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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분열과 ‘시민’의 형해화 / 박성호

 19세기 말 한국의 초창기 근대 미디어는 ‘소문’을 바탕으로 하여 각계각층의 소식을 전하는 한편, 이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힘을 썼다. 연령대나 성별, 직업, 교육 수준 등에 의해 분절되지 아니하는, ‘시민’이라는 동질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공론장의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다. 실제로 1898년 3월 벌어진 만민공동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건을 철회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근대 미디어의 공공성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20세기 내내 근대 미디어의 생산자는 소수의 엘리트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적잖은 규모의 자본을 요하는 기업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전문성과 자본이라는 두 거대한 문턱을 넘지 않으면 언론의 ‘생산자’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러한 구조가 깨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유튜브 등의 소셜미디어가 레거시 미디어의 대체재, 즉 ‘대안언론’ 내지는 ‘유튜브 저널리즘’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었다.

이번 12.3 내란 사태에서 두드러진 것은 레거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공론장의 급격한 퇴조였다. 박근혜 탄핵 정국 때까지만 해도 조중동이나 경향, 한겨레와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정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탄핵 정국에서 분수령으로 작동했던 태블릿PC가 등장했던 것도 JTBC나 TV조선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힘이었다. 그러나 불과 7-8년 사이에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정치 유튜브 채널이 되었다.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인 <배승희 변호사>의 배승희나 <신의한수>의 신혜식 등이 조선일보 절독을 외친 것은 다분히 징후적이다.1) 조선일보가 탄핵 정국을 두고 계엄령을 비판한 데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보수 진영 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이전처럼 다른 성향의 채널이 보수 레거시 미디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진영 내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을 벌인 셈이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조차도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면서 유튜브를 보라고 주문했을 정도였다.2) 이는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몇 년 전부터 “올드 미디어”에 매달리지 말고 각자의 미디어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표출한 바 있다.3) 12.3 내란 국면에서 민주당 국회의원 다수가 <겸손은 힘들다>나 <매불쇼>와 같은 유튜브 채널에 빈번하게 출연했던 까닭도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현상을 낳은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레거시 미디어 자신들에게 있다. 이들은 보도하는 사안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행위, 즉 정론(政論)에 대한 책임을 상당부분 방기하고 기계적 중립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다. HBO드라마 <뉴스룸>(2010)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당이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하고, 공화당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하면 이에 대해 언론은 지구가 둥근지의 여부에 대해 양 정당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도하는 격”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계적 중립이 언론사 각각의 정파성을 은폐하고 상대 정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오용되면서 다른 진영에 속한 시민들의 신뢰를 대폭 상실하게 만들었고, 이는 정치 유튜브 채널의 대두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의 과도한 편향성은 이런 경향을 증폭시켜서 김어준이나 신장식, 박지훈 등 레거시 미디어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스피커들을 대안언론으로 옮겨가도록 만들기도 했다.4)

문제는 이러한 대안언론, 혹은 ‘유튜브 저널리즘’이 공공성을 중심으로 한 언론 지형을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제한적이나마 공공성을 담지하기 위한 제도적 제약 하에 놓인다. 보도 사실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하고,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를 따른다. 논조의 차이, 정파성의 문제는 존재할지라도 언론이 지켜야 하는 선 자체를 무력화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튜브 저널리즘은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구독자가 원하는 방향이라면 언제든지 언론이 지켜야 할 공공성을 깨뜨리고 채널 각자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레거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언론 지형이란, 말하자면 미국의 MLB처럼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로 나누어진다 해도 ‘야구’라는 공통 분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서로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 해도 동일한 룰을 적용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유튜브 저널리즘의 시대에는 이런 틀마저도 깨져버리고 만다. 똑같이 야구를 한다고 주장해도 어느 리그에서는 배트를 휘둘러서 포수를 위협하는 게 허용되기도 하고, 또 어떤 리그에서는 공으로 타자를 맞춰도 데드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면 야구라는 종목 자체가 존속할 수 없게 된다. 각각의 리그와 그에 환호하는 상호 배타적 관중만이 남을 뿐이다. 관중 역시 마찬가지다. ‘야구 팬’이라는 공통분모 대신, 각자의 리그와 팀을 대변하는 이들 사이의 대결과 갈등만이 남는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꼭 이와 같다. 유튜브 저널리즘을 중심으로 공론장이 해체의 수순을 겪게 되면, 이는 나아가서 공론장을 공유하던 시민 일반의 감각마저도 흩어버린다. 레거시 미디어가 위태롭게 쥐고 있던 공공성의 붕괴란, 더 이상 이 사회를 구성하는 분자로서의 시민이라는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상상의 공동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합의된’ 공동체라고 부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의 경계선과 논의의 전제 등에 대한 합의가 사라지고 각각의 채널이 추구하는 원칙과 인정하는 사실에 따라 분열되고 만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과거 보수 진영 내에서 상대방에 대한 마타도어로 사용하던 언어란 ‘종북’이었다. 이 언어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라는 살벌한 의미를 담고 있을지언정 적어도 한국인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같은 한국인이되 저들은 사상적으로 북한을 추종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보수 유튜브 채널을 중심으로 폭넓게 퍼지는 언어는 더 이상 북한을 호명하지 않는다. 이제는 중국인 혹은 화교라는 언어가 보편화되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마저 사라져버린 셈이다.


게다가 공공성을 대변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국회의원조차도 이러한 언어를 별다른 저항감 없이 쓰게 되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탄핵 찬성 집회에 다수의 중국인이 참석했다는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의 발언이 대표적이다.5)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유권자’를 동등한 자국민으로 인식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영남 지역을 방문하면서 “경상도 나라를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남긴 것도 그렇다.6) 다선 국회의원이자 한국 제1 보수정당의 대표가 일종의 ‘분리독립’을 암시하는 발언을 한 셈이다. 물론 당사자로서는 실제로 분리독립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서 던진 발언은 아니겠으되, 일국의 국회의원이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이 사회를 지탱하던 시민으로서의 동질성이란 어느덧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과연 그 끝은 어디겠는가. 레거시 미디어가 간신히 유지해오던 공공성, 즉 ‘같은’ 대한민국의 시민이라는 전제 하에 대화와 토론이 오가던 공론장이 붕괴되면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될 것은 내전이다. 이미 ‘심리적 내전’이라는 표현은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공론장이 최소한의 근간이나마 유지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사전적인 의미로의 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은 공론장의 형해화를 향해서 급전직하하고 있다. 2025년 현재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이 심리적 내전이라는 수사적 표현에서 멈출 수 있다 할지라도, 앞으로 또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정치적 위기에서는 어떤 파국을 경험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작년 12월 3일의 계엄령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에 의한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발생한 공론장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여전히 거리에서는 살벌한 구호들이 넘실댄다. 마치 대규모 팬데믹처럼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과연 다음에도 건강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이미 2017년보다도 더 극심한 혼란을 겪은 우리로서는, 사분오열된 공론장을 조금이나마 복구하는 일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다가올 ‘재해’를 대비할 몇 안 되는 대비책일지도 모른다.



미주

1) 「“조선일보는 가짜 보수 언론” 절독 주도하는 尹 지지자들」, 󰡔미디어오늘󰡕, 2025.3.15.

2) 「윤석열, 체포 직전 남긴 한마디... “신문 보지 말고 유튜브를 보라”」, 󰡔내외일보󰡕, 2025.1.16.

3) 「유시민, “올드미디어에 공정보도 호소하는 헛짓거리 그만하자”」, 󰡔미디어오늘󰡕, 2022.3.4.

4) 「‘뉴스킹’ 하차 박지훈 “정말 편파적으로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오마이뉴스󰡕, 2024.3.29.; 「“싸가지 없는 신장식”... 여권 비판 라디오 줄줄이 중징계」, 󰡔오마이뉴스󰡕, 2024.2.1.

5)  「김민전 “중국인들이 탄핵 찬성” 출처 불분명 게시글 공유했다」, 󰡔한국일보󰡕, 2025.1.6.

6) 「국민의힘 “영남만 가지고 나라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 󰡔프레시안󰡕, 2025.3.5.




박성호(경희대학교 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박성호(경희대학교 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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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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