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를 품고 귀를 기울이면 / 박성관

1. 상대에 몰입하여

화이트헤드의 아내가 말했다. “그는 거실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곤 했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어? 화이트헤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네, 깨닫는 때가 있었어요. 귀를 기울여 보면 그의 친구가 잔잔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죠. 맞은 편에 앉은 화이트헤드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 차 푸르게 빛났어요. 상대에게 온전히 향해 있었고 어쩌지 못하는 흥분에 들떠있는 것처럼, 친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마치 하나가 된 거 같았어요. 그 경탄스러운 젊음이라니...”1)

<화이트헤드와의 대화> 중 한 대목이다(정확한 곳을 찾지 못해 내 빛바랜 기억을 살려 적어보았다). 대화를 나누던 중 호흡이 들어맞아 하나의 리듬으로 율동하기 시작했을 때, 한껏 달아올라 상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온전히 궁금해지는 순간. 낮부터 시작된 대화가 어스름녘에 노을로 수렴되어간다.

2. 승부와 호흡 - 효도르와 <손자병법>

종합 격투기의 황제로 불리던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그도 경기 초반에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러듯, 가볍게 탐색전을 벌였다. 가끔씩 주먹도 섞어보고 레슬링으로 엉키기도 하면서 조금씩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서로의 타격권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효도르는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호흡 맞추기의 천재였다. 자신과 상대의 호흡을 하나로 장악했다. 자신의 호흡에 따라 거동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호흡을 끊고 훅! 치고 들어갔다. 그는 하나의 호흡 속에서 두 호흡을 구사하는 자였고, 상대는 하나의 호흡 안에 갇혔다. 상대 선수는 효도르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효도르의 주먹이, 없는 각도에서 비롯되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이다.


아, 이거 <손자병법>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적의 형(形)을 드러나게 하고 나의 형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니(故形人而我無刑)’.2) 이는 전투만이 아니라 고대의 정보전, 첩보전에서도 핵심이었다. 아군은 특정한 형태로 포착되지 않고, 적군은 안마당까지 훤히 들여다보여야 한다. 적은 공격하려 해도 나의 고정된 패턴을 찾을 수 없다. 빈틈이 없다는 것! 어디로부터 공격이 비롯될지 알 수 없으니 상대는 수비할 곳이 무한대로 늘어난다. 그리고 부드럽게 흐르다 짧고 명확하게 터뜨리는 공격은 상대를 점점 하나의 패턴으로 고착시켜갔다. 한편 효도르 자신은 아메바처럼 흐물거리면서 스스로를 산재(散在)시켰다. 그는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있었다(반면 상대는 원치 않는 시점에 하나가 되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아레나에서 그의 물 흐르는 듯한 폭력은 간결하고도 압도적이었다. 뽀얀 아기 피부였던 탓에 툭하면 찢어져 피를 철철 흘렸다는 건 안비밀.

3. 대화의 목적

가라타니 고진은 대부분의 대화가 dialogue가 아니라 monologue라 했다. 쌍방 대화라고 하지만 동일한 가치관이나 전제를 공유하니 실질적으로는 독백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진정한 대화란 그런 공유물이 전제되지 않은 상대방을 향해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요하고 또 멋있는 얘기라고 느꼈지만, 그렇게 되면 특별한 대화 이외에는 독백에 불과해져버린다는 게 아무래도 걸렸다.


<중동태의 세계>3)의 고쿠분 고이치로가 <망고와 수류탄>4)의 기시 마사히코와 2017년에 나눈 <現代思想(현대사상)> 대담에서는 고진보다 한 세대가 좀 더 지난 세대의 대화답게 이런 의문이 제기되었다. 고진의 주장은 너무 낭만적인 게 아닌가, 일상과 현실로부터 꽤나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면서 두 사람은 모두 도널드 데이비슨의 ‘관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charity)’에 크게 공감한다(대화 중 고쿠분은 이를 ‘환대의 원리’로 새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실제 대화를 나눌 때, 상대가 ‘대체로 맞는 이야길 한다’라는 태도를 취한다. 자기 입장만 고집하고 심하면 싸움도 불사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이 말에 선뜻 동의가 안 되실 거다.

하지만 상대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조차 우리는 대화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대화에서 열을 받는 이유도,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한다는 게 너무나 답답하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굴을 붉힌 이후에도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건 얘기를 계속 하고 싶어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설마 아예 이해가 안 되겠어, 라는 자연스러운 믿음 때문이다.

대화 시 자주 화를 내고 고집을 부린다고 스스로 자책하시는 분들도 한번 잘 생각해보시라.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할 때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특히 마음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도, 현실이 진짜 이러냐고, 대립이 격해지면 대부분이 자기가 옳다고 우기지 않냐고 짜증내면서도 당신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있지?”

내가 보기엔, 짜증조차 이런 의문의 형태로 표현되는 건 당신이 이 글을 계속 읽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 쪽에서 먼저 튜닝을 해보려고 한다. 나 역시 지금, 그러할 당신을 생각하며 계속 튜닝을 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당신과 내가 파인 튜닝을 해서 이 글이 완독될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상호 합의에 이르느냐는 건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대화의 지속이다. 대화의 목적은 대화의 유지(Yuji)다.5)

4. 강자를 보호하고 싶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으며 나는, 그가 주장한 ‘강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조금 비스듬히 받아들였다. 내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의 꿈이나 지향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와 공유하는 바에 집중해주면서 그가 더 힘차게 치고나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싶다, 라는 식으로. 그래서 몇몇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당신을 보호해드리겠다고. 우리 서로 보호해주자고. 이렇게 글로 쓰니 좀 오그라들지만 실제로 말할 때는 이런 기분 아니었다. 새로운 관계를 스스로 시작하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러면서도 ‘강자’라는 말, ‘보호’라는 말은 돌출스럽고 어색했다.

5. 호의를 품고 나란히

지난 1, 2년 동안 몇 사람에게 ‘강자 보호’ 이야길 했다. 그리고 지지난 주, 맨 앞에 적은 화이트헤드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보호자이자 피보호자인 두 사람에게 강자 보호에서부터 대화의 유지에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다음 화이트헤드처럼 상대가 해오는 이야기에 따뜻하게 잠겨 들어갔다.

대화는 타자로의 도약이라는 말, 좋다. 강자를 보호하는 것도 좋고 대화의 목적이 대화의 유지라는 것도 좋다. 그런 좋은 말들을 일상으로 천천히 굴리면서 오다 보니 나는 상대가 말하는 게 궁금해지게 되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 극소수에 대해서만이긴 해도 아무튼 그렇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가 말한다. 나는 듣는다, 그다움이 그의 안에서 절로 드러나도록 기다린다. 이 흐뭇한 마음에 여유있게 돌아보니 그들이 오래전부터 내게 그래 주었던 게 아닌가 싶어졌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듣는 마음으로 말했던 건가! 그들은 알고 그랬던 걸까 아니면 ... 설마 모르는 상태로?



1)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루시언 프라이스, 오영환 역 <화이트헤드와의 대화 - 철학자와 신2)문사 주필이 13년여 동안 나눈 세기의 대화록>(궁리, 2006).

3)손자, 김광수 역 <손자병법>(책세상, 1999) 중 6 「허실(虛實)」 편. p.193

4)<중동태의 세계>(동아시아, 2019).

5)<망고와 수류탄>(두번째테제, 2021).

6)이상, 고진과 기시의 대담 이야기는 <現代思想>(靑土社). 2017년 11월호 중 p.46-47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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