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까마득한 옛날, 인류가 탄생하였다. 다른 동물에 비하여 나약한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남고,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인류의 집단 생존 전략을 꼽을 수 있다. 인류는 무언가를 다양한 매체에 기록하면서 역사시대를 열었다.
고대의 기록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담았고, 이승과 저승을 잇는 키워드였으며, 도서관은 ‘영혼의 쉼터’,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 신성한 장소였다. 한편, 고대는 인문(人文)과 천문(天文)에 인류가 눈을 뜨는 시기였으며, 도서관은 신성한 기록의 보관소이자 뮤즈(Muse)의 전당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다. 중세 천년 동안 도서관은 종교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자 밀실이었으며, 지식을 가진 자들만의 폐쇄회로였다. 또한 종교, 민족, 지배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도서관이 파괴되고 장서가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중세를 포함한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인류의 오만과 편견, 무지와 광기는 각종 명분으로 책과 도서관을 학살하였다. 11~15세기에 유럽 각국에 대학이 건립되었고, 13세기 소르본느(Robert de Sorbonne)가 자신의 장서를 파리대학에 기증하여 초기 대학도서관의 한 모델이 등장하였다. 볼로냐대학(Università di Bologna, 1088년 설립)을 비롯한 유럽의 초기 대학은 소규모 신학교 중심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태학(太學), 국학(國學) 등 규모가 크고 면모를 뚜렷하게 갖춘 대학으로 설립되었으며, 고려 국자감(國子監, 992년)는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이었다.
근세에 들어와 고대 인문정신으로 돌아가는 르네상스와 종교권력에 반기를 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 전에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가 1천년 시간에 거쳐 서양으로 전파되고, 구텐베르크 인쇄술과 결합하였고 유럽 전역에 인쇄술이 확대되고 각국에서 자국어 성서를 비롯한 각종 책이 출판되어 지식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왕, 귀족,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책이 해방되었다. 입법의회에 의해 프랑스의 모든 교회도서관은 국유화되었고, 망명귀족의 장서가 몰수되었고, 몰수된 책과 필사본은 파리 곳곳에 설치된 문헌보관소(dépôt littéraire)에 보관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대혁명 정신은 근대정신의 표상이 되었고, 책과 지식의 해방을 가져왔다.
근·현대 사회에 들어와 공공도서관은 점차 만인이 누릴 수 있는 정보·교육·문화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한편 대학도서관은 학술기관, 고등교육의 산실인 대학의 학문 활동을 지원하는 기본기관으로 위상이 정립되었다. 여기에서는 현대 대학도서관에 초점을 맞추어 장서,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본다.
2. 대학도서관 장서의 가치와 성장
중세에서 시작하여 근세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도서관은 장서(Collection)를 바탕으로 대학의 존립 기반이자 대학의 연구·교육 활동을 지원하는 기본시설로 발전하였다. 근·현대 사회에서 각종 학문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으며, 기록과 인간정신을 탐사하는 인문학에서 새로운 발견과 첨단을 선점하고자 하는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은 분화하면서 또한 통섭(統攝, Consilience)을 한다. 세계의 명문 대학도서관은 학문분야별로 체계적으로 구축 장서를 바탕으로 대학의 학문 활동을 지원한다. 북미연구도서관협회(Association of Research Libraries: ARL) 회원교 도서관 중에서 장서 종수(titles, 2020년 기준)로 하버드대학(1위) 18,711,275책, 예일대(3위) 12,826,347책, 일리노이대(7위) 9,546,739책, 루이지애나주립대(25위) 6,457,134책이다.1) 국내 대학도서관과 비교해 보면, 2021년 대학도서관 통계로 국내 상위 20개 대학의 평균 소장 도서 수는 2,478,754책이며 재학생 1인당 평균 소장 도서 수는 92책이다. 2020년 ARL 통계로 북미 116개 대학의 평균 소장 도서 수는 5,932,066책이며, 재학생 1인당 평균 소장 도서 수는 207책이다.2) 이처럼 국내 상위 대학의 도서관이라고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북미 대학도서관 장서의 절반 이하를 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거점국립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의 도서관은 늘어나는 장서를 소장할 공간이 부족하다.
3. 대학도서관 공간의 아름다움과 변신
중세 대학도서관에서는 귀중본이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현대 대학도서관은 서가에 이용자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가제(開架制, open stack system)를 취하고 있다. 이용자는 서가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자신이 갈구하던 책을 만나는 ‘우연한 발견(serendipity)’을 할 수도 있다. 현대 대학도서관은 이용자를 환영하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학도서관이 칸막이와 철문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독서실’에서 장서의 숲속에서 자료검색·독서·사색·휴식·협업·콘텐츠 및 매체 제작 등이 가능한 ‘아카데미아’로 변화하고 있다.
4. 딜레마 – 장서와 이용자 공간
국내 대학도서관은 장서의 성장과 이용자지향적 공간 확충이 상충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인도의 석학 랑가나단이 제시한 ‘도서관학 5법칙’ 중 제5법칙은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이다(A library is a growing organism.)”라는 것이다. 대학의 학문활동은 무한대로 성장하는 탐구와 기록에 바탕을 두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인쇄자료와 사이버자료, 인류의 기억과 정보의 우주를 포괄한다. 대학도서관은 정보의 우주에서 정선된 정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자원, 지식의 네트워크를 연결하며, 이용자의 학문 활동을 돕고, 학문분야별로 체계적인 장서를 개발하고 지식과 이용자, 이용자와 이용자를 연결하며, 지식의 독점 또는 지식을 상업화하는 움직임에 대응하고 세계학술커뮤니케이션의 흐름에서 지식의 공유광장(Hub)로 기능한다.
2000년 이후 국내 대학도서관은 신축, 증축, 리모델링을 많이 하였다. 2003~2022년에 총 99건이 진행되었고, 리모델링 61건, 신축 28건, 증축 10건이었으며, 2016년 이후 대학도서관 공간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이 중 리모델링 위주의 변화가 진행되었다.3) 필자는 대학도서관 공간마케팅 전략으로 첫째, 이용자지향적 공간의 창출 - 이용자를 환영하는 도서관, 머물고 싶은 도서관, 편리하고 쾌적한 도서관, 둘째, 연구·학습 생태계 조성을 위한 공간 창출 – 공동학습활동 지원, 이용자의 다매체 학습·정보추구활동 지원, 주제서비스 마케팅, 셋째, 대학의 상징으로서의 도서관을 제시하였다.4)
이처럼 국내 대학도서관 현장에서의 장서의 성장과 이용자지향적 공간 창출은 양립하기 힘든 딜레마가 되고 있다. 최근 대학도서관계에서는 장서 폐기를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감소하고자 애쓰고 있다. 해외 대학도서관의 경우, 학내 보존도서관(deposit library)의 설립, 지역 여러 대학의 도서관들이 연합하여 공동보존서고 구축, 학습자료 디지털 아카이빙, 디지털도서관 구축 등을 추진하였다. 국내 대학도서관의 경우, 보존서고 및 밀집서고 구축, 학술데이터베이스 구독, 전자책 제공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대학도서관에 대한 인식 변화가 획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한, 이러한 해법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대학도서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변화는 대학도서관이 가지는 가치와 역할에 대한 것이다. 인류의 지적 탐구 역사에서 대학도서관은 대학의 학문 활동에 핵심적인 기반이 되며, 국내 법령(대학설립·운영 규정 [별표 2])에서도 대학도서관은 대학의 ‘교육기본시설’로 규정되어 있다. 선진국 대학도서관처럼, 대학의 상징(Landmark)이 될 수 있는 학술도서관 건립, 대학도서관의 증축 및 리모델링, 자료와 학습·독서·협업이 어우러진 공간의 창출, 주제별(단과대학별) 분관의 건립 등 획기적인 해법이 강구되어 한다. 대학의 학문 활동과 대학인의 지적 탐구와 성장을 지원하는 역할이 대학도서관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도서관이 첨단 정보기술을 활용하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필수적이면서 부가적인 일이다.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대학도서관이 정선된 지식을 제공하고 정보 조직을 통하여 이용자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 전세계 도서관 네트워크를 통하여 이용자의 학술 탐구를 지원해야 한다. 대학도서관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대규모 장서폐기는 경계하여야 한다. 다만 정교한 기준과 보완책을 가지고 소규모 장서폐기를 진행하는 것은 필요하다.
5. 마무리
필자는 프린스턴대학교 중앙도서관인 파이어스톤 도서관(Firestone Library)에 연이어 있는 별관인 코츤 어린이도서관(Cotsen Children’s Library)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도서관의 장서는 15세기 이후의 출판된 어린이책, 문서, 삽화 및 예술작품 원본, 교육용 장난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도서관은 학술도서관이면서 대중의 방문을 환영하는 공공도서관 역할을 하고 있다.
프린스턴대의 경우, 컬럼비아대, 하버드대, 뉴욕공공도서관과 협력하여 외부 수장고를 설치하고 최대 2천만 책의 보존장서를 보관하고 있다. 프린스턴대 포리스털(Forrestal) 캠퍼스에 위치하는 이 수장고는 2000년에 설립된 여러 도서관의 컨소시움(Research Collections and Preservation Consortium: ReCAP)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5)
예일대의 희귀자료 보존도서관(Beinecke Rare Books & Manuscript Library)에 입장하면 4면의 거대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장서를 볼 수 있다.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이 컬렉션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컬렉션은 고대 파피루스, 중세 필사본, 현대 작가의 육필 원고, 사진, 시청각 및 디지털자료에 이르기까지 수천 피트에 달하는 서가 공간에서 이용자와 만나고 있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료 수집에 충실하지 못 하였다. 예컨대, 동학 자료, 근현대 인문·사회·자연·기술과학의 국내외 초판본, 해방 전후의 자료, 70~80년대 민주·학생운동 자료, 대학의 연구 및 교육활동을 풍부하게 지원하는 심층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조직하고 서비스를 한다면 한국 대학도서관의 장서는 폐기하기 힘든 훌륭한 컬렉션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국내 대학도서관이 이용자를 환영하고 이용자의 행태를 반영하고 대학의 상징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도 분명한 추세이자 지향점이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은 이러한 기로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현장 주도적으로 장·중·단기 발전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미래와 경쟁력은 학문탐구와 인재 양성의 터전인 대학도서관에 달려 있다.
미주
1)북미의 대학도서관은 학문분야별로 체계적으로 개발된 장서를 구축하고 대학의 학문 활동을 지원한다. 북미 25위에 드는 연구학술도서관들은 대체로 오랜 시간 개발한 1천만 책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25위인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도서관만 해도 약 650만 책을 보유하고 있다. List of largest libraries in the United States, Wikipedia [cited 2024. 4. 14.]
2)국내 상위 20위 대학도서관이라고 하더라도, 평균 소장 장서가 약 250만권이다. 이 정도면 각 분야 교수의 전문적인 연구와 박사과정생의 학위논문 작성을 지원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서 필요한 망라적 수준의 장서를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장상현, 이종욱 외, 『2021년 대학도서관 실태조사 결과 분석』, 교육부·한국교육학술정보원, 110쪽.
3)정재영과 김희전의 연구에 의하면, 지난 20년 간 전국 대학도서관 공간변화의 특징은 이용자들의 요구 수용, 도서관 내 휴게공간 확장, 쾌적하고 안락한 분위기 추구, 혁신적·창의적 공간 설치 지향 등이다. 이 연구는 대학도서관 공간변화의 지향성으로 대학도서관만의 차별성 확보, 다양한 변화에 대한 수용성, 대학도서관의 가치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상징성 지향을 제시했다. 정재영, 김희전, “대학도서관 공간변화 동향 및 인식에 관한 연구” 《한국비블리아학회지》 33(3), 31-54쪽.
4)필자는 국내외 여러 대학도서관을 탐방하고, 국내 대학도서관 공간구성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대학도서관의 본질, 정체성, 상징성을 중시하는 대학도서관 공간마케팅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용재, 『도서관 경영전략과 마케팅』, 청람, 2021, 127-148쪽.
5)ABOUT RECAP <https://recap.princeton.edu/> [cited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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