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필을 설정하세요》에 반항하기 / 오영진

1. 사이버스페이스의 낭만은 어디에?


90년대 사이버페미니즘 이론가 새디 플랜트는 여성화: 여성과 가상현실에 관한 성찰(Feminisations: Reflections on women and virtual reality)에서 사이버네틱스 기술이 기존의 남성성을 지울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태생적으로 익명화되고 혼종적인 공간으로서 인터넷은 '정체성의 실험'과 ‘젠더 넘나들기’, ‘정체성 관광’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고 현실의 남성성은 오히려 사이버스페이스와 불화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우리의 인터넷은 어떠한가? 혼종은 커녕 극한의 마초들과 인터넷 검열의 한계를 시험하는 패륜적인 언사들이 쏟아진다. 사이버네트워크에 대한 과거의 전망이 다소 낭만적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제노페미니즘(Xeno-feminism)>(2015)의 저자들인 라보리아 큐보닉스 그룹은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때 '사이버스페이스'가 본질주의적 정체성 범주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했다면, 동시대 소셜미디어의 경향은 급격히 다른 방향으로 휩쓸려왔고, 정체성을 숭배하는 극장이 되어버렸다."

<제노페미니즘>(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역, 미디어버스. 2019 0*0C)


지금 소셜 네트워크에 표현되는 인격들은 현실의 나와 유리되어 현실의 나를 압도하고 소외시킨다. 이 같은 경향은 두 가지 이유로 악화된다.


첫째, 현대인의 정체성 불안이 이 가상공간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precariat)의 증가와 공동의 정치로 연합하지 못하고 분자화된 개인들의 범람은 현실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거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상공간의 '무엇이든 될 수 있으나 그래서 무엇도 아닌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 정체성'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박탈해 버린다. 동시에 그 근본적인 허기 때문에 허상뿐인 아바타에 집착하게 만든다.


둘째, 가상공간의 근간을 이루는 알고리듬과 그에 따른 자본의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역할을 강요하고, 특정한 감정을 부추긴다. 알고리듬에 최적화된 어떤 인격을 수행하면 할수록 푼돈에 가까운 돈을 받으며 연명할 수 있도록 가상공간은 디자인되어 있다. 오늘날 네트워크의 아바타들은 나 자신의 가면이 아니다. 내가 아바타의 가면이 되어버린다. 근미래인들의 정체성의 불안을 담은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오프닝은 다음의 문구로 이렇게 시작한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한 정체성 영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희미해진 어느 미래, 사이보그인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정체성의 불안을 겪고 있다. 사이보그가 되기 시작한 후부터 자기 자신을 믿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이었을 때 여성인지 남성인지조차도 불분명하다. 쿠사나기는 자신의 유일한 생물학적 근거인 뇌와 자신의 의체 사이의 중계 모듈조차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한편 인공 생명체이자 해커인 인형사의 테러에 이용당한 청소부는 그의 기억 속 가족마저도 주입된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인다. 언뜻 보면 그들이 사이보그가 되거나, 강제로 기억을 지웠기 때문에 정체성의 불안을 겪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 반대다. 그들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정체성을 길어낼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쉽게 사이보그가 되고, 쉽게 기억이 지워진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사이보그와 마인드 업로딩 기술이 없는 우리 시대도 <공각기동대>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 공명한다.



2. 멀티페르소나 시대: 정체성의 불안과 탈취당하기 쉬운 자아


스페이스 씨(코리아나 미술관)에서 열린 <프로필을 설정하세요>전시는 동시대 우리들의 오갈 곳 없는 불안한 정체성에 대한 풍자로 시작한다. 김희욱 작가의 소울포미: '당신은 누구입니까?'(SOUL4ME: 'Who are you?')는 불안한 현대인에게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힐링 프로그램을 자처하며, 관객을 의자에 앉히고 유사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종이로 만든 다방면체 안에 숨겨진 눈동자를 관찰하며 명상하는 상품 '룩인디아이(Look in the eye)'는 무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문구를 인용하지만 그 눈동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 지는 솔직히 알 수 없다. 부서지고 찢기기 쉬운 조악한 상품의 품질은 그 자체로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다. 또한 관객들은 부스에서 제공한 무료 MBTI 검사에 빠져들지만 결국에는 확답 없이 상품 소개 페이지로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이로써 끝없는 소비만이 자신을 확신할 수 있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상품을 클릭며 장바구니에 넣고 빼는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인터넷 놀이이며, 존재론적 증명의 행위가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허기를 달랠 수 없다. 그 결과 우리는 반복충동적으로 찜하기와 좋아요 등의 버튼 누르기에 몰두한다. 쉬 웬카이의 작품 사람은 싫지만 너는 사랑해(I hate people but I love you)은 끝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윈도우 팝업과 의미 없이 사랑과 증오를 반복하는 페르소나 '아지아오'의 발화행위를 통해 인터넷 공간이 조울증의 구조 속에 있음을 폭로한다.


몰리 소다는 미 앤 마이 걸스(Me and My Gurls)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흩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하나의 방 안에 전시한다. 작가는 캠걸이 되거나 랜선 집들이 유튜버, 인스타그램 셀럽, 브이로거, 메이크업 BJ 등이 되어 그것을 보는 관객의 시선을 관음증적으로 만든다. 2017년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 실제의 1인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을 상영해 온 작가는 이 모든 페르소나를 일컬어 여자인 친구를 일컫는 젠더중립적인 은어 'My Gurls'라고 명명한다. 몰리 소다의 멀티 페르소나들은 자본의 흐름이 시키는 대로 각 플랫폼이 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주체성이 결여된 존재이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이 거짓 인격들을 몰리 소다는 기꺼이 친구로 받아들인다. 작가는 SNS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SNS의 중독성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그 결과물인 멀티 페르소나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정체성의 불안은 비단 현대인들의 것만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17세기에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한밤중에 겪었다.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의 감각과, 소속, 이름, 모두 나를 온전히 나로서 보증하는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데카르트의 자기됨을 보증할 수 없었다. 그러자 데카르트는 절망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헛됨을 선언하려 한다. 그 순간 "그런데 지금 의심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지 않는가?" 이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흔히 코기토로 알려진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코 우아한 깨달음이 아니다. 자신을 보증할 길 없는 자가 의심하고 있는 사실만큼은 확신해야 한다는 절규를 담은 명제다. 저 절규의 또 다른 판본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 때 접속은 인터넷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연결과 소통이 아니라 다른 판본의 아바타들에 매달려 몰입하는 일에 가깝다. 멀티 페르소나 현상은 우리들의 정체성 찾기의 곤란함을 담은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터넷 공간은 불안한 정체성 획득문제 뿐 아니라 가까스로 획득한 페르소나를 탈취당하기 쉽다는 데에도 그 문제가 발견된다. 작가 손드라 페리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가 전미대학농구협회 소속의 선수로 활동하던 중, 그의 신체정보가 게임 업계에 무단으로 제공된 사실을 고발하는 다큐를 찍었다. (잇츠 인더 게임 '17 혹은 진열과 보호를 위한 미러 개그(IT'S IN THE GAME '17 or Mirror Gag for Vitrine and Protection) 선수의 신체정보는 탈취되어 새로운 아바타로 팔린다. 캐릭터는 자유롭게 게임 속을 유영하지만 정작 원본의 인간에게는 그 어떠한 경제적 혜택이나 인격적 연결도 제공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의 아바타로부터 소외당하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은 대영박물관에 놓인 식민지 침탈물들의 이미지와 병렬된다. 가상공간은 현실을 식민화 한다.


김효재 작가는 유튜브 형식의 패러디 작품 썰(SSUL)에서 '김나라'라는 가상의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나라 자신의 인스타그램 사진이 도쿄의 하라주쿠 티셔츠 가게에서 프린트 되어 팔린다. 과장된 나르시시즘에 차 있는 그녀는 완벽해 보이지만 언제든지 탈취하기 쉬운 존재다. 그녀는 스스로를 관종으로 내세우고 기꺼이 상품이 되지만, 그 상품은 누구든 훔칠 수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기지만 관객들은 불안한 자아의 이미지를 작품에서 엿본다.



3. 육체가 없어도 나는 나


불안한 정체성과 탈취당하기 쉬운 자아라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가상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흥미롭게도 이 전시는 그에 대한 몇 가지 답안을 제시한다. 안가영 작가는 사이버스페이스에 상처받은 아바타들을 위한 쉴 곳을 세워 그곳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KIN거운 생활: 온라인에서 VRCHAT으로 구현한 셸터에는 각기 사이버스페이스의 입장권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모여 있다. 모델링 데이터를 복제당해 정체성을 잃은 혜지, 가상세계 안에서 거동 자체가 버거운 민지, 게임 내에서 성적대상화되었지만 이내 버려진 캐릭터 지혜 세 캐릭터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진술하기의 공간은 말없던 자에게 말을 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세운다. 지혜의 경우 자신의 곤란함을 진술한 후 신체를 무기화된 사이보그로 개조하는 극단적인 변형까지 감행한다. 메타버스의 열풍이 가득한 지금, 이 작품은 메타버스 공간은 현실세계와 달리 근본적으로 평등한가를 의심한다. 그곳이 여전히 젠더불평등의 공간은 아닌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자들의 연합을 선언한다.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의 책을 패러디하자면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메타버스'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루양의 <도큐쇼 도쿠시 헬로 월드>(2021)은 인도네시안 전통 댄서 2명과 일본 현대무용수 1명의 데이터를 혼합하고, 그 위에 작가의 얼굴을 합성해 성별과 국적, 나이와 스타일을 알 수 없는 인공합성인간을 선보인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이고, 여럿이면서도 하나인 이 기이한 댄서 '도쿠'는 인간 댄서라면 하지 않았을 요상한 춤사위와 눈빛을 보여준다. '도쿠'는 마치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듯 보인다. 특정한 패턴으로 읽을 수 없는 흘러넘치는 데이터들이 '도쿠'의 몸엔 있다.


안가영, 루양이 각기 셸터(공동의 장소)와 합성(공동의 몸)이라는 색다른 제안을 해 주었다면, 라터보 아베돈은 급기야 데이터로 이루어진 디지털 객체는 그 자체 독립적인 존재라는 선언을 한다. 작가는 한 아바타 컨퍼러스에서 아바타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허락한다.

당신의 데이터는, 당신이 그 데이터를 제공하는 서비스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No Body But Me 육체는 없지만 나는 나입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아버지 테드 넬슨은 모든 정보와 데이터를 연결하는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정신적 연결을 이루기를 바랐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얕은 구조의 웹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사물들의 연결망을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데이터는 메타데이터화되어야 한다. 데이터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기능에 복속되어 있지만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는 인간 뿐 아니라 기계들까지도 이해하는 프로토콜을 구성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라터보 아베돈이 주장하는 독립된 디지털 객체로서의 아바타 혹은 데이터는 이러한 메타데이터 환경의 심급에서 출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마치 <공각기동대>의 전능하고 위력적인 인공생명 해커 인형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도 디지털 객체의 독립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스스로 태어났어.

정체성을 묻는 사이보그 쿠사나기 소령에게 인형사는 차라리 자신과 합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형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인공 생명이지만 변종이 없고 그래서 곧 백신에 의해 절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DNA를 통해 변이하며 인류의 생존을 이어가기에, 변이가 없는 디지털 객체에 비하면 오히려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다. 쿠사나기는 잠시 망설이다 자신을 여전히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인지 묻는다. 그러자 인형사는 합성 이후에는 더 이상 너의 존재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쿠사나기는 묘한 표정으로 인형사와 합성을 수긍한다. 이로써 그들은 영혼의 불안과 절멸의 불안을 모두 해소한다. 독립된 디지털 객체들의 연합과 합성이라는 이 결말은 전시 <프로필을 설정하세요>의 작품들의 배치와 묘하게 공명한다. <공각기동대>의 문제의식은 한 때 SF적 미래로부터 왔지만, 이제는 당대의 리얼리즘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미 미래에 와 있는 것이다.


1990년대 피씨통신 초기 시절의 풍속을 다룬 영화 <접속>(1997)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유저들이 가상적 만남을 얻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우연히 서로 스쳐지나가는 낭만적 인연을 담았다. 2021년을 사는 우리는 이러한 환상의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자유로운 만남이 어떤 알고리듬의 결과인지 알고, 가상세계에서의 인격이 현실의 자아를 잡아먹지 못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의 불안이 사라진 다음에야 우리는 우리의 아바타를 진정한 디지털 객체로 존중할 수 터이니 말이다. 유연한 인격의 분화라는 메타버스의 거짓말에 대항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자아의 확신성을 향한 집착을 버리고 불안함을 경유하는 모험을 할 수 있을까? <프로필을 설정하세요>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반항적으로 배치된 사이버펑크계열의 전시다.


*이 글은 2021년 코리아나 미술관의 전시 <프로필을 설정하세요> 리뷰를 개고한 것이다.


오영진(교과목 <기계비평>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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