, “Introduction: Affect and Literature”, Affect And Literature, edited by Alex Houe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참조.
5)들뢰즈가 벵센느 대학에서 스피노자에 대해 행한 강연 기록은 http://www.webdeleuze.com에 불어판과 영문판이 게시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사이트에 게재된 영문판을 인용한다.
6)이것이 사물과 사유의 인과관계를 설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스피노자의 평행론 명제,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The order and connetion of ideas is the same as the order and connection of things.”는 명제로부터 근거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Benedict De Spinoza, op.cit. p.119
7)Theodor W. Adorno, “Benjamin’s Einbahnstrasse”, Notes to Literature Ⅱ, translated by Shierry Weber Nicholsen,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2,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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