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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breathe / 김헌주

“I can't breathe... I can't breathe”

2020년 5월 25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코피를 흘리며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죽기 전에 한 말이다. 굳이 2020년이라는 시점을 밝히는 이유는 이 사건이 가지는 역사성 때문이다. 유구한(?) 인종차별의 역사를 가진 미국사회이지만, 그간 흑인의 인권은 꾸준히 성장하여 급기야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다. 이젠 그들은 동등한 미국사회의 구성원인 줄 알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잔인한 영상은 전 세계인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조지 플로이드는 경찰의 무릎 밑에 깔린 채로 코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갔다. 숨을 쉴 수 없다고 거듭 외쳤지만 그의 호소는 저 잔인한 경찰에게 가닿지 않았다. 그의 혐의는 위조지폐 소지 및 제조였지만, 실제로는 20달러 지폐 한 장을 소지하고 있었고 경찰이 출동한 뒤에도 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밝혀졌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선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 조지는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 경비원으로 성실하게 일했던,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아빠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었다. 2020년 6월 2일 현재, 이 사건에 분노한 미국 내 흑인들의 시위는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은 미국사회만은 아닌 듯하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5월 28일 초안을 통과시킨 법은 홍콩인들의 목을 죄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세력의 홍콩 내정 개입과 국가 분열, 국가정권 전복, 테러리즘 행위와 활동 등을 금지·처벌하고, 홍콩 내에 이를 집행할 기관을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홍콩보안법이 그것이다. 중국 정부에 반대하는 인권운동가를 탄압할 여지가 있는 송환법 즉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여 100여 만 명의 홍콩인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중국 정부와 홍콩인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홍콩인들의 저항에 대해 중국 정부는 홍콩보안법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 또한 홍콩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국 정부의 탄압과 대중의 저항이라는 구도는 똑같지만, 두 시위의 목표는 다르다. 미국의 시위가 ‘동등한 국민의 권리’를 요구한 권리청원이라면, 홍콩의 시위는 ‘비국민이 될 권리’를 촉구한 해방청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보면 두 시위는 모두 ‘인간다움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 또한 치열한 투쟁을 통해 ‘인간다움의 권리’를 쟁취했다. 멀리 보면 100여 년 전 3.1운동에서 조선독립과 보편인권을 주창했던 조선인들의 만세부터 시작해서, 60년 전 4.19의 주체들, 40년 전 광주금남로의 시민군들, 23년 전 6월의 시위대들, 그리고 4년 전 국민적 촛불시위라는 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인간다움의 권리’를 쟁취했다. 100년 간에 걸친 긴 싸움을 통해 ‘인간다움의 권리’을 쟁취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정부가 이 두 시위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는 점은 매우 아쉽다.


실제로 홍콩 시위의 지도자 조슈아 웡은 홍콩보안법에 입장을 내지 않은 한국 정부에 섭섭한 감정을 드러낸 바 있다. 5월 2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어떻게 침묵을 지킬 수 있느냐”라며 “문재인 정부가 이익을 좇아 인권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다음 주 수백, 수천 명의 홍콩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전 세계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며, 40년 전 광주처럼 홍콩을 지지해주기를 한국 국민에 부탁한다”고 한국 정부의 도움을 강하게 촉구했다.

조슈아 웡의 저 분명하고 단호한 메시지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리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요구하진 않았지만, 과거 LA 폭력시위 당시 한인사회를 공격했던 역사가 있는 흑인들의 시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내어야 할까. 탄압의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국가들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정부의 공식논평이 나오기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질문을 비껴갈 수 없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다움의 권리를 쟁취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 등 전쟁범죄 피해에 대한 배상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어렵겠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we can speak!


김헌주(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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