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 강의와 형이상학 / 김동규

코로나19의 여파로 대학 수업을 비대면 화상 강의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낯선 수업방식이어서 불만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이 수업방식도 찾아보면 장점이 많다. 첫째,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상황(꼭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KTX로 귀향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둘째 대면 강의에서는 정중앙 앞에 앉은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하게 되는데 화상 강의에서는 그런 공간적 배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에(말하는 이의 얼굴을 큰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원하는 누구와도 가까이 시선을 맞출 수 있다는 점, 셋째, 강의 내용을 모두 저장하여 반복 학습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반면 이 수업의 치명적인 약점은 인터넷 접속이 불안정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문명이 전력 중단으로 인해 전면적인 생활의 마비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접속 불량 상태가 되면 화면이 정지되고 목소리가 뭉개지며 심지어 접속된 디지털 공간에서 강제 퇴거당한다(학생들은 ‘튕겨 나간다’고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학기에 나는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맡게 되었다. 심오한 형이상학과 화상 강의는 도저히 결합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코로나가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강의 도중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인 실존을 설명해 달라는 학생요청을 받고서, 하이데거적 실존(Ex-istenz)을 풀이하려 했다. 어원적 의미를 살려서 ‘바깥으로 나가 섬’이라고 말한 다음 그 의미를 설명하려 하는데, 갑자기 인터넷 접속 불량으로 내가 대화방에서 튕겨 나갔다. 서둘러 대화방으로 다시 들어왔고 흐름이 끊어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고 저장된 수업 내용을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내가 없던 사이 다음과 같은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남아 있었다.


학생1: 교수님, 실존의 정의에서, 바깥은 세계를 의미하나요?

(short interval)

학생2: 교수님 나가신건가요?

학생3: 교수님 튕기신 것 같아요

학생4: ㅋㅋㅋ

학생5: 바깥에 나가섬이시네요

학생3: ㅋㅋㅋ

학생2: 이게 실존인가요?

학생1: 바깥은 세계를 의미한다는 답변 같습니다

학생5: 실존을 몸소 보여주셨네요

이걸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화상 강의를 통해서도 형이상학 수업이 가능하다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인간은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자기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주어진 자기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낯선 세계로 여행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를 묻고 다양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엄성의 출처를 바로 이런 존재 방식, 즉 존재를 개방하는 현존재(Dasein)의 실존에서 찾았다.



내가 인터넷 화상 강의 플랫폼에 있을 때, 학생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선생 눈치 보느라 다른 친구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주제에 집중해서 자기 생각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데 교실의 권력자인 선생이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그곳은 일종의 지적 해방구가 되었다. 각자 자기 생각을 맘껏 펼친 것이다. 창의성은 이럴 때 나온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자기에서 나와 자기를 비울 때 그 빈터에 타인들이 들어올 수 있으며, 자기 바깥으로 나가야만 타인들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현실 세계와 디지털 가상세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실 세계 바깥인 가상세계로 나갔을 때 비로소 현실 세계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고대와 중세에 철학자들은 바깥 세계의 정점을 찾아 헤맸다. 있는 것들을 있게 해 주는 최고의 근거를 찾았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 중세 철학자들의 신이 그렇게 찾은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근대로 오면서 철학자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선회한다. 그들은 내면세계의 정점을 찾아 헤맨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통각, 후설의 초월적 자아가 그 결과물이다.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앉은 현대 철학자들은 고중세 철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영물이라고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근대 철학자들이 찾아낸 자아는 타자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럼 그렇게 비판하는 현대철학자들은 뾰족한 해법이 있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안팎의 아포리아에 부딪혀 난감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리’라고 한탄하며 아예 형이상학을 버리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정현종 시인의 시적 직관을 소개하고 싶다.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안팎 곱사등이/안팎 그리움//나를 떠나도 나요/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남에게 돌아가도 나요/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이 노릇을 어찌하리//어찌할 수 없을 때/바람 부느니/어찌할 수 없을 때/사랑하느니/이 노릇을 또/어찌하리” (정현종,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시의 전반부는 앞서 언급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시인도 궁지에 몰려 ‘이 노릇을 어찌하리’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시인은 말해주고 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 외에 할 게 없다. 아니, 사랑만이라도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점을 현대 철학자들은 놓치고 있다.


21세기 팬데믹 시대, 디지털 매체 시대가 요청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안팎을 그리워하며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랑의 형이상학이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호출할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딱한 ‘노릇’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네 인간의 운명처럼 여겨진다. 딱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노릇이다. 비대면 화상 강의로 수업해야만 하는 작금의 상황이 꼭 그렇다. 수업 성패의 최종 관건은 대면이냐 비대면이냐가 아니라, 사랑의 유무에 달려있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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