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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특 / 마준석

최종 수정일: 2023년 1월 11일

술자리에서 친구가 재미있는 농담을 하나 들려줬는데, 논의를 시작하기에 좋은 소재여서 먼저 소개한다.


어느 날 공상에 잠긴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난 한 번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가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고 싶어...”

그러자 아내가 반갑다는 듯 답했다.

“어머 잘됐네. 그럼 부엌에 와서 설거지 좀 해봐.”


이 농담은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 외에도 두 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더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농담은 다층적이다. 첫째로,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언어는 나의 의도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다. 나는 내 발화의 의미를 규정하는 주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뱉어진 순간 말은 특정한 의미 맥락 속에 등록되며, 그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사후적으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라는 말의 의미는, 타자인 아내에 의해 각각 ‘부엌’과 ‘설거지’로 뒤늦게 규정된다. 이 농담에서 웃음은, 이렇게 한발 늦게 당도하면서도 우리의 예상을 뒤엎어버리는 의미의 전복적인 힘에 기인한다.


이러한 첫 번째 시사점에 근거하여 우리는 두 번째 지점을 살펴볼 수 있다. 바로 현상 너머의 본질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상에 잠긴’ 남편이 꿈꿨던 피안은 실상 현상적인 경험 세계 너머인 것이 아니라, 바로 ‘부엌’과 ‘설거지’ 즉, 현상적인 이곳인 것으로 밝혀진다. 여기에는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이 놓여있다. 우리는 언제나 현상 너머의 본질이 진리라고 믿고 그 본질을 추구하나, 사실 애초부터 그 너머는 빈 공간으로서 누락되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는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 너머에 있다고 가정된 본질은 오히려 현상이 발휘하는 효과이자 일종의 환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아내는 남편의 발화가 지닌 본래적 의미를 오해한 것이 아니다.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구성되며 그것이 의미의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하게 밝혀내야 할 본래적 의미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발화는 애초에 어떠한 본질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 너머에 있다고 가정된 본질이란, 현상의 동일성을 근거짓기 위해 도입된 환상에 불과하다.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우리가 제기하는 많은 물음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물음은 “X란 무엇인가”의 형식으로 본질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가장 이목을 끌고 있는 물음은, “MZ세대란 무엇인가”이다.



“MZ세대의 탄생”, “MZ세대 사용설명서”, “MZ세대도 믿고 따르는 리더”, “MZ세대와 회식 없이 친해지는 법”, “MZ세대가 조직을 버리는 이유”, “MZ세대와 라떼 사장님이 만드는 조직문화”, “MZ세대를 사로잡는 경영 철학”, “MZ세대가 선택하는 회사의 비밀” ... 최근 몇 년 간 쏟아져나온 책의 제목들이다. 책뿐만 아니라 뉴스 기사나 사설, 유튜브, SNS에 이르기까지 MZ세대를 키워드로 한 글은 양적으로 방대하다. 사회는 MZ세대가 도대체 무엇이고,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욕망하는지 몹시 궁금해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젊은 세대에 적합한 마케팅 전략을 고안하고자 했던 최초의 기획(ex. 『트렌드 MZ 2019』)을 넘어 증상적인 수준에 이르렀는데, 이는 사회에게 있어서 MZ세대와의 대면이 가히 외상적인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MZ세대는 개성적이고, 진취적이며, 온라인 환경에 익숙하다. 동시에 개인주의적이고, 예의가 없고, 문해력이 낮고, 기회주의적이고, 눈치가 없고, 젊은 꼰대이고, ... 운운. 이것들이 MZ세대들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흔히 주장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만 본질에 대한 앞선 통찰을 상기해본다면, 우리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인터넷에서 큰 논쟁을 이끌고 뉴스에서 패널들이 토론까지 했던, “MZ세대는 회식에서 고기를 굽지 않는다”라는 예를 들어보자. 글쓴이에 따르면 회식을 갔더니 테이블마다 모두 선배들이 고기를 굽고 있고, MZ세대들은 족족 받아먹기만 한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나서서 본인이 굽겠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MZ세대는, 마땅히 막내가 해야 할 일인데도 조직 문화에 무지한 눈치 없는 자들이고, 이를 알았다면 의도적으로 회피한 이기적인 자들이며, 타인의 수고를 당연한 듯 여기는 염치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배들의 평가에 대한 소위 MZ세대의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어째서 고기를 굽는 것이 아랫사람에게 할당된 의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래 조직 문화가 그런 것이라고 답한다면, 원래 그런 것이 어딨으며 부조리한 문화는 바꿔나가야 하지 않느냐고 응수할 것이다. 그러면 선배들만 고생할 것이 아니라 함께 번갈아 가며 수고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답변하면, 원치 않은 불편한 회식 자리에 끌려와서 내가 고기까지 구워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다시 그런 회식 자리도 회사 생활에 필요하다고 말하면,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함께 술 먹고 고기 구워 먹는 시간이 어째서 필요하냐고 반박할 것이고, 이에 대해 회사에 대한 애정과 구성원 간의 친밀감을 함양해야만 업무도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답하면, 업무 수행에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지 사람 간의 친밀감이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고, 다시 답변하고, 다시 반박하고, 또다시 답변하고, 또다시 반박하고...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MZ세대의 반론들 앞에서 결국 답변이 궁색해진 가엾은 선배는 당황하며 폭발하고 말 것이다. “MZ세대는 이기적이고 예의도 없으며 아주 그냥 개자식들이다!”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실로 그럴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족족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은 개자식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Z세대에 대한 선배 세대들의 평가가 그 자체로 정확하거나 정당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MZ세대에 대한 평가는, MZ세대의 본질에 대한 답변이면서도 동시에, 조직 사회와 문화가 지닌 비합리와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MZ세대는 예의가 없고 또 없어야만 하는데, 그를 통해서만 사회는 MZ세대를 비난하면서 그 자신의 내적인 부조리는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MZ세대와의 만남은, 사회의 결여를 열어 밝힌다는 점에서 외상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MZ세대 덕분에 사회가 자신의 결여를 외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사회의 도피처가 된다.


바로 이 점에 최근의 ‘MZ세대 담론’이 지닌 문제가 놓여있다. 흔히 MZ세대 담론에 제기되는 문제점은, 1980년 출생자부터 2010년대 초반 출생자까지 한 번에 묶음으로써, 큰 사회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삼촌뻘과 조카뻘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문제 제기는 오히려 더 첨예한 문제 정황을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 제기는 삼촌뻘 세대가 지닌 고유한 본질과 조카뻘 세대가 지닌 고유한 본질을 여전히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MZ세대 담론의 진정한 문제는, 사회가 MZ세대라는 허구적 공동체의 본질을 환상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지닌 모순을 은폐한다는 점에 놓여있다. MZ세대를 분석하고 폄훼하는 것은, 그를 통해 자신의 비합리를 봉합하기 위함이다. 이 문제는 요새 젊은이들이 실제로 예의 없고 이기적인지 여부와는 독립적이다. 설령 아내의 외도가 사실일지언정, 남편의 편집증적 의처증은 여전히 증상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라.


따라서 우리는 MZ세대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MZ세대의 본질을 묻는 담론이 지닌 정치성이 무엇인지를 되물어야만 한다. 애초에 MZ세대의 본질이란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인 의미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가 MZ세대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나아가 그들을 평화롭게 적응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든(ex. “MZ세대 사용설명서”, “MZ세대도 믿고 따르는 리더”, “MZ세대와 회식 없이 친해지는 법” 등등) 전부 마찬가지다. 이는 모두 MZ세대라는 환상적 본질에 의존하여 사회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암묵적인 기획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MZ세대가 사회를 뒤흔들고 있으니, 그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나면, 사회는 본래의 안정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기획의 은밀한 목표는, MZ세대에게 사회의 균열을 야기한다는 혐의를 덧씌우는 것이다. 실상 균열은 애초부터 사회 자체에 내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MZ세대 담론은 그 자체로 증상적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소위 MZ세대 정치인 이준석과 박지현을 생각한다. 이준석은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다 내부총질로 몰락한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고, 박지현은 어떠한 구성적인 정치도 보여주지 못한 채 칭얼거리고 떼쓰다가 침몰한 철부지일 것이다. 실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둘은 MZ세대의 ‘종특’을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그래서 거대 양당은 이 두 명의 말썽거리를 축출하고 나면, 다시금 원래의 안정과 평화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안온한 환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러한 복귀는 청년 정치가 환기하는 내적 불안으로부터의 조급한 도망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그저 거대 정당이 풋내기 정치인 하나 감당하지 못할 만큼 허약하고 빈곤하다는 슬픈 사실만을 가리킬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MZ세대 정치인의 종특이 아니라, 어떻게 MZ세대 담론이 두 청년 정치인을 축출하기 위한 교묘한 변명거리로 사용되었는지의 문제이다. 결국 관건은 MZ세대의 본질이 아니라, MZ세대 담론이 지닌 정치성인 것이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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