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닥 특별할 것도 없을 정도로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미디어 환경을 특징 짓는 것은 디지털 가상공간이다. 90년대에 이 특정한 종류의 가상공간이 막 출현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더불어 이 낯선 공간을 거친다면 꿈꿀 수 있는 유토피아적 기대들 또한 함께 피어났었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 가상공간의 비물질적 조건은 기존의 현실의 물질적 조건과 결부된 일련의 제약들을 여러모로 해방시킬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미디어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의 제약을 벗어나 전세계 단위의 공공공간을 만들어 냈고, 디지털 공간 속 유저의 익명성은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현실로부터의 탈신체, 나아가 탈인격의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물질적 조건으로의 해방이 기대된 지 거진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도달하게 된 오늘날의 풍경을 보자. 코로나19로 인한 반강제적인 가상공간으로의 이주와 메타버스에 대한 열풍에도 불구하고 과거 사이버스페이스의 해방적 전망을 찾아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듯 싶다.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술작가 안가영은 과거 디지털 가상공간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던 해방적 사유들을 재발굴하고자 한다. 그가 특히나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디지털 가상공간 안에 놓인 신체의 가능성이다. 그는 과거 비물질적 조건을 기획의 핵심으로 여겼던 관점들과는 다소 거리를 두며, 디지털 가상공간의 특정한 발전 영역인 게임 매체속 가상공간에 집중한다. 어째서 많고 많은 디지털 공간의 여러 부문 중 오직 게임 매체 속의 공간이어야만 할까?
게임 매체 속의 가상공간은 과거 흔히 디지털 가상공간이 비물질적이며 탈육화된 유저들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것과는 달리, 외려 가상의 신체에 대한 체험을 여전히 물질적인 경험으로 제공하고자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와 같은 게임 속에서 체험 가능한 가상의 신체에 대한 경험은 플레이어의 현실 속 신체에 귀속된 경험을 벗어난 체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몸의 정치학에 관한 대안적인 통로가 된다. 안가영은 이처럼 게임 속에서 가상적으로 주어진 몸의 경험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게임 매체에 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그가 제작하여 꾸준히 업데이트 중인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2019-2021)는 직접 플레이 가능한 게임 형태의 작품이다. 이 게임은 유명한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를 떠올리게 한다. <심즈>와 같이 쿼터뷰 시점으로 진행되는 본 게임은 작중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주된 플레이의 목적이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 게임의 등장 캐릭터들은 모두 각기 다른 종의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심즈>의 플레이는 ‘심‘이라 불리우는 인간 NPC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 현실에서 경험한 바 있는 인간관계들을 반추하며 <심즈>를 플레이할 수 있다.
인생 시뮬레이션인 <심즈>의 진정한 튜토리얼은 다름 아닌 우리 인생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에 등장하는 NPC는 심과 같은 일상 속의 친근한 이웃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게임의 등장 NPC는 다음과 같다. 이주노동자인 ’줄라이’와 복제견 ‘메이’, 그리고 AI 청소 로봇인 ‘준’이다. <심즈>에서와 달리 우리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튜토리얼을 현실에서 좀처럼 경험한 적이 없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종이자 낯선 타자로서의 존재들이 서로 관계하는 법을 상상해야만 한다.
게임에 관한 상투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우리는 온갖 낯선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일상적이지 않은 낯선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게임을 즐기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낯선 경험이라는 것이 언제나 긍정할만한 것이진 않다. 오히려 낯설다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게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 바깥에 나가 있다는 것이다. 낯선 경험이란 익숙하게 주어지는 일상과 비교하자면 예측하기 어려운 시비에 휘말릴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
게임의 폭력성에 관한 흔해빠진 시비들을 떠올려볼까. 거기서 흔히 지적되곤 하는 게임 속의 폭력성에 대한 표상들, 이를테면 ‘총기 난사’, ‘살인’, ‘자동차 탈취’ 등의 행위를 플레이 한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 현실의 일상적 경험들과 비교하자면 정말이지 낯선 일이다. 이에 관한 도덕적 판단을 제쳐두고 말하자면, 어쨌거나 그런 낯선 경험들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논쟁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게임 플레이의 결과이자 조건은 게임의 폭력성에 관한 시비들에서처럼 지리멸렬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게임 플레이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낯선 경험들의 다양성에 비하면 폭력적이라 일컬어지는 게임 플레이의 종류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비인간객체들의 공간으로서 게임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는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를 통해 체험하게 되는 낯선 경험이 마땅히 새로운 사유의 계기로까지 이어가길 기대한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의 주된 플레이 목적은 게임 속 등장 캐릭터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 등장하는 새 존재의 관계, 인간인 ‘이주노동자’와 짐승인 ‘개’, 그리고 AI ‘로봇’ 간의 관계를 시뮬레이션하며, 상이한 종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를 상상하고 체험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녀석은 AI 청소 로봇인 ‘준’이다. 인간과 같은 생물의 범주에 속하고 현실의 일상 속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개 ‘메이’의 생리적 활동을 가늠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자율적인 인격을 가진 로봇인 ‘준‘의 생리는 좀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를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타자들, 특히 비인간 객체들과 관계하는 법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짐승‘과 ’기계‘, 이 두 비인간 객체인 NPC는 이 게임의 난이도에서 핵심적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인 플레이어가 이들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이 된다.
예술이론가이자 철학자인 ’보리스 그로이스‘는 [코뮤니스트 후기](김수환 역, 문학과 지성사, 2017)에서 현대 인류학에서 ’기계성‘이 ’인간성‘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계는 더이상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종에 대한 내재된 위협인 것이다. 사악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상투적인 디스토피아적 SF물에서처럼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이제는 거의 종간의 대립으로까지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인간과 기계의 상생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에서도 이와 같은 구도가 설정되어 있다. 기계는 인간성에 대한 위협이 내재된 비인간 객체다. 그런 비인간 객체인 ’준‘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어딘가 꺼림직 한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과 비인간 객체의 대립적 서사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종간의 차이에도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어떨까? 보리스 그로이스는 앞서 이야기했던 기계성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서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인다. 인간의 기계적인 측면이 인간성에 대한 가장 큰 대립물이자 위협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에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과거의 유토피아 작가들은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면은 다름 아닌 기계적인 측면에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계성이 동물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유하는 동물인 인간, 다시 말해 ’인간‘과 다른 동물들인 ’짐승‘을 구분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시기에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이 동물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같은 구도는 완전히 뒤집혀버린 것만 같다. 오늘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차라리 ‘동물성‘에 가깝다. 차가운 기계적 이성이야말로 인간성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고, 이와 비교하자면 인간의 본능적이고 충동적이며, 말 그대로 동물적인 측면이야말로 인간성의 참된 측면을 보증한다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의 스크릿샷 2,3,4
사정이 그러하다면 짐승과 기계로서의 두 비인간 객체는 각각 인간성에 내재된 역사적인 부정성과 긍정성에 대한 알레고리다. AI 청소 로봇인 ‘준’의 기계성은 인간성에 있어서 가장 낯선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측면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복제견 ‘메이’의 동물성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과 같은 비인간 객체와 관계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 인간성에 내재된 비인간성 아니 오히려 참된 인간성을 마주해야만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현실과 가상이 대규모로 중첩될 메타버스 시대, 게임적인 시공간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새로운 자연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마주해야 할 수많은 비인간 객체들야말로 우리들을 해방된 미래로 이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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