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사상의 고원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월 24일

일본의 월간지 󰡔[현대사상]󰡕 신년호를 얼추 훑어봤다. 󰡔[현대사상]󰡕은 거의 매년 신년호를 통해 세계의 사상 지형을 전반적으로 소개해 왔는데, 2018년까지는 사변적 실재론이나 신유물론, 가속주의, 인류학의 전회 등 특정 사조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다가 2, 3년전부터 주제를 서서히 넓히더니 이번 호에서는 이 추세가 완연해졌다. 포스트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다른 사조들을 집중적으로 학습하고 소개해온 5~6년 간의 시기가 일단락되었다는 뜻이리라. 일본어로 활동하는 철학자, 사상가들이 (지금까지보다 더)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될 듯하여 반갑다. 이번 호 중 몇 편을 스케치해보자.



1. 대담 「인간은 살아있는 땅이다 – 분해와 혼합의 철학」

󰡔분해의 철학󰡕의 후지하라 다쓰시와 윤리학자이자 중세 쪽에 정통한 야마우치 시로의 대담이다. 대담 초반에 야마우치는 말한다. “현대 사상에서는 사변적 실재론에 보이는 하드한 실재론이 유행하고 있는 듯 한데, 반대편 극단에서는 생명론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요즘의 존재론 경향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13세기로 돌아가 대략 흐름을 파악해야 하죠. 13세기에는 인식론적 전회라는 게 있어, 거기서 흐름이 크게 변했다는 시각이 유력합니다. 이슬람 철학 가운데서도 아비센나가 서양의 존재론의 틀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향성 개념이 밀고 들어와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항대립적인 도식이 아니라, 그 중간에 인간 정신이 구성하는 영역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허구성만이 아니라 리얼한 구조를 발견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13세기적 논쟁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거 같고, 이런 의미에서 최근 철학은 중세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신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는 존재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명론의 시대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2019년에 일역되어 나름 화제가 된 에마누엘 코차의 󰡔[식물의 생 철학 ; 혼합의 형이상학]󰡕(2016) 등을 포함해 광활한 썰이 펼쳐진다.


2. 「타성(他性)의 말없는 음성을 듣는다」

방금 말한 코차의 책도 포함하여 2010년대 이후 식물을 둘러싼 담론들에 대한 글이다. 필자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식물(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측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식물 자체에 인간과는 다른 타성(他性)이 있다는 점에 유념하자고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식물이라는 이름 하에 다시 한번 인간중심주의로 돌아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식물이 인간과 얼마나 공통점이 많고 또 이로운지, 지구 파괴자인 우리가 어떡하면 식물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 등등). 식물은 우리에게 참으로 친숙한 존재인데 뭐가 그리 다르단 말인가? 우선 그들은 광합성을 통해 빛 에너지를 생산하여 이 에너지가 지상과 지표, 수중 생물들을 계속 순환하게 한다. 그리하여 서로 별로 관계 없던 생물들이, 중소 규모의 생태계들이 서로 대화하게 해준다. 아울러 지구와 우주가 커뮤니케이션하도록 매개하는 존재기도 하다. 이러한 식물을 잘 파악하고 진술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과학주의로 인해 냉담해서도, 또 과도한 의인화에 빠져서도 안 된다. 이 문제의 대안으로 필자는 시몽동의 기술관과 개체화론을 제시한다.


3. Geophilosophy(지철학)라는 섹션에는 총 5편의 글이 있다.

우선, 「동아시아 철학이란 뭔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니시다 기타로와 모종삼의 철학을 다루는데, 한톨도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걍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니시다와 모종삼의 사유가, 서양의 영미계와 대륙계의 성과를 흡수하면서도 당대는 물론 지금도 메워지지 않는 대립에 가교를 놓을 수 있다는 논지는 기억에 남는다. 이밖에 「철학 실천을 통한 개발도상국과의 국제 협력」, 「변하는 ‘타이(태국)의 형태’ - 민주화 운동과 국민통합에의 물음」, 「지구화의 외부보다, 지구의 외부를 상상하는 편이 쉽다 - ‘e-flux’와 러시아 우주주의」가 실려 있다.

그중 조금 자세히 언급할 글은 「J-Phill이란 무엇인가」다. 저자는 이제 일본의 자생적인 철학이 싹틀 때가 되었다며, J-Pop의 명명법을 본 따 이 철학에 J-Phil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일본이 충분히 위대하니 이제 일본 철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고, 또 서구중심주의에 아직도 지배당하고 있으니 진정 일본적인 철학을 해야 한다는 비분강개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 서구중심주의가 문제라는 의식은 작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본의 철학자나 철학 서적 독자들이 철학 책을 읽을 때 어떤 (신체에 새겨진) 장치들을 구사하는지, 잠시 들어보자. 철학책을 읽을 때 텍스트를 “전제와 결론이 논리적으로 해부된 논증”으로 바꿔 읽는 스킬, “존재론적인 이야기냐 인식론적인 이야기냐”를 식별하는 센스, 이야기되고 있는 것의 ‘모델’을 공유하고자 하는 이론적 스탠스 등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이런 현상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고 또 공감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얼마 안 가 이전 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필자는 J-Phil을 하겠다는 철학자라면 철학자에 그치지 않고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즉, 서양 철학서를 읽었더라도, 아니 서양만이 아니라 어떤 외국의 철학서를 읽었더라도, 자신의 책이나 논문을 쓸 때 “브랜덤이 ...라고 주장한다”나 “메이야수의 입장은 .... 이다”라는 보고가 주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철학서가 훌륭할 수는 있지만 J-PHIL 작업은 아니다. 자신이 얻게 된 어떤 경지를 일본어 사용자에게 일본어로 표현해야 한다. 한마디로, “‘일본어 내부에서 일본어를 변형시켜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는 자신의 신체와 말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독자들을 바꾸는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필자는 이런 방식만이 철학이라거나, 이런 철학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게 전혀 아니라고 덧붙인다). 이는 J-Pop이 서양 음악의 무분별한 수용기에서 자생적 성숙기로 넘어갔을 때 일어났던 변화와 비슷한 걸 가리킨다. 처음엔 떫기만 했던 가령 록의 리듬과 박자를, 일본인들이 자연스레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에게 친숙했던 리듬감과 박자, 음절 체계 등을 변형시켜야 했다. 바로 이런 활동을 하겠다는 것이 J-Phil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시적(poietic, 제작적) 철학을 주장하기 위해 필자가 리처드 로티를 끌어왔음을 참고로 말해둔다.


4. 그 외

다른 몇 편에 대해서도 한 문장씩으로 요약을 하겠다. 셸링의 철학이 대륙과 영미권에 새로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개(「그랜트 ‘이후’의 셸링 자연철학- 그랜트에서 우더드로」), 작년 하반기에 논란이 되었던 아감벤의 마스크 비판론을 소재로 레비나스의 ‘얼굴’론 속으로 깊이 들어간 다음, 󰡔[드론의 철학󰡕]을 인용하며 인간의 감각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 글(「원격과 접촉 – 리모트 시대 레비나스의 ‘얼굴’」), 제인 베넷이 자신의 생기적 유물론과 하먼 및 모튼의 객체지향 존재론이 얼마나 공유점이 많고, 또 그렇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쓴 글을 요약해주는 글(「논휴먼적 전회와 ‘존재자’들의 정치 – 제인 베넷 「시스템들과 존재자들」에 대하여), 자촬(자기가 촬영) 스티커 사진에서부터 최근의 자촬 디지털 사진의 합성변환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청)소녀들이 어떻게 자기 이미지를 가공함으로써 자기다움을 표현해왔는지를 살핀 미디어 환경학자의 글(「가공된 자기 이미지의 ‘자기 다움’」). 아-----ㄱ!!! 다 쓰고 보니 이번 호에서 가장 좋았던 정담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현실성이란」, 이걸 소개 못했네 ㅠㅠ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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