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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믿을 수 없는 그 잘난 교수들 / 고부응

최종 수정일: 2022년 10월 15일

교수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학부생에게는 학점 잘 주는 교수와 잘 안 주는 교수가 있다. 대학원생에게는 교수와 괴수가 있다. 조교들은 이상한 사람과 더 이상한 사람으로 교수를 나눈다. 총장에게는 말 잘 듣는 교수와 말 안 듣는 교수가 있다. 교수들끼리는 술이나 골프를 같이 하면 친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개새끼다.


교수들과 술도 자주 마시지 않고 골프는 아예 치지 않기에 많은 교수가 보기에 나는 개새끼일 것 같다. 대학의 이상이니, 지식의 공공성이니, 대학의 기업화니, 대학의 몰락이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학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떠드니 총장이 보기엔 나는 말 안 듣는 교수이기도 하다.


교수들 대부분은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다. 학창 시절에는 최우수 학생이었고 그런 최우수 학생들이 모인 최우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교수이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니 돈, 명예, 권력, 지위 어느 것도 마음만 먹는다면 못 얻을 것이 없다. 적지 않은 급여에 더해 그 밖의 돈벌이도 얼마든지 한다. 외부 강연, 프로젝트, 사외 이사직이 다 돈벌이다. 교수의 탈을 쓴 괴수는 돈 버는 일이 본업인 개인 사업자이다. 그들의 연구실은 사업장이고 대학원생은 말도 잘 듣고 능력도 뛰어난 일꾼이다. 이런저런 연줄로 방송을 타면 유명해지면서 명예도 얻는다. 권력과 지위를 얻으려면 고위 관료들의 의중을 헤아려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정부의 위원도 되고 더 잘나가면 정치를 같이하자는 말도 듣게 된다. 감사장이나 훈장 표창 등 정부 포상은 덤이다. 교수는 이 모든 것을 이루며 자본과 정치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교수들을 집단으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무리가 되어 버린다. 무능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서서 자기 무덤을 판다.


교수들 스스로 대학의 본질을 잊는다는 말이 아니다. 󰡔대학󰡕에 나오는 덕을 밝히고 백성과 가까이하며 최고의 선에 이른다는 공부의 참뜻은 공부가 본업인 대학에 있었던 적이 없다. 지식 자체를 추구한다는 뜻인 철학(philosophy)이 대학 학문의 중심을 잃은 지는 오래되어도 너무 오래되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율적 공동체였던 대학은 이제 경쟁자를 물리쳐야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장으로 변하여 있다. 대학의 이념이나 학문공동체 따위를 말하면 비웃음을 살 뿐이다.

무너져버린 학문공동체에 대해 인공지능이 묘사한 그림. Midjourney bot 생성. 프롬프팅 오영진.

교수 역시 돈 돈 돈 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속물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돈에 초연한 선비? 대학에 그런 사람 있으면 내가 장을 지진다). 그러니 교수답게 속물다운, 그렇지만 솔깃한, 돈 얘기를 하여보자. 내가 속한 대학은 지난 10여 년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급여 방식이 변하였다. 이는 근무 기간에 따른 자연스러운 임금 상승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로든 급여가 동결되면 경력에 따른 임금 인상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률만큼 임금이 삭감되기도 한다. 급여 동결은 경제성장률에 맞춘 임금 인상 역시 없다는 뜻이기에 경제 전체로 볼 때 상대적 임금 삭감도 따라온다.


또한 교수의 업적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 결과를 급여에 반영시키는 성과급제가 도입되었다. 교수를 S, A, B, C급으로 분류하여 S급과 A급에게는 평균 이상, B급에게는 평균, C급에게는 임금 동결과 연구실 회수의 방식으로 보상과 징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평균적 성과로 B급을 받을 것이라 예상되는 교수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자신에게는 별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나도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많은 교수는 좀 더 열심히 성과를 내면 평균 이상의 성과급을, 당시 급여 수준을 훨씬 넘는 급여를 받을 것을 기대하여 성과급제 도입에 찬성하였다. 자신이 C급이 된다고 생각하는 교수는 별로 없었다(교수는 항상 최우수 학생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열등생인 C급 교수가 되겠는가). 심지어 S급, A급 교수들에게 평균 이상의 성과급을 주면 대학 예산이 멀지 않아 고갈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교수도 있었다. B급 교수들에게는 호봉제에 해당하는, 이전과 마찬가지의 급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교수들은 성과급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교수의 급여는 10여 년 동안 거의 정체되어 있다. 사실 호봉 상승분 손실, 물가상승, 경제성장 등을 고려하면 임금은 계속 삭감되어왔다. 교수들은 기만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성과 연봉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자기들에게 닥칠 문제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임금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제학 경영학 교수들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른 교수들에게 성과 연봉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하지도 않았다.


계급사회가 된 대학에 대해 인공지능이 묘사한 그림. Midjourney bot 생성. 프롬프팅 오영진.

성과 연봉제에 따른 급여 인하와 더불어 업적 상대평가 제도는 교수들을 정신 못 차릴 정도의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연구 업적 평가 기준인 논문 편수는 지난 10여 년간 평균 5~6배는 증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교수 승진이 되어야 정년이 보장되기에 이에 매달려야 하는 조교수, 부교수급의 교수들은 10여 년 전에 비해 약 10배, 또는 그 이상 논문 편수를 내고 있고 또 내야 한다. 채워야 하는 논문 편수 때문에 장기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강의 역시 상대평가로 이루어지고 평가 결과 하위 그룹에는 재교육 권고 등 모욕적인 조치가 이루어지기에 교수들은 교육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학생들의 수업 만족도를 올리려고 분투한다. 일부 교수 직군은 강의평가 결과가 해고 사유가 되기 때문에 더욱더 학생들의 수업 만족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대학이 기업이라면(당시 이사장은 대학을 기업같이 경영하겠다고 했다) 일반적인 임금 상승 요인에 더하여 생산성 향상에 따른 보상으로 10년 전에 비해 5배 정도는 급여 인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해당 분야의 전공 교수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분야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자신이 속한 교수 집단을 위해서도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법률 전문 교수들은 교수의 동의 없는 성과급제 도입이 노동 관련 법률을 위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법을 모르는 나도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법률 위반 행위였다). 경영학이나 경제학 전공 교수들은 성과급제 임금 제도가 교수들의 근무 조건을 어떻게 악화하는지 몰랐을 리 없다. 또한 성과 제고에 따른 보상으로 교수들이 요구할 수 있는 근무 조건 개선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어떻게 해야 교수들의 요구가 관철될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교수협의회 등의 조직에서 해당 분야 전공 교수들에게 의견을 구해도 도입되는 제도가 교수들에게 이롭다거나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학 경영진을 옹호할 뿐이었다. 해당 분야 교수들은 아마도 성과 연봉제 도입으로 인한 손해보다는 권력과 자본의 충복이 되어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는 그들 나름의 혜안이 있었을 것이다. 대학의 이념을 지키려는 교수가 나서서 대학을 위해, 교수진을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신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교수가 교수 집단을 위한다고 말을 해보아도 그 결과는 뻔하다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교수든 그가 교수 집단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노릇이다.


자기 자신의 집단도 지키지 못하는 교수들이 방송에서, 신문에서,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서 성장, 경쟁력, 균형 발전, 책임, 화합 등을 말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 교수의 뒤에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은밀한 속셈이 숨겨져 있다고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교수라는 자들은 함께 잘 사는 삶 따위에 관심이 없다. 어떤 집단이든 그들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신 차려 다시 생각하여 보면 이 모든 것이 헛소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학이 생긴 이래 언제 한번 교수들이 금력과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높은 분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역사의 교훈을 잊는 자, 권력을 거스르는 자, 바로 그런 자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가 아닌가. 한참 전에 무덤 속에 묻혀야 할 내가 아직도 교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고부응(중앙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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