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韓流)’가 세계인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대중문화로서 ‘건강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즐거움’은 미학적으로 볼 때 ‘재미’와 ‘만족’에서 비롯한다. 이 두 요소는 다른 나라의 대중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류’는 이 가운데 특히 ‘재미’에 주목한다. SM 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JYP 엔터테인먼트 등 지금 한류를 주도하고 있는 회사들은 한결같이 ‘entertainment’를 슬로건으로 표방한다. 진지하고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재미있고 즐거운 ‘예능’을 기획하고 생산하며 경영하는 일이 이들 회사의 목표이다. 즐겁거나 재미있지 않으면 그건 ‘한류’가 아니다. ‘한류’를 성공으로 이끈 다양한 요소 가운데 문화콘텐츠로서 한류가 다른 대중문화에 견주어 압도적으로 탁월한 지점은 시청자와 관객에게 확실하게 ‘재미’를 선사한다는 데 있다.
‘재미’를 이끄는 문화적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나? 이에 대한 답변을 나는 한민족이 유사 이래 겪은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에서 찾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밝은 모습이 과거에서 축적한 어두운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셈이다. ‘작은 반도’를 터전으로 삼은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동북아 열강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구미 열강들의 영토 확장과 세력 다툼을 위한 각축장이 되어왔다. 민족성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력한 타자의 물리적 압력과 인문적 정보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었지만, 한민족은 이 과정에서 나름의 생존전략을 체득하여 구사해 왔다. 그리하여 주변의 막강한 힘 앞에서도 민족의 보존과 자존을 위해 구사한 자구책(自救策)을 나는 ‘분절(分節)성’이라 칭한다.
‘분절성’이란 하나의 개체가 여러 개의 마디로 나뉘어 있는 성질과 마디로 연결되어 유연하게 움직이는 성질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절성은 대나무나 절지동물의 성질에 비유할 수 있다. 마디로 연결된 것은 구부러지긴 해도 쉽사리 부러지진 않는다. 한민족의 생존전략도 이와 유사하였다. 상대 타자에게서 전해오는 정보들에 유연하게 대처하여 이들을 개별적으로 수용하는가 하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주변국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변신할 수 있는 다양한 마디를 구비하는 한 편, 이들을 서로 연결하여 민족의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 전천후의 문화적 역량을 키워온 것이다. 한민족이 역사적 경험에서 체득한 ‘분절성’은 오늘날 문화콘텐츠로서 ‘한류’의 내적인 특성을 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절성은 우선 하나의 개체가 자기 안에 여러 개의 정체성을 지녀, 주위의 여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입체성을 띤다. 각각의 마디는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조화를 이룬다. 비빔밥과 피카소의 그림처럼 동일한 평면에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동일한 공간이나 시간에 열거되면서도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하모니를 연출한다.
BTS(방탄소년단)의 K팝에는 R&B, 랩, 힙합, 댄스 등 다양한 대중음악 장르가 혼합되어 음악 자체가 다양하고 복합적인 성질을 띠고 있지만 속도의 완급과 리듬의 강도에 차이를 두어 청중들이 감정의 긴장과 이완을 경험하게 한다. 그들의 <Mic-Drop>, <고민보다 Go>, 특히 <아이돌>의 춤동작은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는 듯 전(全)방위적으로 유연하며 마치 연체동물의 흐느적거림을 연상시킨다. 각 마디는 서로 다르면서도 유기적이고 입체적으로 서로 호응한다. 더구나 사물놀이 패와 마찬가지로 각 마디가 돌아가며 마디들의 중심에 서서 전체의 흐름을 수평적으로 주도하는 퍼포먼스는 ‘한류’의 분절성에서 기인한 입체성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입체성은 ‘한류’의 분절성을 공시(共時)적 지평에서 조망한 결과이다. 하지만 분절성을 통시(通時)적 지평에서 접근하면 마디의 연결에 따른 서사적 완결성에 주목해야 한다. ‘한류’의 입체성에서는 ‘비(非)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초점이라면, 완결성은 ‘타자의 개입에 따른 서사의 유연성’에 의존한다. ‘재미’란 기본적으로 ‘뜻밖의 것의 출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서, 입체성과 완결성에는 시청자와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예상 밖의 요소’가 유인(誘引)소로 개입해야 한다. 마디(에피소드)와 마디를 연결하는 데에는 항상 특정한 장치(매개자)가 요구되는데, K팝의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한류 드라마와 영화의 경우 앞과 뒤의 에피소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품의 흥행을 좌우하는 중대 사안이다.
‘한류’의 서사적 완결성과 관련하여 한류 드라마의 제작방식이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의 드라마는 백퍼센트 사전제작이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촬영이 진행되면서 수시로 대본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 소위 ‘쪽 대본’이 유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쪽 대본’이야말로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하는 견인차 노릇을 한다. 드라마 방영 초기에 시청률과 시청자의 반응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연출자와 연기자의 제안 그리고 당시의 문화 트렌드를 대본에 반영하기에 ‘쪽 대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작가나 연출자는 자신들의 계획에 시청자의 취향과 욕구를 반영하고 촬영 당시 ‘현장’의 사정을 고려하여 드라마의 디테일한 내용과 흐름을 탄력적으로 운용한다. 이렇게 외부(타자)의 사정까지 고려하여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방식은 <대장금>을 비롯한 대다수 한류 드라마의 재미를 주도하는 힘이다.
‘한류’의 분절성에 담긴 마지막 특징으로 ‘돌발성’을 들 수 없다. 완결성에서는 한 작품을 구성하는 에피소드들 간에 ‘연결’이 관건이라면, 돌발성에서는 ‘단절’이 관건이다. 마디 간에 연결고리가 끊기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단절의 순간에 이야기를 끌고 올라가는 내적인 폭발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돌발성은 급격한 반전(反轉)을 야기하는데, 단절적이지만 새로운 층위가 작품 전체에 무리 없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 이전부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응축된 긴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은 우발적으로 보이는 사건에서 필연적인 연관성을 파악하여 감동하게 된다. 관객에게 ‘놀람’을 유발하되 ‘아하!’ 경험을 선사할 수 있도록 스토리가 구성된다. 낯선 것의 출현은 이야기를 단절하지만 설득력 있는 미장센의 구성은 관객이 작품에 빠져들게 만든다.
돌발성은 표면적으로 낯설고 단절적이지만 전체 흐름에서 보면 내부에서 응축되어온 잠재력이 드러난 결과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우연이지만 속으로는 필연이다. ‘예기치 않은 급작스러움’은 K팝의 댄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BTS의 파워풀한 춤동작, 특히 칼춤(劍舞)은 전통무예인 태껸의 공격동작처럼 급작스럽고 돌발적인데, 이러한 반전(反轉)적 역동성은 동작 이전의 자세에서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동작에서 비롯한다. 태껸에서 공격 중에도 수비를 대비하고 수비 중에도 다음 동작을 예비하듯이, BTS의 춤동작에서도 정지한 상태에서 다음 동작이 이미 예비되어 있어야 하고 동적인 상태에서도 예상치 못한 각도로 동작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예기치 않게 드러나는 단절적인 춤동작은 역동성을 극대화하여 관객을 열광시킨다.
항간에서는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감독을 ‘삑사리의 예술가’로 평가한다. 그의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강점은 반전을 일으키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 자신도 “엉뚱함, 색다름, 예측할 수 없는 과감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의 <살인의 추억>도 그렇지만 <기생충>의 경우 스토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이 영화 구성의 주도(主導)동기가 반전적 역동성 혹은 불연속적 단층성에 기초한 돌발적인 내부폭발력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는 ‘반전(反轉)의 미학’에 토대를 둔다. 이렇듯 BTS의 역동적인 춤동작이나 영화 <기생충>의 반전적인 스토리 전개방식은 한민족이 단절적인 역사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충전한 실전적 내부폭발력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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