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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 / 마준석

컬트 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무기가 있다면 아마도 ‘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일 것이다.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에 등장한 이 무기는 형용 모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로마 시기에 번성하던 중동의 도시와 현대 투척 무기인 수류탄이 무슨 상관이며 그것이 성스러울 까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뿐만이 아니다. 외관은 군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보주와 똑같이 생겼으면서도 거룩한 십자가를 뽑으면 괴이하게도 3초의 정확한 지연신관이 작동한다. 이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신성 수류탄은 절륜한 위력을 자랑하는데, 성배를 찾아 여행하는 아서 왕의 기사들을 셋이나 요단강으로 보내버린 살인 토끼를 한 방에 폭사시켜버린다. 이 수류탄의 폭발력은 영화에서 묘사된 물리적인 살상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1975년 영화가 나온 이래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게임과 영화에서 이 수류탄은 재등장했다. 예컨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곤경에 빠진 주인공은 동일한 신성 수류탄으로 적들을 증발시킨다.

 



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 흉악한 살인 토끼를 바라보는 아서 왕과 기사들.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감독 테리 길리엄, 1975 ) 중
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 흉악한 살인 토끼를 바라보는 아서 왕과 기사들.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감독 테리 길리엄, 1975 ) 중

 

이 신성 수류탄이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까닭은 바로 그것의 모순적인 이름과 형태가 야기하는 파괴력 때문이다. 엄숙한 레퀴엠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토끼를 수류탄으로 터뜨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이러한 모순이 야기하는 파괴력은, 창작물에서 좀비가 ‘좀비물’이라는 구분되는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산송장 혹은 언데드(Undead)라는 다른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좀비에게서 삶과 죽음은 서로 모순적이지만 그럼에도 한 곳에 중첩되어 있어 폭발적인 공포의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짚듯이 좀비는 칸트적 무한판단의 예시이다. 특정한 술어를 주어에 귀속시키는 긍정판단 X is dead(X는 죽었다), 또는 특정한 술어를 주어에 부정하는 부정판단 X isn’t dead(X는 죽지 않았다)와 달리, 무한판단 X is undead는 죽음에 대한 부정을 긍정 판단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X is undead이라는 무한판단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서 모순적이되 생산적인 새로운 인식을 표현한다. 살아있되 충분히 살아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죽은 것도 아닌 존재자에 대한 인식 말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좀비에 대한 정의는 현대 사회의 파편화된 개인들에 대한 은유로 나아간다.

 

헤겔에게 있어서 무한판단은 단순히 판단의 형식인 것이 아니라 불일치를 통해 사변적 진리를 구현하는 정신의 운동을 드러낸다. 헤겔이 드는 예시는 흥미롭게도 인간의 성기다. 성기는 한편으로 연인 간의 사랑을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 현실화하는 숭고한 과정을 매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불결한 배뇨의 과정을 매개하고 있다. 정신은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의 모순과 불일치를 하나의 기관에서 결합함으로써, 이 불일치 내지는 부정성 자체가 바로 정신의 구성적인 원리임을 표현한다.

 

고귀한 것과 저급한 것의 결합을, 자연은 생명체에서 그 최고도로 완성된 기관인 생식 기관을 배뇨 기관과 결합하면서 천진난만하게 표현한다. ―무한한 것으로서의 무한 판단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생명의 완성일 것이다. 하지만 표상 속에 머무르는 무한 판단의 의식은 배설로서의 태도를 취한다.1)

 

표상의 층위에 머무르는 자연적 의식은, 그러니까 일상적인 의식은 생식과 함께 배뇨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생식과 배뇨는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기는 이러한 불일치와 실패 자체의 실정화이며, 우리가 생식과 배뇨를 각각 따로 사유함으로써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생식과 더불어 배뇨를 사유할 때, 그러니까 이 모순 자체를 사유할 때 우리는 정신의 층위에서 사유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순 자체가 실제로 세계의 구성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개인이 집합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동체가 각각의 개인을 자유로운 구성원으로 호명하는 것인지 두 가지 대립하는 논설에 대한 헤겔의 답은 간단하다. 그 두 가지 구성방식 모두 동시에 같은 정도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 두 모순적인 논설 사이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이해할 때, 우리는 국가에 대한 적합한 개념에 도달한다.

 

출처: CNN
출처: CNN

 

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처럼 우리 시대에 인기 있는 모순적 단어들이 있다. ‘대안적 사실’이라던가 ‘탈진실’. 이 단어들은 마치 선택 가능한 여러 동등한 진실들이 있는 것인 양 혹은 진실 너머에 진실보다 보다 더 진실된 진실이 있는 것인 양 구는 궤변이다. 이러한 궤변에 맞서 언론의 신뢰성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은 흔히 거짓과 기만으로부터 저기 은폐되어 있는 진실을 구출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니까 책임감 있는 저널리즘을 복원하는 첫 단계는 가짜뉴스와 팩트를 비판적으로 분간하는 능력인 미디어 리터러시를 함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짜와 진짜는 본질적으로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거짓 정보들의 난립으로 야기된 소통 지연과 혼란은 공론장의 만성적인 문제일 뿐 치명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문제는 유한한 인간들이 자유로운 정치 사회적 공동체를 이뤘을 때 따라오는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발화하는 이상 담화에서 혼란과 갈등은 필연적이기에, 혼란을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자유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반대로 공론장의 진정한 위험은 우리가 거짓과 진실을 함께 사유하지 않고 ‘표상적으로만’ 사유할 때, 그러니까 거짓과 진실을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서 따로 사유할 때 발생한다. 왜냐하면 실로 위험한 거짓은 진실로부터 산출된 거짓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신문사가 노인들이 공원에서 도박판을 벌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기사를 내보냈다고 하자.2) 이 기사는 모두 정확한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명 2026년 2월 “19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어린이공원에서 60·70대 남성 4명이 공원 벤치에 담요를 깔아놓고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지난 11일 오후 대림동의 또 다른 어린이공원에서도 중장년층 20여 명이 4명씩 조를 짜 도박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게임에서 진 일부는 중국어를 섞은 욕을 하면서 서로 삿대질을” 했을 것이다. 노인들이 공원에 모여 시설물을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점유할 때, 때때로 고성을 지르며 음주를 하고 쓰레기를 무단 투기할 때 이것은 분명 권장되는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정보들이 진실일지언정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진실들의 특정한 배치와 연관이 발생시키는 효과이다. 그러니까 보수 일간지가 노인 밀집 거주지역 공원 어디서나 벌어지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특히 조선족 밀집 거주지역을 선택했을 때, 그리하여 조선족들이 중국어로 욕설을 하며 마작 도박을 친다는 정보를 나열했을 때, 이것이 자연스러운 중국 일상 문화라는 어떤 조선족의 발화를 인용했을 때, 그리고 이 문제로 우리의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된다는 평가를 덧붙였을 때, 마지막으로 노인의 빈곤과 사회적 소외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고민 없이 글을 닫았을 때, 이 신문 기사에 적힌 내용은 모두 진실이지만 이 진실들의 특정한 배치는 중국인들이 한국 사회를 좀먹고 더럽힌다는 거짓된 주장을 은밀하게 전달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거짓과 진실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실로부터 거짓을, 또 역으로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조선일보

 

그러므로 거짓과 진실을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서로 상충하는 양자를 모순 속에서 함께 견지할 때, 우리는 노인 혹은 조선족을 사회의 부담 요소이자 사회를 교란하는 가해자로만 간주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경제문화적 소외로 인해 억압된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을 수 있다. 생산적인 해결책은 이렇게 모순을 함께 고려하는 사유 속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대안적 사실’이나 ‘탈진실’은 분명 담화 공간을 어지럽히는 형용 모순적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모순이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원리임을 밝힌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개념이기도 하다.

 

 

1)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정신현상학 1』. 김준수 옮김, 아카넷, 2022, 338쪽.

2) “도박장인 줄… 어린이는 못 노는 어린이공원”, 조선일보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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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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