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숭고 1: 독일 철학의 특징 / 김동규

철학에 국경이 있을까? 보편을 지향하는 철학의 특성상, 원칙적으로 국경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글로벌 시대로 진입하면서, 이미 민족국가의 유효 기간은 만료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일 철학의 특징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일도 무익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처럼, 철학이라는 추상적 정신활동도 그것을 둘러싼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문화적 전통에 의해 선별되고 양육된다는 것 역시 결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름잡았던 독일 철학의 특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독일’ 철학을 거론할 때, 칸트는 첫 번째로 호명해야 할 철학자이다. 본격적으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철학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민족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잣대이다. 근대 민족국가가 발흥하던 시기에 칸트는 유럽 민족을 전통의학의 4체액설과 인간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구분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1764)에서 그는 4체액 가운데 혈액과 검은 담즙 두 가지만을 가지고 크게 두 부류로 유럽의 주요 나라들을 양분한다. 낙천적이고 다정다감한 혈액질에는 남부 유럽인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속하고, 자주 심오한 사색과 우울감에 젖는 검은 담즙질에는 비교적 북부 유럽인 독일과 영국이 속한다. 칸트가 보기에, 독일은 ‘화려한(prächtig) 숭고’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화려한 숭고는 어떤 것일까? 칸트에 따르면, 프랑스가 아름다움의 본령이고 영국이 숭고의 본령이라면 독일은 그 가운데의 어딘가에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숭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형태(윤곽)의 유무에 달려있다. 아름다움은 윤곽이 있는 작은 대상과 관련된 반면, 숭고의 감정은 윤곽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큰 대상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미와 숭고의 중간 어딘가 있다는 독일적 화려함은 가시적인 윤곽이 서서히 사라지는, 또는 역으로 보이지 않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는 그 과정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화려한 숭고의 사례로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화려한 일출이나 일몰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또는 하늘, 바다, 해변, 밤, 사람이 하나의 색조로 넘실대는 「해변의 수도승」(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흐의 칸타타나 베토벤 또는 말러의 교향곡 등도 화려한 숭고라는 언명과 잘 어울린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밝히려 했다.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이성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려는 불가피한 지적 욕구가 있음을 인정했다. 바꿔 말하면, 칸트는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절감하면서도 무한을 향한 동경을 멈출 수는 없었다. 넓은 의미의 이성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유한은 무한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한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무한에 대한 관심은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칸트는 뉴튼을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이 이룩한 (경험) 과학적 지식을 존중하였기에, 무한에 관한 관심을 억제한다. (경험적) 인식과 (경험 초월적) 사유를 구분한다. 자칫 전통 철학처럼 혼란과 독단으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흄처럼 무한에 대한 관심 전체를 화염 속에 내동댕이칠 수는 없었다. 영국(이후 미국) 철학자들의 쿨(cool)한 태도도 일종의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고상한 숭고에 속한다(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이 고상한 숭고의 표상일 것이다)고 말할 수 있지만, 독일인인 그에게 그런 태도는 잘 맞지 않았다. 무형의 무한을 아름다운 (유한한) 형태로 가공하여 떠벌이는 프랑스 철학도 맞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El caminante sobre el mar de nubes. / Caspar David Friedrich.

칸트적 화려한 숭고는 유/무한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 어쩌면 불가능한 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유/무한을 혼동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둘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둘의 접점을 찾으려는 무모하고 불가능한 시도다.


이런 칸트 철학은 두 지성사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하나는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의 흐름이다. 둘 모두 칸트가 천착했던 유-무한의 화려함에 연루되어 있다. 전자는 근대 계몽주의적 주체 속에 무한을 완벽히 녹여내려는(매개하려는) 시도이고, 후자는 이성적 주체가 아닌 감성적 주체 속에서 무한과 접촉하려는 시도이다.


전자든 후자든 도달 불가능한 이념에 집착했고, 결국 이성과 감성의 파산 선고로 종말을 맞이했다. 주객의 도식 속에서 무한은 언제나 저 먼 대상으로만 남든지, 아니면 주체에 녹아들고 만다. 다시 말해서 (그 무엇도 아닌) 무한이 사물화되든지 인간화된다.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 헤겔 좌파(마르크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현상학자들이다.


헤겔은 실러의 문구를 패러디해서 『정신현상학』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였다. “오직 이 정신의 왕국의 술잔으로부터/ 정신의 무한이 부풀어 오른다.” 헤겔에게 이성적 주체의 정신은 무한자가 피어오를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다. 이 멋진 표현을 통해 헤겔은 정신 속에 무한자가 충만히 차오른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대로라면 무한자는 맥주(혹은 포도주)의 거품처럼 나타났다 덧없이 사라져갈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몰락 이후에 내린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이 역시 화려한 숭고가 아닐 수 없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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