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하는 물질의 세계》가 촉발한 생각들: 물질로서의 예술 작업 / 권태현

최종 수정일: 4월 19일

2021년 가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던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을 통해 촉발된 생각들을 갈무리한다. 필자는 앞서 『퍼블릭아트』 지면에 실었던 「공생적 집합체로서의 전시」라는 짧은 글에서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가 주된 개념으로 삼고 있는 스테이시 엘러이모(Stacy Alaimo)의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 개념을 그 프로젝트에 대한 비평에 그대로 적용해보는 것을 시도했다. 횡단신체성은 다른 물질들과 몸이 어떻게 교차되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짚어내면서 몸의 내부와 외부라는 구분, 나아가 개별(in-dividual, 나눌 수 없는)이라는 관념까지 성찰하는 사유의 틀이다. 그 개념을 통해 살과 흙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 또한 우리가 신체라고 생각하는 대상에 얼마나 많은 다른 물질들이 겹쳐있는지 (박테리아나 미생물뿐만 아니라, 무기물까지 고려하면 인간의 몸에 인간의 유전자로 이루어진 부분은 오히려 일부에 불과하다.)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관점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물질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공생적 집합체의 일부라는 점을 감각할 수 있게 된다.


비타·네크로·비타 2021, 5주 동안 기문홍차에서 배양한 박테리아와 효모 공생배양체, 체인 호이스트, 쇠막대, 스프링 클램프, 물, 수조, 300 × 90 × 40 cm, 촬영: 오영진

이러한 관점에서 전시라는 예술 제도의 관습을 물질들의 집합체로 다시 보면, 개별적인 예술 작업들의 연계뿐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건축적 인프라, 예술 지원이라는 국가 제도, 나아가 전시장의 사물들을 작동시키는 전기, 소리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기 같은 것들까지 다양한 물질들이 연결된 생태 속에 놓여 있는 예술 작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관점을 그런 개념을 제안하는 하나의 전시가 아니라, 예술 작업 일반에 적용해보는 것을 상상한다. 예술 작업을 다른 물질들의 생태와 역동적으로 관계하는 물질로 다시 감각해보는 것은 어떤 비평적 사유를 제공할까? 이것이 이 글에서 나의 질문이다. 엘러이모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물질과 그것의 생태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를 다시 읽으며 “객체지향 존재론”을 주창하는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말하는 “객체들의 민주주의” 등 다양한 방식의 소위 ‘새로운 유물론’과 물질의 역량에 대한 논의가 수년 전부터 말 그대로 터져나오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가 느끼는 문제의식은 예술계에서 탈인간중심주의와 물질, 생태에 대한 담론의 대유행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제들이 단지 작업이나 기획의 소재로 다루어질 뿐, 실제 예술 작업의 물질적 위상에 대해 고민하는 관점과 태도는 보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의 연계 심포지엄 중 “기후 위기 시대 기술을 통한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세션에서 예술가 플랫폼인 다이아크론(Diakron)의 비야크 흐바스 쿠어(Bjarke Hvass Kure)의 주장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는 생태계나 물질에 대한 문제의식을 미술관이나 비엔날레에 전시할만한 오브제로 바꾸어버리는 소위 “추출적 경향”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런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 사례로 다이아크론이 이번 프로젝트의 온라인 전시에 선보인 〈Primer〉 등 작업을 제시하면서, 예술 실천이 단순히 어떤 주제를 표현하는 오브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생태계에 물질적으로 개입하는 과학 연구나 사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굉장히 유의미한 지적이고, 그런 방법이 예술의 물질적 위상을 새로 설정하는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예술 작업의 물질적 위상이란, 특정한 예술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업 일반의 물질적 위상을 새로 감각하는 것을 말한다. 예술 작업의 물질성에 대한 사유는 기존과 다른 예술 작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예술을 특별한 위상의 물질로 여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유물론으로 거칠게 묶어 이야기되는 사물에 대한 사유의 지평에서 예술의 존재론을 고민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먼저 물질적 차원에서 기존의 예술 작업에 대한 관념은 어떨까? 전시되는 예술 작업은 예술가의 고도의 사유를 통해 완성된 사물이기에 예술가가 제시한 그 상태를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는 약속 위에 올라가 있다. 특히, 전시에서 예술 작업은 저자에게 승인된 물질적 조건만이 온전한 것이라고 상정된다. 예컨대, 어떤 사고로 키네틱 작업에 동력이 공급되지 않거나, 스태프의 실수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품의 실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아주 인위적이고 국소적인 상황에 맞추어 작업의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다. 전시 공간의 노동자들이나 다른 물질적 조건들 모두 그렇게 승인된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 움직이게 되어있다. 기존의 관념에서는 물질 스스로의 역동성보다는, 예술가가 제시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게 예술 담론 안에서 작업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기보단 예술가의 사유와 실천을 대변하는 대상이 된다. 개념 미술이나 프로세스 아트, 대지 미술 등 외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물질적 위상을 인정하는 작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작업이 만들어내고 있는 물질적 사건보다는, 작업을 제시한 예술가의 의도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물구나무종 선언 2021, 단채널 영상, 6분 50초, 촬영: 오영진

이러한 맥락에서 역동적인 물질로서 예술 작업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예술가라는 신화적 저자에 대한 성찰이 먼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 예술가의 신화적 저자성을 비판하고, 예술 작업을 탈신비화(demystification)한다면, 기존과 다른 지평에서 예술 작업의 역동적 물질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탈신비화는 문화연구나 비판이론에서 오래 전부터 쓰여왔는데 그러한 방법 또한 사물의 역동성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귀착된다. 탈신비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은폐된 이데올로기적 지배, 인간의 욕망, 권력의 분배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탈신비화 역시 물질의 생기를 시야에서 가리고 정치적 행위성을 인간의 행위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p.23.)


모든 것을 인간의 행위로 수렴시키지 않고, 대상의 역량을 재고하기 위해 새로운 유물론의 논자들이 제안하는 방법은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성찰하고, 모든 것을 객체로, 나아가 모든 것을 행위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술 작업을 하나의 행위소(actant)로 두는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행위소란 행위의 원천을 가리키는 브뤼노 라투르의 용어다. “스스로 행위하거나 타자가 활동하도록 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된다. 행위소는 객체도, 주체도 아닌 ‘간섭자’(intervener)라고 할 수 있으며, 들뢰즈가 말하는 ‘준-원인 조작자’(quasi-causal operator)이기도 하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p.51. 참조.) 그렇다면 예술 작업은 대체 어떤 행위를 할까? 예술 작업은 대부분 전시장에 가만히 놓여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사물-권력을 가지고 무언가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질의 역능과 행위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의외로 오래된 전통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열어준다. 영국에서는 1846년까지 적어도 1,000년 이상 범죄에 연루된 동물이나 사물에게 책임을 물어 신에게 봉납(deodand)하는 제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칼로 다른 사람을 죽이면 칼을 휘두른 조작자뿐만 아니라, 칼이라는 물질 자체에도 책임을 물어 그 존재를 신에게 다시 돌려보냈던 것이다. 어떤 사건을 일으킨 책임이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물에게도 있다고 여겼다는 점을 잘 생각해보자. 특히, 칼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칼 자체의 역량을 인정하는 태도는 사물의 권력을 승인하면서 지금 우리의 고민에 어떤 길을 보여준다. 이미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작업이 무언가 사건을 만들어 냈을 때, 그 책임과 공은 왜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만 모두 귀속되는가? 예술 작업이라는 물질이 그곳에서 무언가 행위했다고 여길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을 이렇게 오래된 관념을 돌아보면서 다시 던질 수 있다. 예술 작업이 어떤 사건을 촉발시켰다면, 그 만남에서 벌어진 사건의 책임은 예술가(칼을 만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업(칼)과 관객(칼을 휘두른 사람)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념에서 예술 작업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나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의 상태를 절대적으로 두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물을 예술 작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물질적 생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질로서의 예술 작업은 담론이나 제도 없이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물질이 예술 작업으로 인식되려면 제도를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술 작업을 그냥 주어진 물질로 보기에는 문화적, 정치적 제도가 너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예술 작업을 물질적 생태의 일부로 보는 관점은 애초에 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레비 브라이언트 같은 철학자들이 잘 짚어내듯, 생태는 결코 인간과 구분되는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 사람, 식물, 동물 그 어떤 것이든 간에 맺어지는 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다. 비인간 행위자라는 것의 다층적인 스케일을 생각해야한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을 가로지른다. 새로운 유물론을 주창하는 연구자들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그레이엄 하먼이 『비유물론』에서) 같은 사회적 구성물을 분석하며 물질과 객체에 대해 논하곤 한다. 이 글의 맥락에서는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생각할 때, 그것의 물질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라는 행위소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 같은 제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제도와 문화, 담론, 물질적 짜임까지 다양한 연결 속에서 물질로서의 예술 작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도, 배제하지도 않고 단지 다양한 종류의 객체 중 하나로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업 또한 예술가나 예술 담론 모두 동일한 객체로 상정된 짜임 속에서 하나의 행위소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 작업 자체에 능동성을 상상함으로써 예술적 가능성의 체제를 바꾸는 것이된다. 예술 작업은 매번 다른 연결 속에서 다른 우연을 만들고, 우연은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는 사건을 촉진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짜임 속에서 새로운 사건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예술 작업을 통해 누군가 무엇을 표현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체로 무엇을 나타낼 역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사건의 공과 책임은 예술 작업을 만든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술을 마주하며 사건의 일부가 되어 있는 관객이라는 물질적 행위자에게도 돌아가는 것이다. 예술 작업은 단순히 은유나 알레고리로서 정치적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건의 연결고리를 통해서 사건이 되고 정치가 된다.


권태현(큐레이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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