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의 지도> 리뷰 / 최석현

10월 15일 업데이트됨

‘인문학은 인간을 다룬다.’ 당연해 보이는 이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목소리의 출처는 다양하다. 과학기술은 물론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행위자들까지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 브뤼노 라투르 같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가들이 있는가 하면,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그리고 여타 소수자 정치의 당면 과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관념과 언어를 벗어나 신체와 물질의 역능에 주목하는 게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제인 베넷과 스테이시 앨러이모 같은 신유물론자들이 있고, ‘사이보그’, ‘포스트휴먼’ 등 특정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는 근대적 ‘휴먼’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개념의 구성을 시도한 도나 해러웨이, 캐서린 헤일스, 로지 브라이도티 등의 포스트휴먼주의자들도 있다.


1980년대부터 서구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한 이들 목소리는 이를테면 ‘인간 아닌 것의 인문학’으로의 전환을 인문학의 당면 과제로 제시하며,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인간 소외의 극복을 넘어 인류세 상황에 대한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전염병, 정보화와 자동화의 시대인 오늘날 ‘인간 아닌 것의 인문학’은 그야말로 시대정신이다.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작업이 최근 몇 년간 빠른 속도로 한국에 번역 소개되고 있는 상황이 이를 예증한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은 이 같은 ‘인간 아닌 것의 인문학’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지도와 같다. 이 책이 상정하는 독자는 특히 ‘인간의 인문학’에 익숙한 이들이다. 책의 목표는 단순하다. ‘휴먼주의자’를 ‘포스트휴먼주의자’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저자 스스로 서론에서 밝히듯 그는 “한때 역사적 유물론 진영에 몸담았던 개종자의 열정을 품고서 이 책을 적는다.” (22쪽) 특히 책의 7장에서 그는 흥미로운 역사적 메타포를 활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그는 오늘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권력’을 대신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에게서 힌트를 얻어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의 시공간적 움직임과 되기를 구부리는 방식” (289쪽)으로서의 ‘중력’ 개념을 도입한다. 브라이언트는 이렇게 말한다.


“‘권력’, ‘사회’, ‘구조’, ‘맥락’, ‘사회적 힘’ 등과 같은 용어들은 설명되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들인데도 설명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뉴턴 물리학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힘과 권력은 설명되어야 하는 것들인데도, 우리는 마치 그것들이 주변 세계에서 나타나는 패턴들을 설명하는 것처럼 사회적 힘이나 권력에 호소한다. …… 존재지도학에서는 ‘중력’이라는 용어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힘’과 ‘권력’ 같은 개념들을 대체한다.” (286~287쪽)

요컨대, 휴먼주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뉴턴 역학과 같고, 포스트휴먼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다. 휴먼주의는 이제까지 사회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 효력 있는 설명들을 여럿 제공했지만, 결국 ‘권력’이나 ‘구조’ 같은 ‘원격 작용’을 도입한다는 한계 때문에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포스트휴먼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롭게 볼 만한 것은 저자가 휴먼주의의 ‘정전(正典)’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마치 상대성 이론이 뉴턴 역학을 폐기하기보다는 오히려 포섭했던 것처럼, 브라이언트의 기획은 옛 철학들을 대체하기보다는 오히려 확장한다. 그는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이 사회적 관계를 담론적인 것이나 기호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에 비판적인 한편으로, 이들 이론의 범위가 적절히 명시되면 그것들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고 전제함으로써 나아가지는 않는다.” (27쪽) 상대성 이론이 뉴턴 역학을 ‘빛의 속도에 비해 아주 느리게 운동하는 계에 대한 분석으로 국한할 때’ 옳은 것으로 만들었듯, 포스트휴먼주의는 휴먼주의가 ‘담론적인 것과 기호적인 것에 대한 분석으로 국한할 때’ 옳은 것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칸트의 말처럼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조작이 가공한 대로의 산물이다.” 다만 “칸트가 인지 기계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모든 기계에 대해서도” (96쪽) 참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희미한 객체가 자신의 어렴풋함에서 떠오르고, 말하며, “어떤 누군가”의 이름으로 치안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계기”라는 랑시에르의 주장은 옳은데, 다만 “비인간이 …… 희미한 객체에 속할 수 있음” (316쪽)을 인정한다는 조건이 붙어야 할 뿐이다. 헤겔과 사르트르에서 라캉과 지젝까지, 휴먼주의 전통을 대표하는 사유들이 모두 포스트휴먼주의의 틀 안에서 새롭게 독해된다. ‘휴먼주의자’를 ‘포스트휴먼주의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나은 전략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쯤에서 한 가지 걱정을 토로해야겠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한때 역사적 유물론 진영에 몸담았던 개종자의 열정” (22쪽)으로 이 책을 썼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정말 ‘개종자’가 맞는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 『존재의 지도』는 휴먼주의와 포스트휴먼주의, 역사적 유물론과 신유물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포스트휴먼주의야말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브라이언트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여전히 “노동조합과 혁명정당” (314쪽)의 방식을 알게 모르게 승인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을 답습한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브라이언트가 좌파 정치의 ‘표현’을 포스트휴먼적인 것으로 대체하려 노력한 것은 분명하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언할 수가 없다. 책에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역사적 유물론의 영토에서 발을 떼지 않으려 한다.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지평이고, 자본주의의 동학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쟁점을 특징짓고 좌우합니다.” (440~441쪽)


물론 자본주의가 ‘만악의 근원’이고 ‘초코드화’의 원천이며 브라이언트의 용어에 따르자면 “블랙홀 객체” (318쪽)일 수도 있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포스트휴먼주의 윤리학이 “도살당할 소가 정신적 충격을 더 적게 받으면서 통과하도록 도살장 문을 설계”하는 행위를 “소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그리고 소의 목적이나 욕구가 무엇인지에 주목함으로써 …… 더 동정적인 시각으로 소에 주목할 수 있게 하는 권고안” (108쪽)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 이유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신생아보다 더 큰 행위주체성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성인이 단순히 무작위적인 신경 발화로 인해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목표나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더 큰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 (338쪽)이라는 발언도 쉽게 납득하지는 못하겠다. 반자본주의 정치에 대한 브라이언트의 선호는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가 생태주의와 정체성 정치의 중요한 쟁점들을 때때로 간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요컨대 『존재의 지도』는 포스트휴먼주의와 휴먼주의 사이, 혹은 이른바 신유물론과 구유물론 사이의 중간 지점에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나의 비평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포스트휴먼주의적인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 나름의 ‘중력장’을 펼치려는 시도에 불과할 테다.


최석현(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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