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감별사’가 된 K방역
전 세계의 장애인이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미국 앨라배마주는 확진자가 증가하자 중증장애인, 발달장애인, 중증 치매환자 등에 대한 인공호흡기 지원을 후순위로 할 수 있다는 지침을 발표했으며, 워싱턴주는 ‘에너지, 신체능력, 인지 및 일반 건강상의 여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환자를 외래로 전환할 것을 권고했다. 이탈리아의 의료 지침은 젊고 건강한 환자가 노인환자나 약한 환자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치료되기 때문에 의료자원 할당 시 나이와 장애를 평가하라고 주문했으며, 영국은 방대한 분량의 코로나법(Coronavirus Act 2020)을 제정함으로써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보장의 기존 원칙과 기준을 완화하는 국가 자원 할당 및 효율화 조치의 근거를 마련했다. 비상사태를 맞은 국가들이 하나같이 모두의 생존을 이유로 장애인의 ‘생존 자격’을 묻고 있다.
비교적 방역이 안정적이었다는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구의 장애인운동가 이민호는 “우리는 코로나블루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코로나블랙”이라며 자신이 버려진 것 같다고 했다. 차별이 만연하여 그것이 차별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방역 규범은 정작 감염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 재난 시 더 많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거나 무시하였으며, 공식적으로 ‘덜 중요한 존재’로 치부했다. 즉, 장애화된 사회의 정상 방역은 장애인과 같은 사람들을 표준화된 방역지침에 맞지 않는 비정상의 몸, 타인에게 쉽게 전파되고 쉽게 전파시킬 수 있는 위험한 몸, 스스로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이행할 수 없는 의존적인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원의 배급을 요구하는 소모적인 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2월과 3월 장애인과 그 가족이 감염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위기대응 시스템으로 인해 죽어나갔다. 제40회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은 “재난의 크기가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 않다”며 “재난이 닥칠 때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비해 불평등하게 더 큰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말 뿐이었다. 대통령 메시지가 있기 이전인 3월에는 제주에서 발달장애 청소년과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언급 이후인 6월에는 광주에서 발달장애 청년과 어머니의 극단적인 선택이 이어졌다. 대안 없는 거리두기 조치가 초래한 고립의 결과였다. 이윽고 역대 최고치라는 3차 추경이 통과되었지만 발달장애인 지원 예산은 오히려 큰 폭으로 삭감되었으며, 장애인을 위한 추가 방역대책이나 긴급 사회보장 예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부가 증액한 유일한 사업은 장애인거주시설(집단수용시설) 예산이었다.
흔히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지금 그 세계에 속한 이들(즉, ‘모두’에 해당하는 이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장애인이 몸소 느끼는 ‘우리는 결국 버려질 것’이라는 막대한 두려움은 유례없는 재난조차도 자신과 가족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절망, 그렇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자신의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인에서 온다. 지금과 같은 전방위적인 위기에서조차 장애인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공적 조치, 오히려 장애인을 암흑 상태에 그대로 두는 것이 공익적으로 더 나을 수 있다는 판단과 결정, 그리고 이런 논리가 위기를 빌미로 더욱 합리성을 얻어가며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문화가 국가의 경계 밖으로 사람들을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K방역은 국민을 지킴과 동시에 누가 국민인지 구별해 주었다.
재난 이전의 재난 : ‘장애인 모순’
동료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늘 ‘장애인’으로 가장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사람들의 위치는 재난이 닥치자 어느 새 맨 앞줄이 되어 있었다. 한 지방의 폐쇄병동에 20년 간 격리 수용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아무개 씨의 삶은 경계 바깥의 존재가 얼마나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공동체는 특정 감염병과 종교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고 가두어 두었던 것은 바로 그 공동의 권력이었다. 특정한 몸을 ‘장애인’으로 일정하게 선별하여 분류함으로써 국가적으로 관리해 온 역사(예를 들어, 장애등록제)를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짚어야 할 것은 ‘장애인’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자 그 선별‧분류의 기준이 되어온 의료적 측면은 그것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별 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2015년 발생했던 메르스(사망자 38명, 확진자 186명, 격리대상자 1만 6,693명)는 국가의 감염병 대응체계 내에서 ‘장애인’에 대한 대책이 전무함을 드러냈다. 메르스로 인한 전체 사망자 38명 중 33명이 신장장애인이거나 만성질환자였다. 자신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확진자가 발생하여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뇌병변 장애인이 14일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한 지체장애인은 활동지원서비스를 연결 받지 못해 고립되기도 했다. 의료적으로나 복지적으로나 가장 우선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명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재난 상황이 되자 시스템은 오히려 이들을 배제하였다. 나아가 정부는 2016년 장애인단체에서 제기한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코로나19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줄곧 거부해왔었다.
2017년 포항 지진 사태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여 별 달리 대피할 방법이 없는 신체장애인, 대피방법을 알고 있더라도 관련 대피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아 실행이 어려운 시각장애인, 재난 경고를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 상황 자체를 인지하고 대처하기가 어려운 발달장애인 등의 상황이 나타났으며, 2019년 강원도 산불 사태에서는 청각장애인이 국가재난주관 방송사인 KBS는 물론 MBC, SBS 지상파 뉴스를 통해 수어로 정보를 전달 받지 못해 가슴을 졸여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과정으로 재난안전관리 기본법에 장애인이 안전취약계층으로 규정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한국에는 국가 차원의 장애인 재난 대책은 물론 기본적인 재난 통계에서조차 장애(인)를 반영하여 분석하는 체계조차 없다.
비단 재난 위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은 만성적인 건강불평등의 위기에 있다. 장애인의 건강검진 수검률은 64.8%(중증장애인의 경우에는 54.0%)로 비장애인(74.1%)에 비해 현저히 낮다(국립재활원, 2016, 장애와 건강통계). 장애인 1인당 평균 2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만성질환을 지닌 비율 역시 81.1%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보건복지부, 2018, 2017년 장애인실태조사).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여기는 장애인은 전체 인구 대비 절반 수준이지만(전체 인구 31.0% 대비 장애인 14.9%), 병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미충족 의료 경험은 두 배에 달한다(전체 인구 8.8% 대비 장애인 17.2%, 동일자료). 의료적 필요와 그 기준에 의해 특정한 집단을 ‘장애인’으로 규정하였음에도(적어도 그렇게 설명되어 왔다) 정작 이들은 의료체계와 사회보장에서 늘 우선순위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장애인 모순’은 코로나19 위기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1월에서 6월까지 : 잊혀진 존재에서 예외적 존재로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1일 코로나19가 세계적 유행 즉, 팬데믹 상태에 돌입했음을 선언하였다. 이즈음 각국 장애인단체들의 우산조직인 국제장애연맹(IDA)은 장애포괄적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으며, UN의 한 회의 자리에서는 정부와 지역사회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장애인 차별이 심각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경고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2월 23일 감염병 위기단계를 ‘심각’으로 격상하고, 감염병 예방법을 개정하여 감염취약계층 지원을 구상하는 그 순간부터 장애인을 잊고 있었다. 이미 재난안전관리 기본법 상 안전취약계층으로 장애인이 포함되어 있지만 정부가 설정한 감염취약계층에는 어린이, 노인, 임산부 및 기저질환자만이 명시되었다. 과거의 숱한 사회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다시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재난 시 발생할 수 있는 차별과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사회보장 전략은 검토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먼저, 장애인이 감염의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장애인이 감염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고 취약하며, 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장애인은 재난 초기 정부 및 지자체의 각종 브리핑과 재난 방송에서 수어통역과 자막, 화면해설 등이 제공되지 않은 것처럼 감염병에 관련된 예방 정보에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접근할 수 없으며, 이미 존재하는 건강상의 특성과 건강불평등 환경으로 인해 확인된(또는 잠재된) 기저질환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수용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함으로써 개인의 면역이 상당히 낮아져 있고,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서비스기관에서 집단화된 형태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특히, 중증장애인일수록 타인의 지원을 통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방역수칙을 이행해야하기에 신체 접촉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부의 예방, 자가격리 및 확진, 복구 및 회복 등 전체 대응과정은 이러한 장애인의 상황을 배제한 채 설계되고 실행되었다.
구체적으로 정부의 방역은 건강관리를 하는 중산층 비장애 성인의 몸을 기준으로 두고 있었다. 정부의 방역 기준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2m 이상 거리두기가 가능한 집에서 살아야 하고, 선별진료소로 이동하거나 검진을 받을 때 스스로 운전하는 자차가 있어야 했다. 자가격리나 확진이 되면 집이나 병원에서 스스로 생활하며 필요한 조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별다른 손상이 없는 상태이거나 평소 질환은 병원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했다. 때문에 자가격리를 통보받은 장애인이 생활지원을 받지 못해 혼자서 2주를 버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활동지원사는 근무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였다. 신장장애인은 자가격리 기간 동안 투석을 받지 못해 생명을 위협받았고, 구청은 구호품으로 생쌀과 생배추를 보내었다. 뒤늦게 마련된 정부 지침으로 생활지원 인력의 파견이 가능해졌으나 장애인이 10평도 되지 않는 원룸에 살고 있어 오히려 지원을 거부하는 일마저 생겨났다. 지역의 기존 유휴시설을 활용한 장애인 자가격리 시설은 기본적인 편의시설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장애인콜택시는 선별진료소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다.
확진이 될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신장장애인이 양성 판정을 받았음에도 특별한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경증으로 분류되어 입원하지 못하고 집에서 대기하다 이틀 만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자신의 병세를 표현하기가 어려운 발달장애인이 별다른 의사소통 지원을 받지 못하다 결국 폐렴 진행이 확인되기도 했다. 평소에 병원을 이용할 수가 없어 본인의 기저질환 여부를 알지 못하는 장애인이 증세만을 기준하여 경증 환자가 가는 생활치료센터로 들어갔다 병세가 급격히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그마저도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집에서 무턱대고 대기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 또 확진자가 집에서 대기하는 동안 활동지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누가 할 수 있는지가 답답해졌고, 확진자는 별 다른 선택권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돌봄’을 받아야 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이어졌다. 병원에 장애인을 위한 의사소통이나 생활지원, 또는 그 밖의 필요한 지원체계가 전무했다. 장애인 확진자를 같이 확진을 받아 입원한 가족이나 활동지원사가 지원해야 했고, 그마저도 어려워지면 모든 부담이 간호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장애인 확진자가 병원에 입원할 경우 의료 인력이 파악하여 조성하여야 할 지원 매뉴얼이 없어 간호사가 혼란에 빠졌으며, 장애인의 가족이나 지원자의 출입이 제한되어 어떤 자문이나 협력도 구할 수 없었다.
3월이 되자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바이러스보다 하루하루의 삶이 더 공포가 되었다. 학교는 물론 지역사회서비스 기관(복지관, 주간보호시설 등)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그나마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지원체계가 붕괴되었다. 장애인 개인이 중심이 된 개별 지원보다는 가족 또는 지역의 특정기관에서 장애인의 삶을 책임지도록 시스템을 설계해 온 역사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가족과 기관 양 축 중에 기관이 문을 닫으니 가족이 죽어나갔다. 상당한 시간을 지역사회 기관에 의존했었던 중증의 장애인일수록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발달장애인과 중복장애인이 대표적이었다. 1:1 대인서비스인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가운데 서비스기관들이 운영을 중단하기 시작하자(여기에 학령기 아동의 경우에는 학교조차 몇 차례 개학이 연기되자) 그 당사자와 가족이 오롯이 책임을 전가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생활방역으로 전환한 지금도 기관은 책임성 문제로 인해 축소되고 소극적인 형태로 서비스를 제공해 오고 있으며, 재난 시기를 감안한 추가적인 사회보장 확장 전략이 별도로 없어 장애인 가구의 돌봄과 생계의 이중고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한편, 발달장애인이나 중증장애인이 상당수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부분에서는 국가의 방역 초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시설 내의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설의 장애인으로부터 지역사회를 보호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의료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사회적 필요에 의해 시설에 코호트격리를 강제하거나 권고했다. 경기도, 대구시 등에서는 시설이 선택할 수 있는 ‘예방적 코호트 격리’를 공식 권고하였으며, 경북도는 도내 573개소의 사회복지시설을 ‘위험구역’으로 설정하여 2주간 강제 코호트 격리를 시행했다. 이러한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강력한 통제는 갈수록 심해졌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필요한 경우 예방적 코호트 격리 조치를 시설에서 적용하도록 안내하였으며, 사회복지시설 대응 지침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시설 입소자의 면회‧외출‧외박 금지” 원칙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심지어 사회복지시설이 준수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기관에서 발생한 확진자의 검사 및 치료에 드는 비용에 대해 구상권을 청구할 것이라며 경고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신체 접촉을 하는 종사자는 통제되지 않지만 입소자는 통제되는 기본권 침해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외부와의 교류가 급격히 줄어들거나 차단되고 있다. 탈시설을 위해 상담 해오던 한 장애인은 재난지원금을 받았지만 시설 앞 슈퍼조차도 갈 수 없게 되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장애인은 동일한 재난을 겪고 있지 않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앞 다투어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본소득이니 전국민 고용보험이니 하는 대논쟁이 시작되어 버린 시대, 천문학적인 예산을 연신 갱신하며 1차, 2차, 3차 역대급 추경을 이어가는 시대,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며 호들갑을 떠는 시대를 장애인은 살고 있지 않다. 장애인은 폭풍 같은 지난 반년을 보내고 나서야, 죽음으로 재난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고작 스무 쪽 남짓한 대책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어떤 현실도 바꾸지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방역의 핵심이었던 공적 마스크 배급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이르렀지만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입이 보이는 투명 마스크는 여전히 가족과 봉사자들의 손을 빌려 한땀 한땀 제작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결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첫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응 매뉴얼은 초라하다. 지침의 대다수 내용은 지난 1월, 아니 메르스를 겪은 5년 전에 이미 만들어졌어야 할 내용들로 건강권 중심의 지원방향을 담고 있다. 선별진료소에 수어통역을 배치해야 한다거나, 장애인 지정병동을 운영하고 이동지원을 해야 한다거나, 장애인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는 가족이나 종사자들에게 방역물품을 제공하라거나 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꾸준히 주문하고 있는 집단 시설 상태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신속한 퇴소 및 퇴원 보장, 장애인을 고려한 추가적인 사회보장과 차별 금지 대책 마련, 근본적인 코로나19 회복 및 복구조치로서의 집단수용시설 폐쇄와 탈시설화 전략 강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기본적인 의료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마저도 ‘권고’에 불과하다. 즉, 중앙정부가 공공기관과 지방정부에 권하는 것으로 여력이 되는 만큼 이행하면 된다. 매뉴얼의 어디에도 각각의 공적 주체가 어떤 책임을 지는지 규정이 없으며, 그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재정과 역할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도 들어있지 않다. 개괄적인 매뉴얼이 발표되었으니 추후 예산이 수반된 세부지침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이들은, 관련 예산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3차 추경을 보며 다시금 좌절했다.
정부의 대응은 장애인을 잊혀진 존재에서 예외적 존재로 만들어왔다. 이미 기존의 방역체계에 ‘장애인’이 없었다. 뒤늦게 발표된 매뉴얼은 장애인 권리를 여력이 되면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공식화했다. 마치 대남병원에 수용되었던 정신장애인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병원 밖으로 나와 잊혀짐은 면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이후 돌아갈 곳은 여전히 동일한 규범이 작동하는 예외 공간 밖에 없는 것처럼, 장애인의 삶은 코로나19 이전과 변함없이 재정과 행정의 여분이 남는 한에서만 설계되고 허락되고 작동된다. K방역은 현재 한국의 장애인이 국가에서 어떤 존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매우 솔직하게 보여주었으며, ‘장애인’은 곧 ‘가장 후순위의 국민’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국가는 장애인과 같이 재난에 취약한/취약해진 이들을 공동의 생존에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여 K방역의 영토 바깥으로 내몰았으며, 약한 몸들을 집합시켜 관리하였던 공간을 ‘위험시설’로 지정하여 분리‧배제됨으로써만 영토 내에 머물 수 있게 배치했다.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에 대해 많은 상상과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이 암흑을 마주하고 다루지 않는다면 이후 세계 역시 특정한 몸과 집단을 규정하고 배제하는 장애화에 의해서만 운영될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0년 6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코로나19와 장애인의 삶 : 장애인 종합대책 마련 토론회』(공동주최 국회의원 남인순, 맹성규, 박주민, 박홍근, 배진교, 장혜영, 최혜영) 자료집을 참조할 수 있으며, 관련 영상으로는 다큐멘터리 『감염병의 무게』(연출 장호경)가 있다.
링크1. ‘코로나19와 장애인의 삶 토론회’ 자료집 http://cafe.daum.net/dgsadd/J9fx/205
링크2. ‘다큐멘터리 감염병의 무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_J-Oekr6-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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