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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아 거울아 / 오문석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 항상 다른 것을 바라볼 뿐, 정작 자기를 보지는 못한다. 눈의 직진성 때문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데까지 달려서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눈이 하는 일이다. 마치 태양의 빛과도 같다. 눈이 미치는 데까지가 나의 은하계이다. 눈이 있는 한 세상의 중심은 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눈이 다른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빛은 눈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다. 어디에선가 빛을 만들어주고 그것이 사물에 부딪혀야만 한다. 누군가 비춰준 빛이 사물에 부딪혀 눈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 또한 빛의 직진성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을 통과할 수 없는 빛의 한계 때문이다. 이때 사물에 부딪혀 눈으로 뛰어든 현상을 반사라고 한다.


이 반사를 이용해서 눈은 자기를 볼 수 있다. 언제부턴가 거울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더 먼 옛날에는 연못이 거울이었다. 물에 비친 자기에 매혹된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눈이 자기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놀라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더 멀리 가보면 어떨까. 눈이 자기를 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사물에 자기를 비춰보곤 했다. 사물이 거울이다. 빛이 사물에 부딪혀 되돌아올 때, 눈도 되돌아온다. 사물만 눈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도 되돌아온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나중에 반성이라고 했다. 반성은 사물에 묻어서 되돌아오는 눈의 흔적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물에 묻은 눈의 흔적인지, 눈이 버무린 사물의 흔적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사물에는 항상 눈의 흔적이 묻어 있다.


언제부턴가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었다. 어쩌면 거울이 흔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사물을 거울삼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 원시적 능력이 그리 중요한가? 그건 알 수 없지만, 가끔 그 능력을 상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람.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체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소유한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온갖 전쟁의 위업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아직도 양의 뼈다귀에 사슴의 윤곽을 긁어 놓거나 부싯돌을 양가죽 또는 미개한 취향에 걸맞는 단순한 장식물과 교환하고 있을 겁니다. 초인이나 운명의 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러시아황제와 로마황제는 왕관을 써본 적도 빼앗긴 적도 없었을 겁니다. 문명사회에서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든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슬픈 생애는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자살에 대해서도. 남류 작가들 틈에서 여류 작가로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사투에 대해서도. 그와 관련하여, 인용문은 그녀의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하게 만든다. ‘여성은 거울이(었)다.’ 물론 남성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것도 실제의 모습보다 더 크고 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는 확대경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울로서의 자기의식에 도달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용문은 슬픈 거울의 삶에 대한 슬픈 거울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Virginia with her parents at Talland House in Cornwall in 1892

그 순간, 그러니까 자신이 거울이었음을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거울이기를 멈추게 된다. 빛을 반사하지 않으려는 사물이 된다. 잘 알다시피, 빛을 반사하지 못하는 사물은 투명해진다. 마침내 그녀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시쳇말로 왕따가 된다. 그러니까 그녀의 슬픈 생애는 자신이 거울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에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거울을 거부하는 거울, 그것이 그녀의 모더니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녀의 소설은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데 봉사하는 전통적 소설 문법을 거부한다. 사건을 인과적으로 배열하면서 편안하게 종점까지 안내하는 고전적 플롯을 해체한다. 가히 소설을 거부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그녀의 삶과 소설이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눈의 흔적이다. 즉,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바라보았던 사물들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열어준다. 우리는 그동안 거대한 거울의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이 빈약해 보인 것도 나를 그렇게 비춰주는 거울의 효과인지도 모른다. 남보다 크고 위대해 보인다면, 그 또한 거울의 효과일 것이다.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울인지도 모르는 거울들 말이다.


그런 거울은 나에게 되돌아오는 내 눈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눈은 자신을 볼 수 없다. 오히려 내가 거울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거울 아닌 거울들’이 내 눈의 흔적을 보여준다. 너에게는 내 눈이 칼이었고, 때로는 올가미였음이 드러난다.


Portrait of Virginia by her sister Vanessa Bell, 1912

그래서 거울을 거부하는 거울들은 사르트르를 빌어서 이렇게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타인의 시선은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사람들을 거울로 만든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는 거울들로 고정시킨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움직이지 않는 거울이기를 원한다. 시선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날마다 거울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동화 속의 마녀처럼 말이다.


이 거울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순해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거울이(었)다. 너를 실제보다 더 작게, 혹은 더 크게 비춰주던 바로 그 마술 거울이(었)다, 라고 말이다. 서로 마주 보며 거울이었음을 고백할 때. 마침내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보는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이때 교환되는 것을 눈빛이라고 하자. 외부에서 비춰지는 빛이 아니라 눈에서 발사되는 빛, 그것이 눈의 흔적이다. 그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눈빛이다.


오문석(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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