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enlightenment)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단어가 ‘야만과 무지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성숙한 정신 상태로 진입하는 과정’을 뜻함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한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자. 계몽이란 무엇이었는가? 유럽사에 약간의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18세기 언저리에 유럽 사회가 무언가 지식과 이성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답할 것이고, 개중에는 “이성의 지배”, “세속화”, “관용”, “근대적 주체” 같은 키워드를 떠올리는 예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18세기 유럽이 계몽의 시대임을, 나아가 계몽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20세기 유럽 계몽주의 연구사의 궤적 일부를 살펴보면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약간의 배경지식을 제공하고자 한다.1)
고전적 계몽주의 해석과 벤투리의 도전
장기 18세기의 영국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시대가 정신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개화되었으며 또 그러한 개화가 진행 중인 시대라 믿었다.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내가 이처럼 우리의 개명된 시대(this our knowing age)를 가르치기라도 할 것처럼 군다면, 이는 어마어마한 허영심 혹은 오만함의 발로로 지탄받을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학예의 흥성과 진보에 관하여」나 「기예의 개선에 관하여」와 같은 평론에서 흄은 야만스러운 고대로부터 어떻게 근대의 문명화된 상태가 발달할 수 있었는가를 논하며,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버크는 자신의 시대를 “이 계몽된 시대”(this enlightened age)라 지칭했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들이 어떤 구체화 가능한 사조 혹은 정치적·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계몽’이 존재했다고 인식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18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프랑스의 ‘계몽철학자’(philosophes), 독일의 ‘계몽가’(Aufklärer)에 상응하는 집단을 찾기 어려웠다. 19세기에 이르면 직전 18세기에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있었고,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를 촉발한 사상운동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은 나타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대범주로서의 ‘Aufklärung’의 영어 역어로서 ‘Enlightenment’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다.
1930년대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20세기의 계몽주의 이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고전적인 연구서들이 나왔다.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의 『계몽주의 철학』 (Die Philosophie der Aufklärung, 1932)와 문예학자 폴 아자르(Paul Hazard)의 『유럽의식의 위기, 1680-1715』 (La crise de la conscience européenne (1680-1715), 1935)가 그것이다(두 책 모두 1950년대에 영어로 번역된다). 각각 그 나름의 방식으로 깊이와 풍부함을 갖춘 두 저작은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이성을,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자들을 시대의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고전적인 계몽주의 해석을 확립했다. 영어권 역사학계에서는 1960년대에 피터 게이(Peter Gay)의 노작(勞作) 『계몽주의의 해석』(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전 2권, 1966-69)이 출간됐다. 카시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는 게이 역시, 영국인들을 무대에 잠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철학적·과학적 이성으로 무장하여 기독교의 지배에 맞선다는 전통적인 서사를 이어받았다.
계몽주의를 곧 철학적 이성과 동일시하는 관점에 반기를 들고 계몽주의 연구의 지성사적 전환을 촉진한 것은 프랑코 벤투리(Franco Venturi)의 1969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을 출간한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 1971)이다. 벤투리는 카시러와 게이가 대변하는 철학사적 접근과 함께, 계몽사상을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맑스주의 사회사가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계몽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계몽은 왕정·전제국가에 대항하는 공화국의 투쟁이라는 18세기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 정신의 발전’과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 대신 공화주의와 같은 당대 정치사상의 구체적인 전개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계몽은 독일과 프랑스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 유럽적인 사상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활발하게 교류하면서도 각자의 의제를 형성한 유럽 각지의 계몽주의자들을 따라, 연구자들 또한 지역별로 고유한 계몽사상의 상호작용을 추적해야 한다. 이후 계몽주의 연구사는 대체로 여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공화주의와 함께 당대의 정치적 논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정치경제학·상업담론 및 국제정치사상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탈리아와 스코틀랜드를 포함해 프랑스와 독일 외의 계몽사상을 추적하는 연구가 등장하면서 계몽주의 연구는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랐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지성사의 형성: 포브스, 필립슨, 혼트
영어권 학술장에서 계몽주의 연구의 폭과 깊이를 넓힌 대표주자 중 하나는 단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라 할 수 있다. 벤투리의 강연 이전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의 초석을 놓은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옥스포드대학교의 근대사 흠정교수였던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 1914-2003)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친 던컨 포브스(Duncan Forbes, 1922-94)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는 이중 후자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조명해본다.
195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포브스는 정치사상에서 근대성을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원리와 문제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또 학문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로 규정했다. 이때 18세기 스코틀랜드는 급격한 정치경제적 변화를 역사이론적 모델로 설명하려는 정치의 “과학”(science)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사상이 등장하는 시공간이었으며, 흄과 스미스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최초의 근대적 정치이론가들이라 할 수 있었다.
포브스의 문제의식이 가장 철저하게 추구된 작업은 『흄의 철학적 정치학』(Hume’s Philosophical Politics, 1975)이다.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토대로 “근대 자연법 이론”(A Modern Theory of Natural Law)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이래 그로티우스(Hugo Grotius)와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d)의 저작을 중심으로 인간 사회의 경험적 관찰로부터 자연법적 원리를 도출하는 근대 자연법사상이 확산되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자연법학자들 및 도덕철학자들은 근대 자연법 이론과 베이컨·뉴턴의 실험철학적 접근법을 결합하여 인간의 심리에서 정치적 권위의 성립, 문명의 발전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성찰했다. 포브스의 주인공인 흄은 인간 본성의 원리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면서, 그것이 역사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상이한 면모로 발현됨을 인식했다. 흄은 인간에게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고 또 타인의 상태에 공감하려는 사회적 본성이 있다고 규정했으며, 이러한 사회성 및 소유권의 보장에 기초하여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또 근대 상업사회로 발전해왔다고 설명하면서 개별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역사적 발전에 이르는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유 모델을 구축했다. 그의 정치론은 당대의 지배적인 도덕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대항하여 정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일종의 “응용철학”(Applied philosophy)이었다.
포브스는 흄을 통해 선과 악, 지배와 저항의 구도로 정치를 이해하는 과거의 도덕정치적 담론 대신 정부형태, 경제, 사회문화 등의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비정파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정치의 과학”(science of politics)이 등장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정치의 분석은 도덕적 선악을 분석의 일부로 포함할지언정 그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정파 간의 갈등이나 상업 발달이 초래한 사치·부패처럼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지 않으나 국가의 작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요소도 존재한다. 사회와 문명의 진보에 따라 정치적 행위의 조건 역시 변화하며, 이러한 복잡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에는 역사적인 성찰이 요구되었다. 냉전기 서구 정치사상사 연구가 여전히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와 같은 규범적 도식에 지배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포브스의 작업은,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와 함께, 18세기로부터 동시대의 맹목을 비판하기 위한 사유의 원천을 찾아내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계몽을 주도한 문인들은 당대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그들의 저작은 그것을 배태한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흄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을 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18세기 스코틀랜드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그들의 활동이 지닌 의미를 이해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사회의 성격과 변화를 설명하는 작업은 정치사상사의 영역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으며, 포브스는 사상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케임브리지학파에는 이러한 노고를 맡아줄 뛰어난 동료가 있었다. 바로 일찌감치 에딘버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니컬러스 필립슨(Nicholas Phillipson, 1937-2018)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단순히 사상의 집적체가 아닌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구축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케임브리지 재학 중 포브스의 수업을 들었으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의 또 다른 선구자인 옥스포드의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 1914-2003)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필립슨은 스코틀랜드 계몽을 주도한 문인들, 특히 흄과 스미스의 궤적을 중심으로 18세기 스코틀랜드 사회문화의 발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테제는 늦어도 1970년대 중반의 작업에서 대략의 얼개를 드러내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 있겠다.
필립슨의 설명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다. 가장 기저에 있는 것은 정치경제적 변화다.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한 이래, 에딘버러와 글래스고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주요 도시들은 잉글랜드의 교역망과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적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합병의 효과는 제도와 물질의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명예혁명 이후 런던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성장을 선도한 저자들, 예컨대 로크와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 섀프츠베리(3rd Earl of Shaftesbury),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등의 저술이 스코틀랜드로 유입되었다(필립슨은 특히 애디슨과 리처드 스틸의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1711-14]가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한 스코틀랜드의 문인들 역시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polite) 문예를 추구하도록 이끌렸다. 문인 협회·클럽은 스코틀랜드의 문화적 ‘교화’를 주도하는 전진기지로 작동했으며, 흄처럼 아예 런던으로 이주해 문필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이들도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의 대학은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도덕철학, 푸펜도르프의 저작을 교과서로 삼는 근대적 자연법 등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 후속 세대의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후대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로 불릴 일련의 문인 네트워크가 사회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은 1740년대를 지나서다. 당대 영국의 가장 명망있는 역사가이자 스코틀랜드국교회 및 에딘버러대학 모두에서 요직을 거친 윌리엄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을 비롯한 “온건파”(moderate) 지식엘리트 집단은 교회 “정통파”(orthodox)와의 긴장 속에서도 대학과 문인 협회 모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유럽 문예공화국의 역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필립슨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지적인 실천을 당대의 경제적 변화, 대학·협회 등 교육문화기구의 활동, 지식인 네트워크의 형성과 연결했으며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종합적인 서사를 구축했다.2)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포브스는 근대 정치사상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상업과 정치,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지목한 바 있다. 계몽주의 연구에서 이러한 ‘근대 정치사상’으로서의 측면을 깊이 있게 파고든 대표적인 역사가는 포브스의 또 다른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슈트반 혼트(Istvan Hont, 1947-2013)다. 헝가리 망명자였던 그는 옥스포드에서 트레버로퍼의 지도하에 (헝가리에서 취득한 학위에 이어) 두 번째 박사과정을 밟았다. 1977년 혼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정치경제학의 형성을 주제로 발족한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원으로 발탁되었으며―여기에는 케임브리지학파의 주요 구성원 외에도 벤투리 역시 참여했다―이후 30여 년간 케임브리지학파의 18세기 유럽 정치경제사상사 연구를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된다.
혼트는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가 대표하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정치경제론에서 맑스 이래 현대 정치경제학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지적 원천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포콕과 포브스의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은 혼트는 공화주의와 자연법의 언어가 당대의 정치적 논쟁을 거치면서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으로 재구축되는 과정을 지성사적 연구로 보여주고자 했다. 동시에 정치경제 논쟁은 올바른 국가발전전략과 정책방향을 찾아내려는 실천적인 고민 또한 담고 있기도 했다. 늦어도 17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유럽의 논자들은 어떠한 산업을 육성하는 게 좋을지, 어떠한 시장정책(혹은 식민정책)이 자국의 발전에 가장 유리한지를 두고 복잡한 논지를 개진하고는 했다. 자신의 대표작 『무역의 질투』(Jealousy of Trade: International Competition and the Nation-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 2005)에 수록된 논문들에서 혼트는 정치경제를 매개로 당대의 정치적 논쟁, 도덕철학적 쟁점, 국가발전전략, 정치경제학의 발전과정이 교차하는 과정을 정교하면서도 위력적인, 무엇보다 독자의 지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혼트의 또 다른 기여는 케임브리지학파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문제의식이 유럽 계몽주의의 연구로 확장될 수 있는 가교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동유럽 출신 망명자였던 그는 (한국을 포함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을 지도했다. 그의 제자들은 유럽 각지에서 유사한 문제의식과 분석 언어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맥락에서 사고하고 논쟁했던 여러 사상가·논객을 발굴하고, 당대의 논쟁이 정치와 경제의 제반 요소를 아우르는 복잡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혼트와 제자들의 연구는 계몽주의 연구가 상업사회·정치경제론·국제정치의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계몽사상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 유럽 전반을 아우르는 논쟁의 언어로 바라보는 토대를 마련했다. 잉글랜드의 상인이자 논객인 존 케리(John Cary)가 1695년 처음 출간한 잉글랜드 경제론이 18세기 중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번역출간되면서 각국의 논쟁지형에 따라 변모하는 여정을 추적한 소푸스 A. 라이너트의 『제국을 번역하기』(Translating Empire: Emulation and the Origins of Political Economy, 2011)는 이러한 면모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저작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럽 곳곳의 필자들이 공유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안팎의 국가 간 경쟁을 논의하는 분석적 언어였다는 점에서 계몽주의 정치경제론 연구는 진정으로 스코틀랜드와 유럽을 잇는 지적인 경로가 될 수 있었다. 포브스와 그 후계자들이 개척한 영토의 풍요로움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지성사 연구의 범주로서 계몽주의라는 개념을 전부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단 이번 글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유럽 국가들이 공유해온 또 다른 전통, 즉 기독교와 계몽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스코틀랜드가 아닌 잉글랜드는 그러한 계몽주의 연구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 답변은 이어지는 글의 몫이다.
1) 이하의 내용은 이우창, 「영어권 계몽주의 연구의 역사와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발견」, 『코기토』 97 (2022): 227-60의 2절 및 「문인의 글쓰기와 지성사적 전기: 제임스 해리스, 《데이비드 흄: 지성사적 전기》(2015)」, 『교차 3호』(읻다, 2022), 2절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2) 필립슨의 정수를 집약한 책으로는 애덤 스미스에 대한 빼어난 전기를 꼽을 수 있다: Nicholas Phillipson, Adam Smith: An Enlightened Lif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0).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