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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류와 모더니즘의 회상 / 곽영진

최종 수정일: 2019년 11월 12일

한류를 통해 들여다 본 문화·예술 웨이브의 정체


한류(韓流, Korean Wave)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요소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한국에서 제작된 방송·음악·영화·게임·패션 등이 해외에서 인기리에 소비되는 문화(산업)적 현상이다. 한류의 물결 내지 열풍은 1990년대 말 중국, 대만, 동남아에서 TV드라마와 가요(K팝)로부터 비롯되어 2003-4년 일본에서 <겨울연가>의 빅 히트를 변곡점으로 정점을 찍고 연이어 영화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인 2010년을 전후로 한류는 위기와 침체를 맞았고 다시 몇 년 만에 이를 극복, 이제 각 부문별로 탈(脫)아시아의 세계화에 나서고 있으며 K팝의 경우 “세계 정복”을 노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영화는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의 세계 176개국 판매에 이어 <부산행>(2016)의 156개국 판매, <기생충>의 203개국 이상 판매 등 화려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검열의 장벽에 막혀 군중시위 장면이 나오거나 사회적 비판수위가 높은 <택시운전사>(2017)와 <기생충>, 성 묘사 정도가 짙은 <아가씨>의 중국 개봉이 이루어지지 않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한류는 일부 고급문화 전파와 한국어 배우기, 음식과 관광 그리고 전자제품·화장품의 이상선호 등 문화 전반의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허나 주로 대중문화 콘텐츠의 폭넓은 산업적 소비, 향유를 가리킨다. 이런 것은 이른바 아시아류와 그 중에 80년대의 항류(港流:홍콩류), 90년대의 일류(日流), 2000년대 초반의 한류와 화류(華流)의 형성에서 거의 같은 개념과 의미로 쓰였다. 한국은 고급문화는 물론 대중문학, 만화, 애니메이션 부문이 산업적으로 취약해 한류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 뮤지컬의 해외진출도 답보 상태라 논외다.


한편 ‘류’(流)는 영어 단어로는 물결, 파도 및 파동, 파장과 특정한 활동의 급증을 뜻하는 Wave가 쓰인다. 드물게는 열기와 열풍을 뜻하는 Fever로도 번역된다. 하지만 통상 (물·공기의) 흐름, 해류, 기류라든가 (특정 집단·사람들 사이의) 경향, 추세를 뜻하는 Current가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뉴 웨이브는 새로운 물결, 뉴 커런트(츠)는 새로운 흐름으로 한역되는 것이 적절하겠다. 참고로, 부분경쟁을 포함하는 비경쟁 영화제로서 아시아 중심의 세계적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는 메인 상명(賞名)이 영어로 된 ‘뉴 커런츠 상’인데 ‘아시아 신인작가상’으로 번역되고 있다. 창조적인 의역이다.


또 한편 ‘류’(웨이브)는 문화·예술의 어떤 향상, 증진 이상으로 대중적인 반응, 지지(승인)와 일정 정도의 인기와 흥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며, 작가예술을 포함한 고급문화 쪽에도 해당된다. 아시아 나라의 음악과 미술 산업, 특히 그 클래식한 영역이 너무 척박해서 그렇지 유럽에서는 고급 또는 고전 문화가 대중의 지지가 다소 높은 편이고 해외 수출, 관광 유치에 한몫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호가들(선진적 대중) 이상의 확장성을 띠며 웨이브를 형성하기엔 역부족. 그나마 대중문화, 대중매체와의 접목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근대와 달리 현대(당대)의 문화웨이브는 산업 연관성이 뚜렷하고, 그것이 대중문화에서든 고급문화에서든 간에 국가적 범위와 파급을 지닐뿐더러 또한 국제적 교류와 파급을 초래하고 수반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1940년대에 파악한 문화산업 그 이상이다. 한 국가의 집합적 대중문화 웨이브는 문화(예술)적 저속성, 비창조성이 큰 문제이긴 하나 반대로 완성도와 심미성이 높은 창의적 작품들과의 공존이 없다면 그 개화(開花)와 지속은 불가능하다.


영화사에서의 뉴 웨이브와 모더니즘


이렇게 유럽과 미국처럼 이미 형성되고 달성된 문화적 국제화나 세계화와 달리 일본, 중국, 한국과 여타 개도국(開途國)에는 국가이름과 합성된 문화웨이브가 있다(있을 수 있다). 거개(擧皆)가 ‘대중적’일뿐만 아니라 자본과 기술, 경영목적이 요체를 이루는 ‘산업적’ 특성이 있다. 또한 ‘국제적’인 성격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한 국가의 총체적 문화웨이브와 달리 영화 등 문화·예술의 특정 장르에 있어서의 웨이브, 특히 뉴 웨이브는 국제성이 (뉴)웨이브를 판별하는 결정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


미국 이외의 영화 선진국들에서는 1950년대 말 일군의 감독('작가')들이 할리우드식 선형적 서사 등 고전적 사실주의 영화문법에 대한 반동과 한편으론 네오리얼리즘 양식의 한계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영화 운동과 창작에 나섰다.



그들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나 프루스트 류의 '의식의 흐름' 수법과 같은, 1920-40년대의 유럽 현대예술에 이미 정착된 모더니즘 사조를 흡수하고 감독 중심의 영화를 주창하며 영화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제일 먼저 1950년대 말 프랑스에서 시작된 영화변혁 운동은 ‘누벨 바그’(뉴 웨이브), 즉 말 그대로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신조어를 낳았다. ‘누벨 바그’는 이에 더하여 특정한, 새로운 파(波)와 방식 및 스타일을 함의한다. J. L. 고다르와 F. 트뤼포를 비롯하여 C. 샤브롤, E. 로메르, J. 리베트, A. 레네 등이 누벨바그의 감독들이다.


같은 시기인 1960년대 초 이탈리아와 일본에서도 기성영화의 지진, 곧 현대영화의 혁명이 시작됐다. ‘누벨바그’를 바로 이은, (영화사에서 항용 영어식으로 표현되는) ‘뉴 이탈리안 시네마’와 ‘뉴 저팬 시네마’의 탄생이 또한 그것이다. 이들은 예술실험적 변혁을 일으킴은 물론 마이너리티 영화로 자족하지 않고 대중의 일정한 지지를 받는 아트필름을 추구했다.

영국과 미국은 60년대 말에 ‘프리 시네마’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 독일은 70년대 초 ‘뉴 저먼 시네마’로 뒤늦은 출발을 했다. 미국의 <졸업>(1967), <이지 라이더>(1969)는 일반 영화팬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회자된 수작이다.


현대영화(modern film)는 역사적 측면에서 ‘뉴 시네마’이자 ‘뉴 웨이브’로 탄생했고 또한 예술로서의 현대영화는 모더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이 모더니즘 영화사조는 영화 외부환경의 변화와 작가들 사이의 내적분열과 각자도생으로 70년대 말엽 이후 세계사적 패배를 맞이하고 만다.


한국영화사에서의 뉴 웨이브와 모더니즘


한국영화는 1945년 해방과 전후 혼란기를 맞는다.

50년대 초반 불안한 성장기를 거쳐 중후반인 55∼59년에 중흥기를 맞아, 59년 111편으로 제작수 100편을 돌파하기도 한다.

60년대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급성장해 ‘황금기’(1964·5∼1970)를 맞이한다. 한 해 200편 내외의 장편영화가 제작되고, 유럽과 일본에 불과 5년여 차이로 모더니즘영화가 개척되기도 한다.


한국영화사에서도 모더니즘 작품의 출현은 물론 뉴 웨이브의 시기가 있었던가?

‘뉴 코리언 시네마’ 또는 ‘코리언 뉴 시네마’의 도래가 있었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놀랍게도 1960년대 중후반 모더니즘 작품(수작·걸작)의 출현이 있었고 뉴 웨이브의 도래를 맞이한 듯했다. 그러나 운동성과 집중성이 부족하고 검열의 외압도 크게 작용, 뉴 웨이브의 형성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뉴 시네마’의 돌발적 출현이나 개별 약진이 있었지만, 모더니즘 영화사조의 전 지구적 패배와 새로운 혼종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모더니즘에 기반한 재래적(在來的) 의미의 ‘뉴 웨이브’의 도래와 실현은 적어도 1990년대 이후로는 한국 영화계에서 그 의미와 효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과 함께 ‘뉴 코리언 시네마’의 단서와 징후, 그 이상의 개척에 대해 회상하고 추억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먼저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인 <안개>를 보자.

<안개>(1967)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1964)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김승옥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단편 「무진기행」은 도덕적 상상력 또는 윤리적 세계관으로 삶을 이해하는 창작방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나타낸 김승옥의 출세작이다.


1967년의 어느 날, 우리나라도 이야기에 종속되거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영상(이미지)의 독립성, 우위성을 추구하는 ‘현대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신인 영화기획자 황혜미의 제안이 나온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그녀와 문학평론가 이어령, 영화감독 김수용 등이 참석한 기획회의에서 그들은 반질서주의적인 전위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영상을 앞세우고 뒤에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을 그림으로써 영상 중심의 감각적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김수용의 증언이다. 지금도 ‘한국 10대 영화’의 하나로 지목되며 한때 김수용에게 ‘한국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란 찬사가 붙기도 한 걸작 <안개>는 그렇게 탄생했다.


<안개>는 윤기준(신성일)과 하인숙(윤정희)이 강가나 길을 걸을 때 인물들보다는 주변의 공간을 더 강조하는 롱숏 기법,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 두 시점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구조, 현재의 윤기준과 과거의 윤기준이 대화를 하는 것이 압권인 ‘의식의 흐름’ 기법, 선형적인 전개형식을 벗어난 내러티브(서사), 또 과거의 윤기준이 현재의 윤기준의 일상에 개입될 때 동원된 몽타주 기법 등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영화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러한 기법들로 주인공의 근대화 속 번뇌와 억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노예가 된 소시민들의 일상과 위선 속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며 ‘정말 마지막’이라며 현실과 타협하는 윤기준의 모습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다.

예술성이 높고 신선한 이미지의 당시 포스터. 영화의 표현기법만큼이나 충격적이다.

한편 60년대를 풍미한 ‘5인의 거장’의 후배 격이지만 <안개>에 한 발(1년) 앞서 시네포엠의 모더니즘 ‘영상파’ 영화를 선보인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가 있다.

<초우>는 <맨발의 청춘>(1964)과 더불어 60년대 청춘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인간 욕망에 대한 뛰어난 주제의식과 독창적인 내러티브, 시적이며 회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영상미 등 작품성 면에서 단연 압권이다. 영화의 형식적 특성으로서 세트보다는 로케이션 촬영을 중시한 자유분방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이야기의 전개 외에도 이미지를 통해서 여러 가지 담화와 감정들을 전달하는 현대적 기법이 요체를 이룬다. 더불어 시네포엠을 방불케 하는 감각적이고 시적인 영상언어의 구사에도 주목한다.

<초우>는 매혹의 여인상이며 한국 최고의 미녀인 문희의 출세작, 또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 ‘초우’의 스코어로도 유명하다.

또 <초우>에 앞서 놀랍게도 1963년에 나온 이만희 감독의 <귀로>가 있다.

<귀로> 또한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보아 손색이 없다.

모더니티를 지녔거나 개척한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모더니즘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이렇다.


1. 절제 및 소격효과 - 연출, 연기 및 촬영과 사운드 면에서. [브레히트]

2. 서사로부터 이미지의 독립성 추구, 획득 [들뢰즈]

3. 전통적(할리우드 및 충무로 식) 서사 구조와 스토리텔링 기법에서 벗어나 모던하며 유럽적인 방식 사용. 비설명적, 생략적 내레이션과 카메라워크 등.

4. 일상과 공간, 특히 도시의 세부적 묘사. 더불어, 그 속에서의 사람들의 모습과 느낌 전달.

5. 열린 결말


이 외에도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1968, 이어령 원작)이 회상 형식 및 ‘의식의 흐름’ 기법 등 <안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한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영화이며,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또한 영상 이미지에 의해 드라마를 운반하는 등 전통적 서사의 전복이 특징을 이루고 도시화와 개발에 대한 자의식이 뚜렷한 수작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원고 분량이 넘쳐 구체적인 해설을 생략하기로 한다. 김수용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시발점>(1969) 등도 마찬가지.


뉴 웨이브의 좌절과 지금 유행하는 ‘영화 한류'


식민지와 전쟁의 시기를 거쳐 경제적 최빈국, 문화적 단절국가의 토양 위에서도 1960년대의 한국영화는 TV시대를 맞이하기 직전 가장 큰 호황기를 누리고 예술적으로도 급성장해 제1차 ‘황금기’(1964·5∼1970)를 맞이한다. 유럽과 일본에 불과 5년정도 차이로 미학적 현대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탈)근대 의식의 모더니즘영화가 출현했다. 형식의 개방성, 실험성도 뛰어났다. 물론 일부 감독, 일부 영화의 사례다.


이렇게 60년대 모더니즘 작품들의 개척으로 한국영화는 뉴 웨이브의 시기를 맞이한 듯했으나 그 흐름은 운동성·연관성·집중성이 부족하고 제작 편수가 매우 적었으며, <초우>와 <안개>를 제외하곤 흥행도 잘 되지 않았다. 영화비평이 잘 발달하지 않아 사회적 반향이나 여론의 조성도 신통치 않았다. 무엇보다 키스 신 하나를 제대로 넣지 못하고 또 각종 소재 제한과 사전 심의에 시달리는 등 군사정권의 검열 외압도 크게 작용해, 뉴 웨이브의 형성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 이후 70, 80, 90년대에도 충무로 주류 상업영화의 안팎에서 ‘뉴 시네마’의 돌발적 출현이나 산별적인 전진은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모더니즘 영화의 세계사적 패배와 새로운 다양화 및 혼종의 시기를 맞아 모더니즘에 기반한 종래적 의미의 ‘뉴 웨이브’의 도래와 실현은 적어도 90년대 이후로 한국 영화계에서 그 실질적 의미와 효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영화(사)에는 두 가지 웨이브가 있다. 현존하는 웨이브와 존재했더라면 하는 좌절된 웨이브.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영화 한류'(Korean Cinema Wave), 그 대중적 물결이 6-70년대 영화모더니즘의 성공, 즉 ‘신한국영화’(뉴 코리언 시네마 웨이브)의 형성·정착과 맞닿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예술가적 향기와 스타일이 더욱 짙은 작품들을 또 한 축으로 하며 세계 영화계의 중심 진입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칸 황금종려상 수상도 20∼30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고.


곽영진(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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