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게 묻는 것
몇 달 전이었던가, 6살 아이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에 푹 빠졌다. 아이에게 그것은 총체적 지식의 산물과 같았다. 건국신화부터 근대까지 역사적 사건을 망라한 노래를 통해 아이는 가늠하기 힘든 시간의 정량적 개념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그 시간 속의 사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시도를 하였다. 그 시도는 곧 나에게 질문으로 이어졌는데, 사실 나의 부정확한 지식으로는 쏟아지는 질문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그 이전에, 그 모든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들부터가 문제였다. 우선, 노래 속의 시간의 총량과 타임라인을 파악하는 것인데,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과거의 사람인지, 그 시간과 우리의 시간 속에서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윤리와 상식의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어, 기생집에 가지 않기 위해 아끼던 말의 목을 자르는 김유신 이야기나, 일본 장수와 함께 자결한 논개의 이야기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자신의 문제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 것이 정당화되고, 현재 기준의 윤리로서 형사처벌 감인 반려동물을 참수하는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가 미화되는 서사뿐 아니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여성의 육체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방법이 최선이거나), 사회적 낙인이 찍힌 여성이 지위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죽음밖에 없다는 식의 역겨운 가부장적인 주술 따위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런 문제들을 전부 아이와 공유할 수는 없다. 적당한 수준에서 지적하고,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요약한다. 어차피, 지식은 수정되고 보완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것조차도 성장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얼마 가지 않아 아이는 100명의 위인들을 다 외워 버렸다. 그리고 유사한 노래들, 예를 들어 40명의 위인들, 33명의 과학자 등등. 그렇게 아이는 세상의 다양한 역할과 성취들이 혼재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어떤 것들이 기념되는지 학습한다. 물론 신화화된 서사를 통해서, 때로는 누락된 정보들을 부모를 통해서 찾아가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보며 내게 물었다.
“다른 위인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이전에, 나는 죽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일까?
아이의 세계에서 부모와의 관계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의 전부, 즉 내 생존의 전부에 가깝다. 양육자와 피양육자로서의 각자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고, 양육자의 조력 없이는 피양육자인 자신이 독립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의 죽음은 안전한 세계와의 단절이자 생존의 위협이며, 자신의 죽음은 이제 막 누리기 시작한 신비로 가득 찬 기쁨의 세계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어느 경우에도 죽음은 비극으로 수렴된다.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것
“그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이 질문의 답을 나는 알고 있지만,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허구의 이야기를 적당히 꾸며내고 포장해서 아이를 기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음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다. 오직 내가 목도해 온 수많은 죽음은 현상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죽음은 세계의 종말이자, 모든 정신적, 신체적 연결 회로가 끊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후의 세계도 믿지 않으니, 따라서 죽음 이후에 우리가 평화로운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답을 재촉한다. 나는 부모이기에 너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대답한다. 내가 믿는 부분들은 제외하고, 알고 있는 부분들만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쿨하게 말이다.
“응, 위인들은 다 죽었지”
사실, 아이는 죽음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것은 온전한 상태에서 이탈하는 것,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은 채로 유지되는 불가역적인 상태, 그렇게 너의 호출에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것.
아이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빠도 죽나요? 아빠가 죽으면 나는 누가 돌봐 주죠? 아빠는 언제 죽나요? 나도 죽어요? 나는 언제 죽는 거죠?
나뿐만 아니라 너 역시 나와 같은 죽음을 맞이한단다. 그걸 피할 수는 없어. 그건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야. 근데 문제라고 말하기도 힘들지. 해결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은 문제의 범주에 있는 것도 아니야. 그건 그냥 사실이란다.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고, 나만 아는 것도 아니야,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거지. 나머지는 나도 모른단다. 다만 너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식으로든 삶이 지속할 수 있다면, 그렇게 너는 영원했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너의 시대에 실현 가능한 과학 기술이 발견된다면 멋질 것 같다. 근데 우리의 삶이 영속적이면 그게 아름다운 일일까? 그것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만은 영원했으면 좋겠어. 내 삶이 지속되는 순간까지 네가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한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영원이겠지만, 어쨌든 넌 내 세계의 소멸 이후에도 영원히 존재했으면 좋겠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너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 너와 다르지 않지. 내가 아는 것은 평범하게 살아갈 만큼의 지식뿐이야. 사실 그것조차 잘하지 못할 때가 많지. 내가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들이 뒤죽박죽 스쳐 지나갔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의 경계 사이에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에 아이는 곧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경우이든 아이에게 삶의 서사는 단절의 비극으로 끝나니까. 그렇기에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아이를 안고는 적당한 가정법들을 써가며 달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사실, 아빠도 언젠가 죽어. 언제 죽는지는 몰라. 그런데 네가 어른이 되면 아빠가 돌봐 주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있어서, 그때까지 우리가 재미있게 지내면 돼.”
너의 불안을 보상해 주는 방식으로 나는 너의 질문과 협상을 한다. 지켜지지도 만족스럽지도 못할 수 있는 거래를 하면서. 나는 너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위해 창조자를 찾던 복제인간 로이(룻거 하우어)는 자신을 제거하려던 복제인간 사냥꾼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살려주고 나서 이렇게 말을 남기고 죽는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믿지 못할 것들을 봤었지. 오리온성좌 언저리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기지 근처 암흑 속에서 번쩍거리던 섬광들을 봤어.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군.”
복제인간 로이는 마지막 순간에 죽음에 대한 짧은 회고를 여러 시제를 써서 전달한다. 인상적이었던 경험과 기억을 꺼내오는 과거 시제와, 곧 소멸할 순간의 체념을 담은 미래 시제. 그리고 아직 죽음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죽는 시간-time to die-이라고 현재형의 동사를 사용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 문장에서 die는 to 부정사의 형용사적 용법으로 사용된다)
나는 로이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죽음의 현재성에 대해 상상한다. 삶은 다양한 시제가 현재성 안으로 수렴되며, 심지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죽음의 동사도 온전하게 함께 작동된다는 것을. 죽음은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획득된 것으로 이미 삶의 일부로서 함께 기능하고 있으며, 나의 미래에 도래할 최초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기에 내가 너와의 우연한 시간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약속이 울음을 그치게 할 목적으로 제안한 즉흥적인 거래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우리는 원래 하나의 점처럼 작았다고 해.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풍선처럼 터지면서 계속 커지는 거지. 그러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다가 별도 만들고 우리도 만들게 된 거야. 그러다가 언젠가는 원래대로 하나의 점처럼 되고 그러면 그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지금 이 모습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간에 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나는 말이야, 시간은 그냥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같은 건 애초부터 없는 거지. 그냥 운동만이 있을 뿐인 거야. 모든 물질은 운동을 통해서 충돌과 긴장이 생기고 우리가 아는 모든 실체는 사실 운동의 결과물인 셈이지. 시간은 인식이 운동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한 만들어낸 협소한 단위에 불과하지 않을까. 결국 인식도 물질의 연결고리에서 생성되는 것이잖아. 그렇기에 죽음이 인식의 단절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너무 짧아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거야. 그리고 우주가 무한에 가깝다면 곧 너와 나는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겠지. 그러니 그게 뭐든 걱정할 필요가 없어.
물론, 아직 이 괴상한 스토리를 아이에게 들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로 아이는 다양한 주제의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가져온다. 나도 모르는 세계와 판단하기 힘든 경계에 대해서. 언젠가 그 질문들조차 멈추는 시간이 오게 되겠지만, 내가 너를 이 세계로 초대했기에 그때까지는 너의 호출에 성의있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최대한 적절한 답변을 찾아보겠지만, 단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너의 기대만큼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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