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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 정보라

최종 수정일: 2023년 2월 8일

어떻게 교수가 되는가? 이런 질문을 최근에 받은 적이 있다. 답변은 누가 물어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학생이나 대학에 종사하지 않는 외부인이 물어본다면 “논문을 열심히 써서 연구실적을 쌓은 뒤 교수임용 공고가 나면 신청해서 합격하면 교수가 된다”고 대답한다. 교수가 강사에게 말할 때에도 얼추 비슷하게 설명한다. “압도적인 논문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얘기를 나는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러나 진실은 교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한 교수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게 아니라 모든 교수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그 시간에 논문을 쓰라고 종용했던 어느 교수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어떤 교수에게도 찍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지원했던 교수임용이 무산되는 경험을 두 번 했다. 각각 서로 다른 학교였는데 양쪽 모두 최종 합격자를 뽑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의 논문 실적 때문이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그러면 어째서 나보다 논문 실적이 많은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나보다 논문 실적이 많은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고, 내가 가장 많은 실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형편없는 실적이었다면 내가 몸 담았던 분야 혹은 지원한 대학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 된다. 나보다 논문 실적이 많은 지원자가 분명히 있었는데 채용하지 않았다면 교수 임용의 기준은 논문 실적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 기준이 뭐가 됐든 자리가 났으니까 임용공고를 냈을 텐데, 아무도 채용하지 않았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지원했던 학교는 채용 무산 사실에 대한 공지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이상했다. 해당 학교 재직 중인 교수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메일을 보내서 채용이 무산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 교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뭐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는 채로 그냥 몇 달이나 혼자 고뇌하다가 스스로 포기했을 것이다.


일반 회사 채용 과정을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교수 임용 과정은 정말로 난장판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지원자에게 채용 기준을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합격했는지 불합격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예 누군가 채용을 할 건지 말 건지조차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지원자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지원자는 알아서 기다리다가 계속 연락이 없으면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잠재적인 고용주들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므로 항의는커녕 문의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교수는 사실 강사의 고용주가 아니다. 교수나 강사나 학교에 고용된 신분이다. 단지 강사나 신규 교수의 채용을 결정하는 인사권을 교수진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자기 돈은 줄 필요 없고 뽑을지 자를지 결정하는 권한만 가지고 있다. 이 아니 달콤한가. 교수에게는 연구나 강의가 아니라 신임 교수를 뽑는 그 순간이 아마 자신의 권력을 최고로 만끽하는 순간일 것이다. 지원자의 연구실적이나 강의평가 등 실력을 증명하는 자료보다도 내 맘에 드는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최종후보에 오르면 내가 끝까지 반대해서 채용을 무산시켜서라도 싫은 놈에게 교수라는 명예와 권력을 주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반적으로 질 좋은 일자리를 이런 식으로 기득권이 가로막고 안정적인 일자리 숫자 자체를 점점 줄여가는 중이다. 그리고 교수처럼 한국에서 사회적 위상이 높고 일정한 소득과 신분이 보장되는 자리는 이런 기득권의 의도적인 “진입장벽 높이기 운동” “내 권력 과시하기 운동” “내 사람 심기 운동”이 매우 격렬하다.


그들만의 리그에 대해 인공지능이 묘사한 그림. Midjourney bot 생성. 프롬프팅 오영진.

그러니까 강사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강사생활 11년간 국내논문 약 39편 정도를 썼고 (왜 “약”이냐면 기간과 학술지 종류에 따라 실적으로 인정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어서) 관련분야 번역을 20권 정도 했고 (이것도 학교에 따라 학술업적으로 인정하는 학교가 있고 아닌 학교가 있다) 인문학계의 SCI인 AHCI급 해외논문에 단독으로 두 편, 공저로 두 편을 냈다. 강의평가는 대략 5점 만점에 4.6점에서 4.8점 사이였다. 내가 있던 분야에서 내가 아는 비정규직 연구자 중에는 나보다 훨씬 논문 실적 좋은 분들이 최소한 두세 명은 더 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교수가 되지 못하나? 실력이 없어서?


강사 월급은 교수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학교 입장에서는 교수 안 뽑고 실력 있고 실적 좋은 강사들에게 10분의 1 임금만 주면서 논문 실적을 쌓고 “노오오력”하라고 희망고문하는 쪽이 열 배 이득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인문계 대학원, 그 중에서도 러시아 관련학과처럼 분야도 좁고 외부취업도 어려운 분야에는 아무도 진학하지 않는다. 대학원에 가면 석사 최소 2-4년, 박사까지 하면 줄잡아 10년은 돈 내고 일하면서 청춘을 바쳐야 하는데 그런 뒤에 강사로 또 10년 20년 지내면서 영원히 노오오오력만 할 수 있는 화수분 같은 재력과 불로장생하는 체력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자립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케이크라도 사드리고 가족이 아프면 돈 걱정 없이 병원이라도 제대로 가는 삶을 살고 싶으면 인문계 대학원 가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니까 대학원에 사람이 없다. 일년에 신입생이 한 명 정도 들어오면 다행이다. 내가 있던 분야 대학원생들은 함께 공부할 사람이 없어서 다른 학교 대학원생들과 연합 스터디를 한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대학의 학사 학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원도 석사, 박사 학위 파는 곳으로 전락한 지도 오래다. 나는 대학교 교양국어 시간에 논문의 각주 다는 법을 배우고 과제로 연습까지 해 봤는데, 내가 강사가 되고 나니 교양국어는 없어지고 교양국어 가르치던 강사 선생님들은 해고당했으며 대학원생들은 학위논문을 쓰고 있는데 각주도 참고문헌도 만들 줄 모른다. 그래서 한국어 각주, 영어 각주(MLA / APA / Chicago 스타일), 러시아어 각주, 한국어 참고문헌 목록, 영어 참고문헌 목록, 러시아어 참고문헌 목록 만드는 법을 내가 가르쳤다. 왜 내가 가르쳤냐면 석사 학생 지도를 했기 때문이다. 석사 학생 지도는 강의 이력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러므로 강의료를 받지 못한다. 나는 두 학기 동안 참고문헌부터 본문까지 읽고 토론하고 자료 찾고 지도하고 학생을 무사히 석사 졸업시킨 뒤에 심사비 십만 원을 받았다.


교수가 되는 어려움과 부조리에 대하여 인공지능이 묘사한 그림. Midjourney bot 생성. 프롬프팅 오영진.

교수들은 대체 뭘 가르치나? 나보다 월급 열 배 더 받으면서? 그리고 강사보다 월급 열 배 더 받으면 일 년에 십만 원 나오는 일을 자기들이 귀찮다고 강사한테 시키는 건 솔직히 양심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짓 아닌가? 그러나 교수는 강사한테 일 년에 십만 원 주고 이런 걸 시켜도 된다. 교수니까. 그러려고 교수 됐으니까.


대학의 위기가 어디서 왔냐면, 신자유주의에 온몸으로 동조하신 교수님들에게서 왔다. 달리 어디에서 왔겠는가? “강사노조”(아님, 한국비정규교수노조임)가 데모를 해서?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서? 대학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은 교수다. 대학에서 월급 제일 많이 받는 사람도 교수다. 그러니까 위기에 대한 책임은 교수가 져야지 강사 탓을 하면서 해고를 해대면 위기가 해결되나? 그러나 교수는 강사 탓을 하고 학교는 강사를 해고한다. 강좌 수는 줄어들고 학생들의 선택지는 사라지고 교수가 담당해야 하는 강의 시수는 늘어나고 교수들은 힘들다고 불평하며 더욱 강사 탓을 하고 학교는 더욱 강사를 해고한다.


그러니까 대학의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학문후속세대를 계속 해고하면서 위기가 해결되길 바라는 건 비논리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그렇게 흘러간다. 해고할 강사가 남지 않을 때까지 다 짜를 예정인지, 다 짤라서 해고할 사람이 안 남으면 어쩔 생각인지 궁금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멀쩡하게 박사학위 받고 연구하고 강의하며 교단이 내 자리이고 연구와 강의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믿었던, 지금도 조금은 믿고 있는 내 삶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애도한다. 그리고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남의 생계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 자기 권력 확인하는 데만 급급한 가해자 집단에 굴종하든가, 통보조차 없는 해고의 위기를 언제나 무릅써야 하는 피해자로 남든가, 그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구조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내가 이미 너무 많은 진실을 알아 버렸다.


정보라(SF작가, 슬라브 문학 연구자)










사진 아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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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병기라고 하고요, 이 내용을 newjournalist.today에 실어도 될지요? gugguro21@gmail.com 로 답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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