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지향론적 상상력과 컴퓨터게임의 가능성에 대하여 1 / 오영진


영화 <127시간>(2010, 대니보일 감독)의 주인공은 그랜드 캐니언의 크랙에 빠져 어떤 바위에 한쪽 팔이 짓눌리는 사고를 당한다.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이 된 주인공은 내가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왜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했을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이 고난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만을 증오하기만 할 뿐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우연한 사고를 '나'라는 작은 틀에서는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절망한다. 그리고 환상을 본다.


"이 바위는 수천 년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 그것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당한 사고가 아니라 바위의 처지에서 생각하니 주인공은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 이것은 그저 우연한 사건일 뿐이고 나는 그 사건에 말려든 또 다른 객체일 뿐이다. 나는 바위의 손님이다. 그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팔을 맥가이버 칼로 자르고 빠져나온다. 이 점에서 자신의 팔을 잘라버린 행동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한 인간의 위대한 결정이 아니다. 한때 나의 팔이었던 신체를 그저 그 자리에 놓고 왔을 뿐이다. 덧없는 존재이기에 팔 한쪽을 잘라내는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왜 내가 나의 팔을 잘라내는 고난을 겪는가 질문한다면 번뇌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세상은, 만물 혹은 객체들은 이미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작품은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거친 자연을 극복한 인간승리 서사가 아니다. 객체들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불안을 넘어서 경이로움을 얻는 서사다.


문학작품이 쓰이는 순간은 이러한 의미의 객체들을 맞닥뜨리는 순간들이다. 대상 사물은 화자의 감정이입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화자 안으로 몰려오는 객체들이다. 화자가 느끼는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상 사물로부터 기인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객체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초단편 소설 <가장의 근심>에는 화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사물이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생김새도, 쓸모도, 연원도 특정할 수 없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다만 납작한 별모양에 실패처럼 실이 묶여 있다고 표현된 이것을 화자는 그저 오드라덱이라 부를 뿐이다. 화자는 자신이 죽고 사라져도 오드라덱만은 여전히 남아 여기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불안하다.


왜 불안한가? 자신의 주관으로 이 사물은 어떤 의미로도 포획되지 않고, 심지어 나의 소멸이 이 객체의 생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사? 이런 표현도 너무 인간적인 표현일 지도 모른다. 오드라덱은 객체지향존재론적 사고방식이 무엇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지 보여준다. 관찰자인 주체가 세계를, 아니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과 그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을 때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존재근거를 결코 지니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기에 오드라덱은 집안에 불쑥 등장한 타자이면서 동시에 나의 주인의식 마저 비웃고 뒤흔들고 마는 사물이다. 오드라덱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관찰자-주체의 덧없음을 드러내고야 만다.


오드라덱의 형언하기 어려운 이미지.

한편 컴퓨터 게임의 공간 역시 이미 존재하고 스스로 반응하는 객체들로 가득한 곳이다. 플레이어들은 흩어져 있는 아이템을 먹고 사용하고 NPC와 대화하고 적 개체를 죽이며 미로 같은 스테이지의 온갖 한계를 시험한다. 그들은 플레이 내내 열 수 있는 문이 어디에 있고, 높이 올라갈 방법은 있는지 끊임없이 더듬거린다. 상호작용하게 디자인된 객체들은 그때마다 플레이어에게 반응한다. 플레이들은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접촉하지만 이내 놀라움과 기쁨을 느낀다. 오로지 작동한다는 이유만으로. 물리엔진이라는 독특한 개념어가 지칭하듯 하나의 게임은 특정한 물리적 공간 속에서 구성된다.


물론 실제로 물리엔진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오브젝트들이 관계를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끊임없이 덧대고 덧대어 수정한 결과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엔진이라는 이 은유는 게임이 영화와 궁극적으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완성되기 전 물리엔진을 테스트해 보는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보면, 개발자들이 모든 경우의 수를 실험해 보고, 일관된 법칙이 적용되는 유사-세계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틈은 또 다른 임시방편의 수법으로 감춰지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리엔진이 구현되어 있다는 수사와 그 지향성이다.

앞서 <127시간> 같은 영화를 예를 가져왔지만, 관찰자-주체가 사라져도 사물들은 고스란히 여기에 남아 존재하는 세계. 이런 세계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 영화는 실은 그 한계가 있다. 영화 속 세계는 무대로 만든 환영이고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각 사물이 진짜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곳의 수도꼭지에서는 종종 물이 나오지 않고 벽들은 임시로 세워진 합판일 뿐이다. 즉 영화는 우리에게 부피를 선물하지 않고, 면과 면으로 연결한 운동-이미지를 선물한다. 게임적 공간도 꼼수로 가득한 공간이다. 초창기 8bit 게임을 보라. 게임 속 객체들은 움직이지 않고 실은 움직이는 척만 한다.


횡스크롤 게임의 경우 배경을 움직여 기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척 연출한다. 하지만 컴퓨팅 파워가 절대로 모자라지 않는 현재, 많은 게임은 플레이어의 시각에 도달하지 않아도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객체들로 가득하다. 내가 진입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객체들로 가득한 세계. 그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 룰이 항상 성립하는 세계. 그것이 게임이 구현해낸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는 사전에 렌더링 된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계산되는 세계다.


역사적으로 2000년대의 플래시 기술이 선보였던 벡터 방식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 진짜로 움직이는 것임을 우리에게 설득한다. 기존의 비트맵 방식의 애니메이션은 컷과 컷을 연결해 움직이는 것 같은 운동-이미지를 제공하지만, 벡터 방식은 점과 점 사이의 모션 이벤트 연결을 통해 진짜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애니메이션이다. 컷과 컷을 연결하는 과거 애니메이션에서는 움직임의 중간 과정을 한 컷, 한 컷 그려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끌어내야 했지만,


트위닝 기법이 가능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에서는 처음과 마지막 키프레임에 변화를 주면 중간 프레임을 자동으로 생성해 주기에 공정과정을 단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객체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해 처음 위치와 다음 위치를 설정하면 중간의 움직임이 자동으로 계산된다. 비트맵 방식이 아닌 벡터 방식이었기에 가능한 기법이다. 플래시 기술이 보여주었던 움직임은 우리 시대가 움직임-이미지가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로 이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제 움직임은 이미지들의 덧댐의 결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함수로 좌표계 안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수학적 함수의 다른 말은 바로 코드(code)다. 무비는 움직이는 척하지만 모션은 직접 움직인다. 이것은 객체가 좌표점 사이를 명령을 통해 움직인다. 명령? 이것도 사실은 재밌는 표현이다. 명령하다니.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는가? 이때 명령은 통제에 따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본디 그러한 성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명령이다. 객체 존재에 대한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적 활기. 당장 구글 드라이브 동기화를 한번 해 보라. 동기화 프로그램을 정지시킨 후, 임의의 파일을 지워도, 동기화 프로그램을 다시 돌리면 반드시 그 파일은 당신 앞에 나타난다. 즉 디지털 객체는 명령받은 이상은 임의로 죽여도 죽지 않는다.


(다음 칼럼으로 계속)


*이 글은 2020년 컴퓨팅적 사고와 서사-문학성을 연결하는 방법을 주제로 한 실험적인 전시회, 서울익스프레스의 <Code for Love>에 필자가 참여하면서 쓴 짧은 글을 더 길게 발전시킨 글이다.


오영진(메타버스 공연 <에란겔:다크투어>, <끝나지 않는 항해> 연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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