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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같은 시선 / 김보슬

2018년 국립현대무용단 픽업스테이지 ‘맨투맨’이라는 프로그램 기획 안에서 발표된, 박순호 안무가의 신작 <경인(京人)>은 제목 그대로 서울 사람들, 혹은 도시인을 가리킨다. 세 명의 무용수 몸으로 그 내용을 건네고 있다. 이 글은 <경인>의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리뷰나 평문이 될 예정이 아니다. 다만, 그 작품을 세 차례 거푸 관람하고 나서 기억되는 한 장면, 깊은 푼크툼(punctum)을 자아내며 나의 뇌리에 감겨드는 단 한 장면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하얀 무대 위 창백한 조명 아래 나란히 놓인, 역시 새하얀 저울들 위에서 세 명의 남자 무용수가 춤을 춘다. 시장에서나 볼 법한 저울 — 그 위에서 춤을 추다니! 즐겁고 신명 나는 춤은 아니다. 저울에 닿는 발바닥으로 내려오는 무게에 저항하며, 단련된 근육으로 단단한 긴장을 풀지 않고, 촉각을 곤두세워 약속된 몸짓을 행한다. 저울의 바늘이 불안하게 떨린다. 프로그램북에 실려 있던 공연 소개글대로라면,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과 정서적 결핍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도시인”의 모습이며, 따라서 이 장면은 그 욕망과 결핍의 불안한 무게를 달고 있는 것이다.

[사진 1. <경인(京人)>(2018년), 박순호 안무, 사진 제공_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사진 2. <경인(京人)>(2018년), 박순호 안무, 사진 제공_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그러나 이 ‘저울씬’이 말하는 것이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작품 전체의 설명이 의도적으로 안일하고 느슨하게 쓰였다는 의혹, 일부러 핵심을 괄호 쳐 두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적 욕망과 정서적 결핍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도시인”은 여러 장르의 작품들 속에서 이미 100년 이상 숱하게 다루어졌고, 그에 대한 논의들을 우리는 지겨울 정도로 나누었다. 그럼에도, 이 저울씬은 남달랐다.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바늘이 흔들리고 있다. 저울의 바늘이 나의 마음을 파고들며, 아주 순박하고 솔직하게 나의 무게를 캐묻는다.

문득, 거리를 요구 받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회적 거리, 물리적 거리, 신체적 거리라고도 하는 바로 그 거리가 예술 안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많은 공연은 실황중계 영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마치 난민들처럼 영상매체로 떠밀려가는 느낌에, 석연찮은 구석도 있다. 극장식 몰입으로부터 그 바깥으로의 망명이며, 아직 모든 예술인들이 새로운 매체 고민을 할 준비가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코 떠오르는 의문은, 거리를 요구 받는 시대에 예술계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더욱 대상화하는 변화를 맞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특정한 거리 바깥에 두는 태도는 자연히 관점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기술과 자본의 관념이 더욱 명확하게 대두되고, 작품의 형태나 성과를 이전보다 더욱 대상화·계량화·지표화하게 될 것인가. “관조가 거리를 두고 바라봄을, 거리 내에서 파악하고 인식함을, 또한 바라봄과 인식함의 동일성을 의미한다면, 결국 어떤 것을 대상화하는 작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자본의 관념이 사물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 시대의 지배적인 대상화 방식의 토대일 것이다.”(「자본과 어둠」, 박준상, 『OKULO』 006호 p.58-59, 2018년, 미디어버스)

관조. 관찰. 관음. 이런 말들을 떠올린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시선을 함의한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며 그 깊어지는 원근감 속에서 탯줄로부터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보다 가볍게 말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고 소실점을 이동시키고 있는 게 아닌지? 흔히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말한다. 언젠가 터키에 몇 달을 체류하고 나름의 ‘취재’를 통해 그곳 삶을 퍽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나에게, 한국은 시선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그 홀가분함을 마다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홀가분함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시선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타인의 시선 안에 머무르고 싶다는 호소에 비해, 타인의 시선에서 탈피하고 싶다고 하는 호소를 압도적으로 흔하게 듣는다. (물론, 전자와 같은 말을 공공연하게 뱉기보다 SNS에서 좋아요를 기다리는 손쉬운 대체방안이 있기도 하다. 한글 자판으로 SNS라고 치면 ‘눈’이 된다.) 당연하게도 시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구속이나 의심의 눈초리만 있을 뿐 아니라, 사랑과 응원의 눈길도 있다.

비단 서울에 살아서 경인이 아니다. 한국이라는 작은 공간에서의 삶은, 도시에 살지 않아도 도시화되어 있다. 고속화된 통신매체와 교통수단, 경제활동으로 얽혀있는 우리 모두는 많은 측면에서 다 같이 경인이 된다. 경인의 무게를, 박순호 안무가는 무대 위 흰 저울 위에 무용수들의 춤을 달아보는 것으로 실험했다. 과연 바늘도 함께 초조한 춤을 추었으며, 시종 오르락내리락하는 저것이 정말 우리의 무게인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 나는 십자가를 진 경인들을 많이 본다. 여기서 십자가란, 쫓기는 삶이라 대신해도 무방할 듯하다. 무엇에 쫓기는가, 각자 묻기를... 십자가를 등에 얹은 경인의 무게는 결코 저울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다. 십자가를 대신 들어줄 수도 없다. 그러나 저울로 잴 수 있을 만하게 그 무게를 경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감상적인 결론으로 치닫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과 응원의 눈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마르고 조급한 구속의 눈초리 대신 말이다. 물론, 사랑 어린 시선을 성심껏 빚어서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분명 인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럼에도 도전할 의지가 있다면, 출발의 비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편협하고 옹색한 시야를 보다 넓게 여는 것으로 시작되리라.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모습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듣고 보니 너무 뻔한가? 길가의 풀 한 포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서, 사람을 혹은 작품을 어떻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한 포기의 풀이, 맑은 빗물이, 내가 사랑하고 응원하는 그 사람(작품)의 세계를 떠받치고 덮어줄 것인데 말이다.

더 멀어지며, 더 넓게 보아야 한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아가며 항구를 뒤돌아보듯이. 이것이, 오늘의 예술계에서 내가 감각하는 거리이다. 이것이, 저울 위에서 버둥대는 경인을 안아줄 날개 같은 시선을 잉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상 하나를 소개한다.

Nanette Scriba가 부르는 <The Cold Song>.

제목만큼 차갑지 않다. 멀어지는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면.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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