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관님들, ‘폭싹 속았수다!’ / 김동규
- 한국연구원
- 3월 24일
- 3분 분량
어릴 때 읽은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다들 알겠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걸 좋아하는 왕에게 어느 날 재단사가 찾아온다. 재단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단 그 옷은 멍청한 이들에게는 안 보인다는 단서를 붙였다. 왕은 거금을 주고 재단사에게 옷을 주문한다. 왕도 신하들도, 그리고 거리에서 임금님 행차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아 옷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때 길거리의 한 꼬마가 불쑥 외친다. ‘엄마 저길 봐, 우리 임금님이 벌거숭이야!’
2024년 12월 3일. 평온한 일상의 겨울밤, 느닷없이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가 동원되어 국회를 마비시키려 했던 것을 모든 국민이 보았다. 일거수일투족 두 눈 똑똑히 보았다. 수많은 국민들이 위헌 불법 행위의 목격자이며 증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동체적 상식(common sense) 차원에서 무죄 추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에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피의자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면서 진실의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 역사에 기록하는 것, 그 정도가 이번 재판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판결이 늦어지고 있다.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울트라엘리트 판사님들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없는 것을 있다고, 혹은 있는 걸 없다고’ 판사들을 겁박하고 꼬드겨서 판결이 어려운 걸까? 그런 가능성을 믿고 싶지는 않다. 자기가 결정한 판결 하나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중압감과 신중함 탓에 늦어진다고 믿고 싶다.

역사에는 이번 판결보다 더 기막힌 사건도 있었다. 알랭 핑켈크로트(Alain Finkielkraut)의 『사랑의 지혜』에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재판이 소개되어 있는데,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결단코 왕을 재판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재판 없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한다는 것은 왕의 무죄를 가정하는 셈이며, 그것은 곧 혁명을 부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피를 토해내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루이 16세의 재판을 권유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방법을 취할 수 있든지 간에, 그 자체로 입헌 국왕의 독재정치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혁명적인 발상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 자체를 소송에 부치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즉 루이가 다시 한 번 재판의 피고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그가 용서받을 수 있고 무죄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있을 법한 일인가!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는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루이가 사면된다면, 무죄로 추정된다면, 혁명은 어찌되는가?
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옮김, 동문선, 1998, 170쪽. 재인용(번역 수정).
다양한 의견이 난립했지만 재판은 진행되었고,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기세등등한 혁명 세력이 판결의 주체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잠깐 동안 정의가 실현되고 혁명은 승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민중의 적인 왕을 재판 없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로베스피에르도 공포 정치로 독재자가 되었다가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프랑스 혁명은 기세가 꺾이다 못해 나폴레옹이라는 황제(독재자)를 낳았다. 혁명의 일시적 성공은 참된 승리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프랑스 정치사에서 혁명 주체는 숱한 부침을 겪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다.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운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다.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그만큼의 정의가 구현된다. 소위 우파는 자유에 방점을 찍고 좌파는 평등에 방점을 찍는다. 거기에 맞춰 정의가 달라진다. 예컨대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례 없는 피의자 인권 보호를 정의라 생각하는 사람들과 왜 불평등하게 권력자에게만 그런 법 해석을 내리냐며 부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누구의 정의관이 옳을까? 아마 정의의 이름으로 두 세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충돌할 것이다. 헌재의 판결은 그 싸움의 주요 국면이 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정의의 이름 아래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지만, 이 싸움에서 박애(사랑)는 더욱 더 요원해진다. 매번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런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정의가 없다면 사랑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사랑은 기껏 승자의 자기 과시(동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정의가 완벽히 구현되어 사랑의 가치에 눈을 돌리는 때는 언제나 올까? 사랑의 한없이 막막한 지연에 비한다면, 헌재 판결의 지연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다. 정의(자유와 평등의 황금비)가 확보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와 평등이 시소게임을 하며 안정적인 정의를 구축하지 못하는 까닭은 유예된 사랑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다면, 승리한 정의의 가치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혁명을 성공시킨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의 공포정치로 패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말의 정의도 없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다면 정의는 필연적으로 패배한다. 좌우의 날갯짓으로 새가 날 듯, 좌우는 서로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정의를 내걸고 싸울 땐 싸우더라도, 좌우는 패배한 쪽을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패배한 자를 끈질기게 사랑할 수 있을 때, 정의의 승리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마지막으로 헌법재판관님들께 전하고픈 말이 있다.
하늘을 짊어지는 천형을 선고받은 아틀라스처럼 어쩌다가 국운(國運)을 결정하는 자리에 앉으셨으니,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나요? 저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간 ‘폭싹 속았수다.’ 이젠 등에 짊어진 짐 모두 내려놓고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벌거숭이 임금님>에 등장하는 꼬마의 해맑은 시선으로만 얼른 판결을 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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