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의 전성시대 / 김동규

아이들과 놀다 보면, 언어의 비교급과 최상급을 가지고 노는 말장난 유형을 더러 접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빠는 사과가 더 좋아, 복숭아가 더 좋아?’ 혹은 ‘철수, 영희, 영채, 서준이 중에서 누가 가장 좋아?’ 한두 번 답을 들려줘도 계속 묻는 것을 보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놀이가 왜 그리 재미있을까? 깔깔대며 좋아하는 아이들, 그들의 심리는 어떤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을까? 한때는 나도 저랬을 텐데, 그 어린 마음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재미있게 문법 구조를 익히고 사람의 취향과 사물의 강약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너그러이 넘기려 해도, 불쑥 ‘이런 놀이는 아예 없애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밀려들 때가 있다. 세상 만물을 하나의 잣대로 줄을 세워 비교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가 한갓 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가 된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유치한 짓을 반복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냉혹한 현실에서 비교급과 최상급은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어쩌면 아이들의 놀이는 엄혹한 현실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마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정된 자리와 기회를 두고서 비교하며 최고를 가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일면 불가피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등과 꼴찌에 대한 대우가 천당과 지옥을 연상케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승자독식의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항상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학문 영역에서 교수채용 기준이 항상 구설수에 오른다. 학문적 업적(단연 최고로 치는 SCI급 외국어 논문), (아이비리그로 확장된) 학력, 강의력, 도덕적 품성, 심지어 나이와 성별까지 각각의 경우마다 어느 하나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그래서 교수가 된 이들의 대체적인 소감은 ‘운이 좋았다’이지만, 탈락한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불공정하다’라고 말한다. 기준 항목들의 적용이 비일관적이어서 번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얼핏 과거보다 비교와 최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공정해졌다. 그런데 실은 그렇게만 보일 뿐, 여전히 이전과 대동소이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 이유만 꼽자면, 우리 근대 대학 100년의 역사에서 초창기에는 일제에, 다음으로는 미국 학계에 의존해서 교수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식적인 채용기준에는 없는 ‘인맥(학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학문 내적 기준에 의해 걸러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인맥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의 후진성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한탄과 함께, 이와 연관된 이야기를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느 교수의 자조 섞인 표현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교수가 되려면 최고의 학문적 역량을 갖춘 A급 학자가 되기보다는 인맥이 두터운 B급 학자가 되어야 한다. A급 학자는 기득권을 형성한 B급 학자들로부터 왕따 당하기 일쑤다. 그리하여 학계 현실은 B급 과두제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신랄한 풍자로 들린다.



그런데 야스퍼스의 책, 『대학의 이념』을 보면 그런 모습은 양상이 조금 다를 뿐, 선진적인 독일 학계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제 식구 감싸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표면상으로는 스스로의 구성원을 선정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대학은 최상급의 사람을 뽑는 데 찬성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도는 2등급의 사람들을 지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 대학이 위신이나 영향력을 염려하여 열등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경쟁의 두려움으로 본능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택되는 이는 ‘소임을 할 수 있는’ 사람, 즉 2등급의 사람들이며 그들을 선정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지적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다.”

경쟁 구도에서 꼴찌 그룹에 있는 사람을 선발할 수는 없다. 집단 안팎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행 집단 구성원보다 더 탁월한 사람을 뽑기도 어렵다. 기존의 (기득권이 있는) 구성원은 새로 선발된 사람과 계속해서 비교당할 게 분명하고, 그와 어렵사리 또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선발된 사람은 기존 구성원의 평균 수준 이상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이렇게 현실이 굴러가면, ‘B급의 전성시대’는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이들과 무한경쟁/승자독식경쟁을 유발하는 제도가 있는 한, 아이러니하게도 최고가 뽑히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보완해 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모든 대학이 국립대학인 독일에서 활동했던 야스퍼스는 교수선발권을 국가에 위임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하나의 잣대에만 목매지 않는 문화, 선의의 경쟁만을 허용하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비교 행위와 최상급 선별은 그저 재미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그쳐야 한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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