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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 꿈 / 김동규

어쩌다가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이 습관이 처음 몸에 붙었던 것 같다. 전적으로 악몽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이상하게도 똑같은 악몽이 매일 반복되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의 반복인줄 알면서도 꿈속에선 왜 그토록 무서웠던지… 꿈은 어두운 동굴에서 시작된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사방이 캄캄한데 어김없이 등 뒤쪽 동굴 천정이 무너져 내린다. 쏟아지는 흙더미에 쫓기는 꿈을 꾸다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새벽에 깨곤 했다. 이 몹쓸 꿈을 피하려고 알람을 맞춰 둔 꼬마의 계략, 그게 바로 이 습관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새벽형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호사는 어스름의 아우라(aura) 감상이다. 덤으로, 새벽을 부르는 청량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파트 숲에도 새가 살고 있다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면 속 꿈에 관하여』에서 멜랑콜리커의 예지몽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예언을 하거나 예언적인 꿈을 꾸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신성이 꿈을 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이들의 본성이 수다스럽고 멜랑콜리하기 때문이고, 가능한 모든 현상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많고 다양한 정념을 통해서 유사성을 보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예지몽을 신성한 무언가의 계시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비에 기대지 않고 예지의 능력을 멜랑콜리에서 찾는다. 멜랑콜리커는 들끓는 정념의 힘으로 상상력을 최대로 가동시켜 이미지끼리의 참신한 유사성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꿈이 예지력의 온상일 수 있는 이유라고 본 것이다. 감춰지고 억압된 가능성들이 폭로되고 사건 재배열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어렴풋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통상 멜랑콜리커는 날카로운 이성과 섬세한 감수성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예지몽을 꾸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회 계층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적 한(恨)이 피지배계층인 무지렁이 민중들의 정조에 가까운 반면에, 멜랑콜리는 지배층, 특히 엘리트 지식인들의 정조다. 멜랑콜리커는 본래 검은(melas) 답즙(chole) 기질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지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굳이 소수 특권층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서양문화에서 멜랑콜리는 지적 소양을 겸비한 자유인(시민)의 체취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꿈에는 미래 예측의 힘이 실려있다.


그렇다면 한인(恨人)은 어떤 꿈을 꿀까? 그의 꿈이 지성적 예지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지적 측면이 도드라진 대신 직관과 정감의 측면이 우세하다. 한의 대표 시인 김소월의 「몹쓸 꿈」을 잠시 읽어보기로 하자. 화자는 화창한 봄날 새벽 몹쓸 꿈 때문에 잠이 깼다. 까마귀와 까치의 울음소리가 자신의 악몽을 보고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린다. 지금은 ‘봄철의 좋은 새벽’이고 ‘세월은 도무지 편안’하기만 한데, 이 끔찍한 악몽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요히 또 봄바람은 봄의 빈 들을 지나가며,/이윽고 동산에서는 꽃잎들이 흩어질 때,/마 들어라, 애틋한 이 여자야, 사랑의 때문에는/모두다 사나운 조짐인 듯, 가슴을 뒤노아라.”

소월의 말에 따르면, 한인의 악몽은 사랑 때문이란다. 아마도 꿈의 몹쓸 내용은 연인이 위험에 빠지거나 죽는 사건과 관계된 것일 테다. 부재하는 연인이 ‘혹시 그렇게 되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꿈이 사납고 고약해진 것이다. 사사건건 연인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에, 모든 것이 연인에게 일어날 무시무시한 전조로 보인다. 시적 화자의 이런 마음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의 마음, 백제인의 그 애틋한 노랫말과 이어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여기에는 어떤 예지도 없다. 막연하고 불길한 예감만 있을 뿐이다. 자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의 앞일만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멜랑콜리커도 물론 악몽을 꾼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기’에 관한 흉조에 그친다. 설사 연인에 대한 것이더라도 연인은 ‘또다른 나(alter ego)’이기에, 자기 불운으로 쉽게 이전된다. 연인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상 자기에 대한 걱정인 셈이다. 이것은 지독한 자기연민에서 유래한 것이다. 멜랑콜리커는 ‘자기(Self)’라는 화려한 성에 갇혀있다. 맹목적 자기합리화를 통한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있다.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멜랑콜리커는 골수 나르시시스트이다. 하지만 악몽조차 미래 예측의 힘이 있기에 자기보존에 유리하기는 할 것이다.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적 멜랑콜리커(남편을 살해한 클뤼타임네스트라)의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무서운 꿈은 진정한 예언자였소.”


강석인 작가, <꺼지지 않는 꿈>

몇 년 전 한국사회에서 대규모 우울을 창궐케 한 악몽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세월호 참사다. 그때 딸을 잃은 어느 엄마가 합동분향소에 이런 손편지를 써 놓았다고 한다.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보겠다고 일 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 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 이 글에 담긴 정조는 멜랑콜리에 가까울까, 한에 가까울까?


여기엔 한과 멜랑콜리가 뒤섞여 있다. 글의 기저에는 짙은 한이 가득하지만, 가혹한 자책과 지옥행을 자청하는 자유인의 모습은 멜랑콜리 향을 자욱하게 발산한다. 이 깊은 정서를 한올 한올 섬세하게 풀어내기 전까지, 지금을 사는 한국인의 우울은 정체불명의 상태로 남을 것이다. 딸에게 건네는 꿈결 같은 말에 예지의 빛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에 떠밀려 비합리의 세계로 퇴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새로운 파토스(한과 멜랑콜리의 창조적 융합물)의 출현이 ‘사나운 조짐’이 되어, 결국 서슬 퍼런 권력마저 무너뜨린 것은 아닐는지.


소월의 꿈에 맞장구를 쳐주던 새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 도심에서 새가 사라진다면, 봄이 점점 사라지고 있듯이, 새벽을 건너뛰고 곧장 밤이 낮으로 직행할 것만 같다. 이건 꼴사나운 조짐이다.


김동규 (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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